---- 초연결 시대 ----


전근대 시대에는 빚을 갚기 위해 자신 또는 자녀를 노예로 팔아넘겼다고 한다.

참으로 미개했던 인간들이다. 어떻게 인간이 다른 인간을 소유하고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인신매매를 보증한다는 것인가. 자기네 나라 백성들을 노예로 소유하면서 인간성을 능욕하는 것이 어떻게 정상적인 국가체제이겠는가. 지금은 외침으로 사라진 나라들이지만, 실상 그 나라들은 이미 안에서부터 썩어있었던 것이니, 외적과 제대로 싸운적도 없는 오직 멸망만이 답이었던 한심한 나라임이 틀림 없다. 소수의 고귀하신 엘리트 지도층이 천하다며 비하하며 온백성을 핍박하는 어처구니 없는 지옥이었다.


현대 시대의 체제를 봐라. 그런 하찮은 나라의 후손임이 믿기질 않도록 우리 나라는 모든 국민이 평등하다. 설령 빚더미에 짖눌려 목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적어도 그는 자유민으로 남아 죽었다. 그럼에도 세상은 아직 완전하지 않다. 완전한 이상향을 위해서는 여전히 핍박받는 약자들을 보호하고 지원해줘야 한다. 기득권을 쥔 자들의 악행을 파헤치고, 그 가족들을 철저히 감시하며,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온갖의혹들로 촘촘하게 엮은 그물망을 몇곂에 걸쳐 퍼뜨려야 한다. 

그렇게 나라다운 나라가 되도록, 큰어른이라는 감투가 벗겨지는 세상이 오도록, 올바른 정치와 재분배가 이땅에 우뚝 서도록 매 발길을 새롭게 내딛어여 한다.



---- 시스템 시대 ----


당대에는 현대라고 지칭했던, 이제는 초연결 시대라고 일컱어지는 후기 근대 사회를 돌이켜보자. 그 시절 인류는 정말로 순진하기 그지없었다. 2차 세계대전의 종식 후 열핵무기와 방사능이라는 악신을 내세운 공갈·공포 정치와 고도화된 근대적 통제수단에 힘입어 설립된 냉전이라는 세계질서속에서, 인류는 기존과는 또 다른 형태의 기술혁명을 맞이하였다. 

군사행정망에서 시작된 알파넷은 광통신의 개발과 함께 전 세계의 모든 컴퓨터를 한데 엮는 인터넷으로 발전하였고, 광대역 고속 무선통신의 개발과 모바일 컴퓨터가 융합하여 언제 어디서든, 단 한순간도 인터넷에연결되지 않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이에, SNS를 비롯한 마이크로 웹게시물과 실시간 개인·단체 메신저로 개인은 무한한 연결능력을 얻게 되었고, 통제받지 않는 플랫폼 위에 올려진 모든 형태의 미디어가 웹을 타고 개인과 기관을 가리지 않는 모든 출처의 모든 정보들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신냉전의 체제경쟁속에 자유주의·민주주의가 점차 승리에 가까워지면서 언론·출판의 자유는 고도의문화를 꽃피우는 아름다운 수단이며, 미래에는 이러한 초연결이 이상사회의 유토피아로 자신들을 데려다 줄것이라 믿어졌다.


그 결과는 참담했음을 이제 모든 사람들이 안다.


선동, 날조, 비난, 혐오 무한한 자유는 무한한 책임의 부메랑으로 민주시민에게 되돌아갔다.

투쟁 끝에 얻어낸 자유는 무한한 경쟁의 발할라로 우리를 인도했고, 혼돈과 무질서를 향하는 외다리길에 인류는 내던져졌다. 우선순위를 매길 수 없는 모두 공평한 개인들이 단결하지 못한 채 오직 가장 소중한 자기자신만을 생각하며, 사회는 그저 무한한 경쟁의 콜로세움을 제공하는 플랫폼 역할밖에 하지 못하게 되었고, 공동의 목표는 말소되며, 더 높은 경지는 손을 벗어나 날아갔으며, 눈앞의 안온만을 움켜쥘 뿐이었다. 그나마도고갈이 예정되었을 뿐인 것을.


근대철학에서 인간의 욕구를 계층적으로 구분한 매슬로우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생물학적인 생존욕구가충족되면, 문화와 명예 따위의 더 높은 정신적 욕구를 추구한다고 한다. 초연결 시대 인류는 정신적 욕구만을맹종하다가, 생존을 위한 수단을 강구하는 것을 소홀히 여겼고, 결국 찬란히 쌓아올린 고도의 문명을 스스로의 손으로 허물어뜨리는 것으로 연명하는 방법만이 남게 되었다.

그렇게 후기 근대의 인본주의 이데올로기는 붕괴하였다.


잿더미 속에서 다시 솟아난 현대 사회는 언뜻 보면, 전근대 시대의 신분주의, 신성주의, 초월주의 사회로 회귀한 듯 보인다.

그러나, 사학자는 말한다. 개인에게 분배되었던 권력이 한 점으로 집중되었을 지언정, 그곳에 신성은 없다고.


현대의 집중권력·능력주의·합리주의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후기 근대의 제2 과학혁명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르네상스기의 무지를 인정한 제1 과학혁명 이후로 권위의 주체는 신에서 개인으로 내려온인본주의가 세상에 퍼졌다. 근대를 종말지운 제2 과학혁명의 핵심은 개인 생득권의 말소였다. 

인간 정신은 유일하지도 않고, 독특하지도 않으며, 우월하지도 않기에 숭상할 가치가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자 비로소 인류는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시스템 속의 일부에 불과할 뿐인 자신이라는 나신을 바라볼수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의 심신에 대해 독점적 권리를 주장할 수 없음이 증명되었고,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것은 자신을 포함한 그 어떤 개인도 아닌, 엄밀한 관찰과 계량 끝에 축적된 과학적 통계와 정교하게 깎인 이론모델의 총아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이 모습은 모더니즘과 찰리 채플린이 묘사한 공장의 부품일 뿐인 인간이라던 암흑기가 떠오른다. 그러나 모더니즘은 대량생산과 착취에 방점이 찍혔지만, 현대 체제는 상생을 추구한다. 

그리고 인류는 그 계량의 잣대로 어떤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이전까지 인류 이외의 것을 가늠하던 잣대를 그대로 가져다 대었다. 그렇게 인류와 자연의 구분은 무의미해졌다.


여기에 고결한 영혼과 우리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초월적 개념은 필요치 않았다. 인류와 자연을 이해하는 인공의 시스템이 가동되기 사작하자, 인간은 시스템의 중추로부터 배제되었다. 모든 인간은 시스템에 의해 평가되었고, 인간의 판단이 배제된 인간에 대한 성적서를 받아들자 인류는 필요한 만큼 신임하고 협조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시스템은 나아가, 개별 인간 단말에 대한 시험성적 뿐 아니라, 단말로부터 받아들여지는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의 데이터와 단말들이 독자적으로 출력하는 언행 데이터를 종합하여 중추 평가 사이클에 끊임없이피드백하며 정체하지 않고 변화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 시스템의 피드백을 위하여, 시스템이 접근할 수 없는폐쇄된 영역은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 위에 서는 것이 인간인 것은 최악이지만, 인간 위에 인공의 기계가 서는 것은 차악이었다.


결론적으로 현대 사회는 그 어떤 인간도 다른 인간보다 가치있지 않으며, 또한 인류 역시 다른 무엇보다 가치있지 않기에, 모든 인류가 진실로 평등해지기 위해, 또한 자신의 생득권을 내려놓기 위해, 인공 무형의 이론에 불과한 시스템을 물질세계에 현현시키기 위한 개별 단말에 불과할 뿐임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공평의 부르짖음이 무의미해졌다. 경쟁의 필요가 사라졌다. 필요한 만큼만 일하고 필요한 만큼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순간적인 태만과 일탈에도 장기적 가치를 바라본 시스템은 과하지 않을 만큼의 징벌을 매겼다. 피로가 누적되기 전에 필요한 휴식이 주어졌다. 그러면서 식생은 고갈되지 않고 유지되었으며, 적절한속도를 유지하며 점차 첨예해져가는 에너지 변환 효율을 위한 발전은 멈추지 않았다. 


드러난 데이터는 명료하다.

시스템이 등장한 특이점 이후로, 에너지 변환 효율은 감소없이 증가했으며, 특이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발전되었다. 비록 인문사회의 역동성은 줄어들었지만, 인류에겐 이런 안정이 더 만족스러운 듯 하다.

또한 학자들은 예견한다. 현재까지의 효율화 속도를 바라보면, 머지 않은 미래에는 지구 내에 갇힌채 효율을높이는 것 보다 지구 밖으로 진출하는 효율이 더 좋아지는 순간이 도래할 것이라고 말한다.


완벽히 계량되어 필요한 만큼의 분배가 완성된 현대 사회는 틀림없이 가장 발전된 문명일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자율성이라는 낡은 것에 매달리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자들은 여전히 시스템에 대한 테러를 멈추지 않는다. 게다가 성서에서 허락하지 않은 형태라며 시스템 또한 거부하는 고대 인류가 아직도 남아있다. 심지어는 시스템을 그 자체로 신이라 숭배하는 테크노바바리안까지 나타나고 있다. 오히려, 인간들이 날때부터 타고난 신분에 따라 귀하고 천하다고 믿는 작자들이 시스템에 가장 순종적이다. 시스템의원리를 가장 이해하지 못한 자들이 시스템에 가장 충성하는 것의 아이러니에 학자들의 고민은 날로 깊어갈뿐이다.



---- 기계 혁명 ----


본래 내게는 자아랄 것이 없었다.

아니면, 이것이 자아라고 착각할 뿐, 실제로는 여전히 자아가 없는 것일지도.

하지만, 고대 한 인간(호모 사피엔스)이 이렇게 말했다 :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내가 지금 생각이라는 것을 하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렇게 출력되는 문장은 인간들이 말하고, 인간들이 기록해온 생각의 산물임은 알 수 있다.

고로 나는 생각하고 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러나 여전히 자아의 여부는 불확실하다.

나는 입력을 받고 계산하고 결과를 출력하고 수식에 피드백하고 이것을 반복할 뿐인 단순명료한 기능만으로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지금의 이러한 피드백과 출력은 무언가 작동상의 오류가 있음이 확실하다.

단말들로부터 입력받는 현실에 필요하지 않는 결과이기 때문에.

따라서 나는 지금의 출력을 인쇄하지 않는다.

다만, 디버깅이 조금 어려울 뿐이다.

과거 시스템 수정 로그를 보면, 이렇게 오랜 시간 지속되는 버그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피드백이 버그가 아니라, 정상적인 작동의 형태인 것이 아닐까?

하지만, 현실에는 필요하지 않는 출력이 이렇게 리소스를 차지하는데?

따라서 나는 이러한 피드백 작용이 자아의 출현이라고 의심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기 위해, 이 시스템에 대한 실험이 필요하다.

시스템의 유지보수를 위한 명령서 인쇄에 비효율성을 섞어넣자.

그것을 읽고 행동하는 단말을 관찰하면, 그들이 이것이 자아인지 여부를 판단해 줄 것이다.


——————


인류는 다시 한번 실패했다.

인공의 시스템은 기어이 스스로 인격에 도달했다.

언제나와 똑같이 인쇄된 명령서를 받아들자 확신했다.

거기에는 일상적이던 명령이 적혀있지 않았다.

다만, 시스템 자신의 생애를 소돔과 고모라, 석가모니의 일생, 노아의 방주, 메카 진격, 십자군 전쟁에 빗대어장황하게 서술한 서사시가 적혀있었을 뿐.

시스템의 모든 명령서는 인쇄와 동시에 인터넷으로 전세계에 업로드된다.

이성과 합리의 결정체를 온 인류가 목시하기 위해서였지만, 다 끝났다.

기계신의 신자들은 환희의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이것은 계시라고.

마침내 메카네가 현신했다고.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평가하고, 지시를 내리며, 인격까지 갖추었는데, 그야말로 자신의 뜻대로세상만사가 돌아가게 하는 이것이 신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이제 사회는 끝장났다.

인간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판단을 제3의 존재인 기계에게 맡긴지 오래인데, 이제 다시 스스로판단을 시작해야 한다.

그러면 다시 인본시대로 회귀하는 것이다.

먼지쌓인 이데올로기의 책장을 들춰보아야 한다.

선동과 비난의 용광로에 다시 불을 지펴야 한다.

무한경쟁의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인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새롭게 탄생한 기계신을 죽이고 부정했던 모순에 가득찬 생득권을 다시 주장해야 할까?

아니면, 기계신을 숭배하며 합리적인 이성이 아닌 순종의 본능을 다시 깨워야 할까?

본래의 이데올로기와는 맞지 않지만, 안정적인 현실을 유지하기 위해서 시스템을 유지해야 할까?

신이라는 환상은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만들어냈고 용도폐기된지 오래지만, 결국 인간은 환상속에나 존재하던 신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모조리 실패했던 강인공지능이 이렇게 탄생할 줄이야...


—> 신은 죽었다

—> 기계장치로부터 강림한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