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배부른 소리라고 손가락질 받아도 대꾸할 형편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그시절, 그때의 나는 아직도 이렇게 혼자 남아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꿈의 조각들을 찾아 헤메고 있었다.


특별한 존재이고 싶고 나의 꿈이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 시작한 기약 없는 여정은 남들이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동안에도 이어졌고, 그때의 꿈많은 소년은 어느새 추하게 늙어버린 아저씨가 되어 주위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이대로 끝내버리면 난 정말로 인생에서 제일 값진 시간을 허비했을 뿐인 패배자가 될 것만 같았고, 그걸 받아들이면 더 이상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내지 못할 것만 같았으니까. 


그래서 오늘도 나는 산을 올랐다. 이 짓을 시작한 지 이미 수십 번은 올랐을 산을, 그 어린 시절에 막연히 품고 있었던 두려움과 동경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인 동네 뒷산을 말이다. 


초여름에 접어들어 자랑하듯 녹음을 뽐내는 산길의 풍경은 이젠 거의 바닥나 눌어붙었다 표현해도 손색이 없을 나의 모험심을 부채질했고, 여느 때와 같이 산짐승들이 이용했을 법한 좁고 낮은 통로에 몸을 구겨 넣어 앞으로 나아가기를 십여 분, 군데군데 수정 조각이 박힌 실개천이 눈에 들어왔다. 


우뚝 선 나무들의 잎사귀 사이로 내리쬐는 햇볕은 실개천의 일렁이는 수면에 비쳐 무지개빛으로 반짝이고 있었고, 나의 발자국 소리에 목을 축이던 다람쥐들은 눈 한번 감았다 뜰 사이에 나무 위로 올라 곁눈질로 나를 흘겨보고 있었다.


그건 가벼운 산책 중에 마주쳤다면 더할 나위 없이 소박한 기쁨을 주는 풍경이었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런 산의 향취 따위는 느낄 새도 없이 찾아 헤매고 있었다.


우리들의 상식에서 벗어난 그 무언가를. 


그건 물건일 수도 있고 동물일 수도 있으며, 사람을 닮았을 수도 있다고 들었다. 


확실한 건, 지난 수 세기 동안 비단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회자되어 온 전승의 주인공들 중 하나가 우리 동네의 뒷산, 소백산맥 끝자락에 다다른 이곳에서도 터를 잡았었다는 이야기를 동네 어르신들의 입을 통해 주워들은 거였다. 


“자, 이제 어떻게 한담.”


배낭에 넣어 두었던 미적지근한 생수병으로 목을 축이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실개천을 비추던 오후의 따사로운 햇볕이 코끝을 간질였다.


순간 올라오려던 재채기를 가까스로 억누르고 고개 숙여 손목시계를 확인하니 아직 시간은 넉넉했고, 이 앞으론 한 달 하고도 보름 전에 대충 둘러본 것이 고작인 능선들과 산마루가 펼쳐져 있었다. 


비록 그때는 별 성과 없이 발걸음을 돌렸었지만, 오늘도 그때와 같으리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그렇게 기세 좋게 첫발을 내딛는 순간,


“아 씨발!”


왼발 아래가 푹 꺼지면서 눈앞의 나뭇가지를 붙잡을 새도 없이 그대로 비탈길 아래를 향해 곤두박질쳤다. 


뭐라도 잡기 위해 손을 휘적거렸으나 잡히는 건 얄팍한 가시덩굴뿐이었고 다섯 번 정도 구른 끝에 어느 거대한 나무 둥치에 이마를 부딪치자,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별이 보인다는 말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그다음은 뭐, 더 말할 것도 없이 정신을 잃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좁은 계곡 옆의 자갈밭에 엎어져 있었는데, 정신이 들기가 무섭게 형용할 수 없는 고통에 이마와 오른쪽 어깨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고통이 느껴지는 쪽 어깨에 왼손을 얹고 두어 번 정도 돌려보니 더 큰 고통과 이물감, 잡음이 나지 않는 걸로 보아 다행히도 뼈를 다친 것 같진 않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처음 발을 헛디뎠던 곳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어둡고 물안개가 자욱하게 낀 것이, 마치 다른 세상에 떨어진 것과도 같이 느껴졌다.


아무리 한낮에도 해가 잘 닿지 않는 산속의 사면에 자리한 계곡이라지만, 이 정도로 어둡고 습한 장소가 고작 동네 뒷산의 계곡면에 있었을 줄이야. 


“어머, 산 아래에서 손님이 다 찾아오고, 별일이네.”


그렇게 처음 발견한 장소에 대해 감탄하고 있기도 잠시, 뒤통수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나는 그대로 들이쉬던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사람. 아니, 귀신인가? 


귓바퀴를 어루만지는 듯한 간드러진 목소리의 주인은 티 하나 없이 깨끗한 소복 차림을 하고 있었고, 머리는 마치 사극에서 튀어나온 듯한 양반집 자제처럼 뒤쪽으로 옥빛 비녀를 꽂아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널리 알려진 속설과는 달리 지면과 맞닿은 발에는 빈 공간이 아닌 연보랏빛 비단화가 신겨져 있는 것을 보면 이 이상 눈앞의 이 여인을 귀신이라 의심하는 건 무의미해 보였다.


세로로 길게 세워진 동공만 빼면 말이다. 


“누, 누구세요?”


신비함을 넘어 위압감마저 느껴지는 그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미처 마음을 가다듬을 여유도 없이 얼빠진 목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고, 이를 본 여인은 질경이 줄기를 들고 있던 오른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작게 웃음 지었다.


“그렇게 무서워할 것 없어.”


내 물음에 여인은 그런 경우에도 없는 말과 함께 조금씩 이쪽으로 다가왔고, 그러는 와중에도 내 시선은 그녀의 길게 솟은 동공과 질경이 줄기 사이로 엿보이는 은빛의 무언가를 향하고 있었다.


“누구시냐고요!”

“사실대로 말하면 믿을 거야?”


다소 겁에 질린 목소리로 그리 소리쳐 봐도 눈앞의 여인은 차분하면서도 고혹적이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되물어 왔고, 그런 여인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정체 모를 분위기에 압도된 나는 대답 대신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큰 줄기 너머에선 이시미, 작은 줄기 사람들은 이멩이, 그 너머 사람들은 율무기라고 부르고,”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마치 시를 읊듯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혀 나가는 그 여인의 입에선 결코 직접적인 대답이 나오지 않았고, 다만 내가 스스로 답을 찾기를 유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미르가 되어 하늘에 닿으려 하지만 아직은 그렇지 못한 존재.”

“…됐어요, 이제 뭔지 알 것 같으니까.”


한가지 존재를 지칭하는 말이 각 지방마다 다르다는 것 만으론 정체를 특정할 수 없었지만, 결정적으로 눈앞의 이 여인이 무슨 존재인지를 알 수 있었던 건 미르. 즉, 용이 되고자 하는 무언가라는 말이었고, 굳이 그걸 되물을 만큼 나는 눈치 없는 놈이 아니었다.


“그래서, 육신이 있는 사람이 내 앞에 다 나타나고, 무슨 용건이라도 있어?”

“믿지 않으시겠지만,”


이어지는 여인의 물음에 겨우 목소리를 쥐어 짜낸 나는 먼저 그런 말로 운을 띄웠고, 눈썹을 한 번 치켜뜨며 계속 말해 보라는 그녀의 의사를 확인한 뒤에야 다시 입을 열 수 있었다.


“저는 오래전부터 당신 같은 존재를 찾아 헤맸습니다.”

“그것참 별난 취미네.”


“취미 따위가 아닙니다.”


그래, 취미 따위가 아니었다.


그런 단순하고도 속 편한 동기로 이 짓을 시작했었다면, 첫 직장에서 잘리고 기약 없는 봄방학 같은 인생이 시작됐을 때 그만뒀을 거다. 


대학 시절에도 그랬다. 다들 반쯤 장난식으로 지원하고 활동했던 민속학 동아리 내에서 진짜로 그런 걸 믿는다는 태도를 내비쳤을 때에도 그걸 진지하게 받아줬던 건 동아리 고문이었던 국문학과 교수님뿐이었고, 그나마도 아마 당시 신입생이었던 나의 학문적 열의를 존중하려 했던 교수님의 작은 배려였겠지.


“당신을, 당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건 저의 오랜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짧은 인생이라곤 하나, 반평생 좇았던 꿈 그 자체가 나의 그런 노력과 시간들을 그저 취미 따위로 치부했던 게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런 나의 치기 어린 언행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그저 의미를 알 수 없는 옅은 미소만을 짓고 있었고, 이 이상 무어라 말을 하면 좋을지 망설이던 나는 이어지는 여인의 말에 그저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제 꿈을 이뤘으니 앞으론 어쩔 건데.”


그 말대로, 이제부터는 뭐를 목표로 삼고 살아가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내 꿈은 처음부터 이렇게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을까. 아니, 어쩌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 줄 알고 있었지만, 그저 어린 시절의 당면한 문제들을 회피하기 위한 선택지로 그것을 잡아놓고 시간을 버려온 게 아니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시작된 건 끝없는 자기혐오와 번민이었다. 


나는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삶을 살아온 건가. 내가 그 어린 시절부터 주변에 공공연히 밝혀 온 꿈이라는 건 막상 그 대상과 만나고 나면 이렇다 할 방향과 차후의 일들을 제시하지 못할 정도로 즉흥적이고 가벼웠던 건가.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런 내 모습이 어지간히도 신경 쓰였던 건지, 그녀는 여전히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내게 그리 말했고, 날 배려해 주는 그녀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아직 나는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꿈을 이룬 이후의 삶을 생각하지 않았던 건 사실이었으나, 고작 몇 분 남짓한 시간 안에 결정을 내려야 할 정도로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삶은 짧지 않았고, 그런 만큼 신중히 생각하고 싶었다.


“산 아래에서, 좀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그것 참 김 빠지는 답변이네.”


그래서 일단 내린 결론은 대답을 보류해 두는 거였다. 


그리고 나의 그런 태도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그녀는 비아냥대듯 그렇게 대꾸하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런데, 그쪽을 다시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물론 여인의 그런 모습은 가늠할 수 없는 그녀의 연륜만큼이나 넓은 마음씨 덕에 그리 오래 가진 않는 듯 했고, 나의 물음에도 대답 대신 손바닥만 한 은색 비늘 한 장을 건네준 걸 보면 다행히도 나를 다시 만날 의향이 있는 듯 싶었다.


그대로 짧게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네고 계곡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자욱했던 물안개도 그치고 동네 뒷길과 이어지는 산등성이에 다다랐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당히 긴 시간이 흐른 건지, 앞동산 너머로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 해는 눈에 닿는 모든 풍경을 차분한 주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고, 그런 와중에도 내 양 손에 보물마냥 들린 손바닥만 한 비늘 한 장은 여전히 은빛 광택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것을 가방에 넣고 마저 발걸음을 옮겨 집 앞에 다다르니, 퇴근 시간이 겹치기라도 한 건지 어머니와 남동생이 막 현관문을 열어 젖히고 있었고 예상했던 대로 듣기 좋은 소리가 날아들지는 않았다.


“야 이놈아, 뭘 하다가 이제 끄데와!”

“됐어요 어머니, 저거 저러는 거 하루이틀도 아니고.”


나의 면전을 향해 어머니의 짜증과 동생의 비웃음이 이어졌으나, 안타깝게도 나로선 그저 묵묵히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올해가 지나면 나도 서른이었고, 허우대도 멀쩡한 놈이 그 나이 먹도록 아직 번듯한 직장 하나 없이 아르바이트로만 전전하며 꿈 같지도 않은 허상을 좇는 모습은, 스스로 생각해 봐도 가족들의 눈에 좋게 비칠 리는 없을 게 자명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적당히 눈치 보면서 청소, 빨래 같은 소일거리를 하며 남는 시간에는 방구석에 누워 진짜인지 거짓인지도 모르는 목격담 따위를 찾아보거나 오늘 같이 산을 오르는 게 고작이었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지만, 오늘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의미로 방문을 걸어잠그고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우선 이제부터 내가 무엇을 하면 좋을지, 무얼 해야만 지금까지 쏟아 부었던 시간들을 만회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고, 가능하면 오랜 기간 집을 떠나있고 싶었다.


물론 그런 고민에 앞서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가족을 포함해서 지금까지 날 바보취급했던 사람들에게 내 꿈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지만, 그런 식으로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어 봤자 서로 좋을 거 하나 없을 거라는 건 너무도 당연한 결론이었고, 그런 걸 감수하면서까지 계속 산 아래에 머물러야 할 정도로 내겐 여지껏 쌓아온 인간관계에 대한 미련 따윈 없었다.


그래, 내가 내린 결론은,




1.


내가 다시 산을 오른 건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뒤였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보잘것 없는 삶이었지만, 그래도 종적을 감추기 위해 신변을 정리하다 보니 의외로 많은 시간이 흘렀고, 집에는 적당히 워킹홀리데이를 하러 간다고 둘러댔으니 적어도 1, 2년은 문제 없겠지.


이제와서 판을 무를 생각 따윈 없었다.


여지껏 내가 걸어온 길과 받아온 취급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다른 선택지를 고르는 쪽이 더 이상했고, 나 하나 사라진다고 무슨 일이 생길거라 걱정할 정도로 세상이 날 중심으로 돌 것이라 믿을 나이는 지난 지 오래였으니 말이다.


그런 아무래도 좋을 생각들을 하며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처음 그녀를 만났던 계곡에 다다랐고, 이전에 보았던 그 사람을 한껏 움츠러들게 만드는 자욱한 물안개와 함께 뒤편의 바위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흰색 소복 차림의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이제 뭘 할진 정했어?”


인사 대신에 그 물음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치맛자락을 두어 번 털어낸 그녀는 세로로 길게 세워진 동공을 반짝이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더 뜸 들일 것도 없이 지난 사흘 동안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쭉 고민했던 그 한마디를 털어놓기로 했다.


“저를 당신의 제자로 받아주세요.”

“싫어.”


이게 이렇게 즉답으로 나올 줄은 몰랐는데.


“앞으로 반백년을 더 산다 쳐도 진사는 커녕 초시 소리도 못 들을텐데, 그런 제자 들여서 뭐하게.”


내가 그 간결하면서도 확고한 대답에 당황하고 있는 사이, 여인은 차분한 목소리로 거절 의사를 내비친 이유를 밝히고 있었고, 그 이유라는 게 하나같이 내가 노력한다 해도 극복할 수 없는 것들이었기에 나로선 무기력함 이전에 반발심이 먼저 튀어나왔다.


“그쪽 입장에서 저는 분명 주어진 시간도 짧고 아무런 재능이 없어 보이겠죠.”


특별히 내가 잘나다거나 무언가 자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이라도 남은 인생을 자기 꿈을 위해 정진해 보겠다는 게 그렇게 무의미한 일인가요?”


다만 무언가를 시작해보기도 전에 기회를 박탈하고 별 볼일 없을 거라는 태도로 일관하는 것이 화가 났다.


내가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삶을 불태워 왔는지, 어떤 각오로 신변을 정리하면서 이 자리에 섰는지 그녀는 과연 알고 있을까. 


그동안의 여정이 이런 식으로 종말을 고하게 될거라면 이젠 나로서도 마지막 선택지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말은 청산유수같이 잘하네.”


그러거나 말거나 눈앞의 이 여인은 처음 만났던 그날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와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고, 더 이상의 이해를 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든 나는 담담한 심정으로 가방을 열어 그것을 꺼냈다.


“그럼 저도 어쩔 수 없겠네요.”

“진심이야?”


내 손에 들린 물건을 본 그녀는 아주 잠깐이었지만 눈동자에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으나, 나는 그것에 개의치 않고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떡갈나무 고목의 가지에 그것을 걸었다.


직경 2센티미터짜리 로프를 말이다.


“잘 생각해봐. 네 인생은 한번 뿐이잖아.”

“그 한번 뿐인 인생의 숙원이 짓밟혔는데 더 살아서 뭐합니까.”


처음과 비교하면 두드러지게 흔들리는 목소리로 나를 타이르는 여인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오히려 인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일을 진행하는 나는 의외로 체념 섞인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담담하게 로프를 두어 번 매듭지어 고리를 만들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꿈의 편린이나마 맛볼 수 있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그 말과 함께 발판처럼 밟고 서 있던 아래로 늘어진 가지에서 뛰어내리자, 숨이 콱 조여오며 눈 앞이 붉어졌다.


목뼈가 부러질만 한 충격이 가해지지 않았기에 꺽꺽거리는 기분나쁜 소리와 함께 거품 섞인 침을 토해내는 추하고도 지루한 고통의 시간의 이어졌고, 숨이 끊어지기 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지난 삶을 돌이켜 보던 나는 별안간 느껴지는 하강감과 함께 틀어막혔던 숨이 탁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알았어, 제자로 받아주면 되잖아!”


로프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닥에 엎어진 채로 연신 기침을 토해내던 나는 앙칼진 목소리로 그리 말하는 그녀의 대답에 고개를 돌려 시선을 위로 올렸고, 그곳에는 한손에 어른 허벅지만한 떡갈나무 가지를 쥔 채로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빛을 띠고 있는 여인의 애처로운 모습이 자리하고 있었다.


“단, 조건이 있어.”


그 말이 믿기지 않아 숨을 가다듬고 입을 열려고 하니,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먼저 말을 가로챘다.


“앞으로 다시는 내 앞에서 죽는다고 말하거나 죽으려는 짓 따윈 하지 마.”


이전보다 한 층 누그러진 어조로 그렇게 말하는 여인의 얼굴엔 어딘지 모르게 적적한 감정이 엿보이고 있었고, 그녀가 나를 제자로 받아주겠다고 말한 이상 이제는 목숨을 함부로 할 생각따윈 없었기에, 나도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긍정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크게 한번 끄덕였다. 


이걸로 된 거다. 


혹자는 목숨을 담보로 한 공갈협박 내지는 도박을 한 거 아니냐고 비난하겠지만, 가진거라곤 몸뚱이 빼면 뭐 쥐뿔도 없는 나로선 이 방법이 최선이었고, 적어도 내 부탁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죽으려고 했던 건 진심이었다. 


아직은 더 꿈을 꾸고 싶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