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 마지막 날이다.


강에 몸을 흠뻑 담구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버스 기사 얼굴을 최대한 가까이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서 있는것조차 민폐가 되리라 생각해 카드만 찍고는 흘깃 보고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 창 밖을 보고 싶어졌다. 가는 길 심심하지 않게 눈에 담아두고 싶은 풍경이 있었다.


풍경을 하나 하나 눈에 담는다. 눈에 담는다. 담다 보면 강이 된다.


그러므로 강에 빠지는 것도 내가 생각한 풍경에 나를 집어넣는 것이 아닐까?


물론, 풍경은 아름답고 따스하지만, 진짜 강은 차갑고 두려우니깐.. 내 진심은 두려운 것이다.



강에 도착했다. 그물망이 있는 곳이다. 어제 누가 다녀간 듯이 그물망이 잘라져 있다.


저 사람은 마지막까지도 최선을 다하며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가고는 바람이 되어 되돌아와 나를 떠밀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이 아프다. 바람이 거세다.


예전에는 죽지 말라는 문구도 있었던 것 같지만, 지금은 없다. 없다고. 그러다 전단지를 봤다.


50대 아재가 유튜브를 시작하면 만들 것 같은 조악한 폰트로 만들어져 있는 전단지다.


전단지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지만 이상하리만큼 빳빳하고 따스했다. 내 꿈처럼 따스한 기분, 포근하고도 감미로운 냄새.


' 914 '


' 국번없이 연락하세요. 삶이 힘든 사람들에게'


정부 기관의 연락처일까? 아니라는 위화감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눈물을 느끼며 핸드폰을 집었다. 


9 , 1, 4 천천히 아주 천천히 숫자 하나하나를 누르면서 마지막으로 기도했다.


여기에서만큼은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분명 다리 위였는데, 소파에 앉아 있다.


베이지색의 소파는 온통 하얀 건물에서 빛나는 존재다. 하얀 건물에 데스크가 있다. 꿈인가? 직원이 있다. 눈을 감았다 뜨고 몸을 일으켜 세워 본다. 꿈이 아니다. 엉덩이에서 압력이 떨어지는게 느껴진다. 몸을 세운다. 비틀거리며 데스크로 다가간다.


하얀 가운, 의사처럼 보이는 얼굴의 사람이 나와 자신을 소개한다.


구원사무소입니다. 정당하게 죽을 이유가 있다면, 원하는 방식으로 죽여 드리겠습니다.


얼떨떨한 나에게 그는 속삭인다.


삶이 죽음보다 더 힘들면 죽음을 드리고, 죽음보다 삶이 쉽다면 삶을 살게 도와드리겠습니다.


이건 꿈이다.


"가족이 모두 죽었습니다."


꿈이라는 걸 알고 천사에게 고백한다. 일가족이 성난 자동차에 몰살당하고 나만 살아남았다.


"가족들이 당신을 원망합니까?"


"아닙니다. 좋아했던 그들을 못 보는게 슬픕니다."


"알겠습니다."


천사는 잠시 생각하고는, 이렇게 속삭인다.


"그 자에게 천벌을 내리겠습니다. 당신이 고통스러운 만큼.."




"가족이 있었음에 감사하십시오."


순간 화가 치미며 다른 사람에게도 많이 들었던 이야기를 천사가 똑같이 하기에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다. 천사는 한마디를 더 내뱉으려 하고 있다. 내가 화와 욕지거리를 다 내뱉기도 전 말을 끊고는, 


"이전에도 들으신 건 압니다만, 그럴 추억조차 없는 사람은 무엇으로 의지하는지 아십니까?"


"......"


"있다가 없는 것이기에 추억이 도리어 큰 슬픔이 되지만, 저는 예상치 못한 때에 소중한 이를 잃는 게 슬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제안을 하고는,


"좋습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가족이 어떻게 일생을 살다가 보내가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그걸로 괜찮으실까요?"


천사가 시간을 되돌리는건 자신의 영역 밖이라고 유감을 표하고 영상을 틀었다.


딸아이의 여생, 부인의 행복, 아들의 기쁨 , 가족들의 고난과 해결, 생일, 기일, 기념일, 제사.


기억이 심어지는 느낌이 난다.


"앞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제가 넣어둔 기억을 차례대로 떠올려 말하십시오."


"구원사무소 914입니다. 다음에 다시 보지 않기를."


문에 달린 방울에 딸랑거리는 소리가 나고, 나는 문을 열어 강으로 돌아왔다.


기억이 난다. 가족의 추억이다. 구원사무소는 잊었다.


의사가 내게 심어준 기억만으로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몇 년이 지나고도 실제로 인기척이 없다는 것은 알지만,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




#진료수첩 1


천사는 이승의 시간과 물리적인 접촉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유감입니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건 행복한 기억을 심어드리는 것뿐입니다.


틀어드린 기억은 가짜입니다.


당신 가족의 시간은 그날로 멈췄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시간은 계속 갑니다.


당신 가족의 시간을 가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면 당신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오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