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시 기절시킨 보초병 오크를 등에 짊어진 채 바삐 걸음을 옮겼다. 스파링은 내 뒤를 따라오면서도 양팔을 벌려 흔드는 자세를 가끔 취했다. 밤의 숲속은 사위가 칠흑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우리 일행은 오직 단말기의 위치표시에 의존해서 나무와 나무 사이를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마을에 있는 정신지배자는 보초병의 기절 사태를 느끼고 그 시답지도 않은 회유책을 우리가 거부하였음을 분명히 알아차렸을 것이다. 나는 스파링의 방어막이 적의 탐지능력을 막아낼 수 있을지에 대해 우려스러웠다. 

"스파링, 교감의 능력을 펼칠 수 있는 범위에는 제한이 있지 않아?"

"한누리, 아무리 뛰어난 오크라도 눈에 보이는 거리를 벗어나서 교감력을 펼칠 수 없어. 하지만 저 오크 마을의 장로는 엄청난 능력자인 것 같아."

"스파링, 그렇다면 내가 업고 있는 보초병도 교감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해?"

"한누리, 보초병에게서도 교감 에너지가 방출되고 있어. 놀랍군. 기절한 상태에서도 교감 에너지를 방출하다니."


"스파링, 자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보초병은 명상호흡을 수련한 오크는 아닐 거야. 그 말인즉슨 이 보초병은 원래부터 교감 에너지를 방출할 능력이 없었어."

"한누리, 그렇다면 어떻게 저 보초병의 몸에서 교감 에너지가 강력하게 방출되고 있는 거지?"


"스파링, 교감 에너지는 이 보초병이 흘러보내는 것이 아냐. 그 몸 속에 있는 바이러스가 보내고 있을 거야."

"뭐라고? 믿을 수가 없군.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그런 능력을 갖고 있다니."


"보초병의 몸에 있는 바이러스는 원래 노인에게 착란증세를 일으키는 종류였어. 추측하거니와 아마도 뇌파에 영향을 주는 파동을 방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을 거야. 바이러스가 돌연변이를 일으켜서 뇌파를 교란할 뿐만 아니라 뇌파와 유사한 파동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된 거야. 유사한 파동을 같은 방향으로 모이면 간섭효과를 일으켜서 무지하게 증폭될 수 있어."

"한누리, 자네는 정말 상상력이 풍부하군."

"스파링, 아직까지도 과학적인 증거가 없으니까 오직 가설만을 세울 수 있을 뿐이야. 하지만 가설을 세우고 증명하는 것은 나름 재미있어."

"그래, 자네의 가설은 어떻게 되지? 계속 말해봐."

"지금 저 오크 마을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바이러스들이 오크 족장의 교감 능력을 증폭시키는 파동을 쏘고 있어. 그래서 오크 족장은 엄청나게 강력한 교감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 하지만 그 에너지도 한계는 있을 거야. 아마도 이 숲을 벗어나지 못할 걸."


"한누리, 그렇다면 저 오크 족장이 다른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는 자인가?"

"아니, 오히려 오크 족장의 몸 안에 있는 바이러스의 집단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다고 봐야 할 거야. 아직 자세히 알 수는 없어. 바이러스들이 방출하는 파동이 이리 겹치고 저리 겹쳐서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을 형성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모든 바이러스가 뭉쳐서 단일한 시스템처럼 사고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것은 마치 0과 1이라는 숫자가 교차해서 방대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아. 이 세상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해."


스파링과 나는 보초병을 옮기면서 쓸데없는 잡담을 했다. 근거없는 추측과 망상일지도 모르는 대화였다. 어렸을 때 읽었던 좀비 동화보다 더 심오한 동화가 현실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이 나를 들뜨게 했다. 한편 이 행성에 살고 있는 모든 지성체의 자유를 구속할 수도 있는 엄청한 위험이 곧 폭발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강한 사명감에 몸서리쳐졌다. 


생각할수록 적은 강하다. 과연 우리 일행은 적을 물리칠 수 있을까?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위협을 느끼는 인간라는 존재가 더없이 한심했다. 


우리 일행은 숲밖을 향하여 계속 전진했다. 수전 연구원은 오크 보초병에게 적당한 양의 마취제를 정식으로 투여해 오랫 동안 잠들게 했고, 내가 힘들어할 때마다 사모아 형사가 나를 대신해서 오크 보초병을 짊어졌다. 오크 마을로부터 숲 외곽까지의 중간 지점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적을 다 따돌렸다고 생각해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감히 나무 둥치에 앉아 쉴 수는 없었다. 지금은 동이 틀 시간에 근접했다. 숲 안은 여전히 어둡다. 


갑자기 스파링이 외친다.

"숙여!"

이어지는 슝 하는 화살소리. 스파링은 순식간에 왼손에 방패를 쥐고 흔들었다. 타앙! 화살촉과 방패가 부딪히는 경쾌한 음색이 정적에 싸인 숲에 울린다. 스파링은 눈에 보이지 않는 화살의 경로는 순전히 느낌으로만 막아냈다. 물론 보이지 않은 어둠 속에서 목표물을 향해 정확하게 화살을 쏘아대는 궁수의 실력도 놀랍다. 

"화살입니다. 몸을 낮추세요."


나는 화살을 날린 자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다. 그제 낮에 우리 일행과 헤어져 홀로 곰 사냥을 나섰던 자이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위험 속으로 스스로를 던져넣은 교만하고도 어리석은 자. 나는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었다. 나에게는 두려움이 현실로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 나도 이 자와 같은 운명의 길을 걷게 될까? 


나는 외쳤다. 

"카라쿠롬! 정신을 차려라. 화살을 멈춰라."

내 외침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카라쿠롬은 화살을 더욱 빠르게 쏘아댔다.

오크 장로는 부하들만 보냈을까, 아니면 마을을 몸소 벗어나 인간 사냥에 나섰을까? 카라쿠롬의 뒤에는 오크 부대가 있을 것이다. 과연 그 뒤에 오크 장로가 따라올지 궁금하다. 카라쿠롬이 오크 마을에서 한참 벗어난 상태에서도 오크 장로의 통제를 받는다면 앞으로 적을 상대하기가 예상보다 더 힘들 것이다.


"스파링, 카라쿠롬 뒤에 오크 부다가 뒤쫓아오고 있어? 규모는 얼마나 되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상당한 숫자가 오는 것 같아."

"그럼 오크 병사 뒤에 강력한 교감 에너지 흐름이 느껴지나?"

"음, 교감 에너지가 느껴져. 아주 강력해. 아까 오크 마을 근처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해."


오크 장로가 교감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는 거리에는 명백히 한계가 존재할 것이다. 그 정확한 거리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숲 외곽과 오크 마을의 절반에 미치지 못한다. 아니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나는 사모아 형사에게 소리쳤다. 

"형사님, 저 엘프 뒤로 오크 부대가 오고 있어요.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고요. 이럴 경우에 경찰 병력의 지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무서운 감염병에 걸린 집단이 정신착란 증세를 보여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고 상부에 보고한다면 병력을 파견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직 상부에는 우리가 조사한 증거를 제출하지 않았잖아? 아마도 우리를 미친 놈 취급하지 않을까?"


사모아 형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수전 박사, 혹시 아까 감염된 오크 보초병이 지은 띨한 표정과 그 미친 소리를 녹음했나요?"

"기절한 오크 병사의 혈액에서 돌연변이 바이러스가 발견될 때부터 영상과 음성을 기록했어요. 어떤 행동을 할지 분석을 해야하거든요." 

"그럼, 그 동영상 화일을 상부에 보고하세요. 우리가 축적한 바이러스 관련된 자료도 모두 보내세요. 자료를 보고 판단하겠지."

"형사님, 상부에서 판단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지금 당장 우리에게 병력을 파견하지는 않을 겁니다."


"박사, 그것은 나도 알아요. 우리가 여기에서 죽거나 감염되더라도 상부에서는 인근의 소도시와 메갈로폴리스를 방어할 수 있는 대책을 세울 수 있겠지."

"여기에서 오크 군대와 싸우시려고요?"

"도망만이 능사는 아니요. 우리가 소도시까지 도망간다고 칩시다. 오크 부대가 소도시의 모든 지성체를 감염시킨다면 어떻게 되겠소? 하지만 우리 인원으로 여기서 싸우다 죽거나 감염될 생각은 없어요. 어서 용병 사무실에 비상사태 호출을 띄우세요. 인근에 있는 모든 용병이 모인다면 충분히 상대가 되겠지. 집결지점은 우리가 출발했던 숲 외곽 지역으로 합시다."

"한누리, 스파링, 일단 퇴각하게나. 스파링, 뒤에서 화살을 부탁하네."


우리 일행은 카라쿠룸의 빗발치는 화살세례를 막아내며 신속하게 퇴각을 계속했다. 우리가 잠시 지체하는 사이 오크 부대는 카라쿠롬과 합류하여 몰려오고 있었다. 정신을 지배하는 오크 장로의 걸음도 느리지 않았다. 오크 장로가 함께 따라오지 않았다면 오크 부대는 일사불란한 행동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강제적인 복종은 비효율적이다. 오크 부대가 자발적으로 싸우고 모든 지성체를 감염시키겠다는 의지로 철철 넘쳤다면, 각 오크 개체에게는 자율성을 부여되었을 것이고 전투는 더욱 효율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아무튼 내가 정신을 지배하는 바이러스 세력의 효율성을 걱정해줄 필요는 없다. 오직 적의 약점을 파고들 전략을 수립하는 데 머리를 굴리면 되겠지?


우리 일행이 잰걸음으로 후퇴하고 있는 가운데, 수전 연구원은 단말기를 마구 두드리며 자료를 전송하고 나서 인근의 용병 사무실에 긴급한 호출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경찰청의 특수조사팀입니다. 숲에서 소도시와 메갈로폴리스의 안전을 위협하는 중대한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용병 사무소실에 등록된 모든 용병을 집합시켜 주세요. 이 업무를 해결하면 각 용병에게 50나노를 지불한다고 하세요. 용병 시스템에도 그렇게 설정해주시고요. 용병의 집결 위치에 관한 정보는 각 사무소의 시스템에 전송을 했습니다. 집결 시간은 가능한 빠른 시간으로 해주세요."


우리가 10여분 후퇴를 계속하고 있을 때였다.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다. 한 두 마리의 소리가 아니었다. 울음소리를 뒤쫓아 땅을 울리는 발자국 소리가 무수히 들려온다.  수 백을 넘는 늑대떼의 물결이 나무 사이를 휩쓸듯 다가온다. 늑대의 무리는 우리 일행을 추격하던 오크의 무리와 격돌하기 시작했다. 

나는 스파링에게 물었다.

"스파링, 자네는 느낄 수 있지? 지금 우리를 돕고 있는 늑대떼는 우리가 맨처음 만났던 절벽 아래 오크 마을에서 보낸 것이지?"

"한누리, 아마도 그럴 거야. 교감 에너지의 파장이 확실히 바이러스에 오염된 세력과는 다른데?"

"혹시 저 늑대떼 뒤에서는 그 마을의 장로와 오크 병사들이 달려오고 있는 것이 느껴지나?"

"조금만 기다리면 도착할 거야."


우리에게 화살을 날리던 엘프 카라쿠롬은 오크 전열의 뒤에 서서 늑대를 향해 활시위를 겨누었다. 정신지배 세력에 속한 오크 부대는 방패와 칼을 체계적으로 운용했으나 숫적으로 많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 늑대떼에 차츰 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뒤늦게 당도한 지배능력자 오크 장로는 지팡이를 들고 크게 외쳤다.

"우리에게 속한 곰 전사들이여! 이곳으로 오거라! 승리는 우리에게 있도다!"


바이러스로 오염된 오크 장로의 음성은 수풀의 구석구석을 울렸지만 그 억지스러운 의고적 어투는 웃음을 자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