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모그가 가득한 도시가 아름답다.

 

방독면을 쓰고, 잿빛 우비를 입은 채 도시를 걸으면 기분이 나아진다. 안개가 가득 낀 새벽 거리를 걷는 느낌이다. 몽환적이다.

 

처음부터 스모그 낀 도시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나도 어릴 적에는 여느 아이들처럼, 푸른 하늘과 들판을 사랑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지금 문명의 시대에 푸른 하늘과 들판을 만끽하기는 참 어려운 법이다. 막 대학생이 되어 상경해 도시 생활을 시작했을 적, 나는 뿌연 하늘과 멀미나는 도회지에 꽤나 신물이 났다. 그러던, 고통스러운 와중 문득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냥 스모그 낀 도시를 사랑하면 되잖아?’

 

나의 선호와 주변의 환경이 불일치해서 나는 고통스러웠다. 일치하면 편안하겠지. 주변의 환경을 내 선호에 맞출 수 없으니, 나의 선호를 주변의 환경에 맞추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저 있는 그대로를 좋게 받아들이면 되는 게 아닌가? 석가모니 같은 한 명의 구도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제 푸른 하늘을 미워하고 희뿌연 하늘을 사랑한다. 그것이 편하다. 이제 푸른 하늘은 없고 오직 희뿌연 하늘만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선호를 바꾸었고, 덕분에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해가 다 진 어스름한 겨울 거리. 가게들의 네온사인이 하나 둘씩 켜진다. 나는 거리를 걷는다.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방독면을 쓰고 우비를 입고 있다. 나는 그들의 표정을 읽지 못한다. 이 광경은 매력적인 디스토피아. 색다르고 아름답다.

 

공원. 나는 연인, 수를 기다린다. 그녀와는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 같이 서울로 올라온 후 어찌어찌 교제하게 되었다. 오늘은 수의 생일이어서 만나기로 했다. 가로등이 켜질 무렵 수가 도착했다. 수는 검은색-붉은색이 섞인 고풍스러운 가죽 방독면을 쓰고 있었다. 수의 웃음기 가득한 표정을 방독면 너머 보았다.

 

“왜 웃어?”

“방독면 쓰고 담배 피우는 게 웃겨서.”

“뭐든 어때.”

 

나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꼭 야외에서 담배를 피우고 싶었기에, 방독면에 담배를 꽂을 수 있게 조금 개조를 해 놓았다. 그 꼴이 그녀가 보기에 우스꽝스러웠던 모양이다.

 

1.

수와 팔짱을 끼고 걸었다. 적당한 음식점에 들어갔다. 합성 영양죽을 파는 지하 가게였다. 나는 영양죽을 꽤나 좋아했다. 물컹물컹한 식감에 입맛 떨어지는 초록색 죽이었지만 영양가가 높고 가격이 쌌기 때문이다.

 

“영양죽 먹게?” 수가 내게 물었다.

“응.”

“너는… 이거 먹는 거 좋아해?”

“좋아하지.”

 

수는 영양죽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나 먹다 보면 영양죽도 괜찮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영양죽에 익숙해지는 게 나중을 위해, 수에게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천연 식료품의 가격이 점점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둘이서 맛있게 영양죽을 먹었다.

 

2.

밥을 먹고 영화관에 갔다. 하얀 대리석 바닥이 깔린 고급스러운 로비에 방독면 쓴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언제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기묘한 풍경에 웃음이 나왔다. 멸망한 세계에서 영화를 보러 나온 사람들… 그런 느낌이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와중 뭘 볼지 수와 의논했다. 영화에는 두 종류 스크린이 있었다. 일반 스크린 영화와 드림 스크린 영화.

 

“드림 스크린이 뭐야?” 나는 수에게 물었다.

“관객의 꿈 속에서 영화를 상영한대. 관객이 영화 속으로 직접 들어간다나? 관객이 영화 주인공의 시점을 가져서 몰입이 잘 된대. 해 볼래?”

“비싸네. 그냥 일반으로 하자.”

 

수는 조금 실망한 기색이다. 그냥 일반 스크린에 만족하는 것이, 비싼 스크린을 보고 만족하는 것보다 낫다. 그저 우리의 선호를 조금 바꾸면 되는 것이다. 그런 내용을 수에게 얘기해줬지만, 수는 여전히 뚱한 표정이다. 나의 결론을 수는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3.

영화가 끝나고 카페에 들렀다. 메뉴판을 보니, 기본 커피는 두 종류였다. 천연 원두커피, 합성 믹스커피. 나는 합성 커피를 두 잔 주문했다.

 

“천연 원두커피도 있네. 저거 한번 마셔볼까?” 수가 물었다.

“별로.”

 

나는 거절했다. 합성 커피 맛있게 마시면 되지. 합성 커피를 천연 커피보다 더 좋아하면 되지, 뭐하러 비싼 것을 사 먹을까?

 

 

 

커피를 받아들고, 나란히 창가에 앉았다. 나는 방독면을 벗었다. 수도 방독면을 벗었다. 수의 하얀 얼굴이 굳어 있다. 나는 그녀를 보고 인상을 쓴 아그리파 석고상이 떠올랐다. 수의 그런 표정도 좋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여전히 아름다운 스모그가 거리에 깔려 있다.

 

“오늘 내 생일인데…” 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낮은 목소리도 아름답다.

“알지.”

“그런데 왜 그래?”

“뭐가?”

“영양죽. 구식 영화. 합성 커피. 나도 맛있는 음식 먹고 싶어. 드림 스크린 해 보고 싶어. 천연 커피 마셔보고 싶어. 근데 왜 너는 다 거절하는 거야?”

“별로 만족을 못했니?”

“몰라서 물어?”

“그 정도로 만족하면 안 될까? 영양죽이 어때서.”

“뭐?”

“그저 인식을 바꾸면 되잖아. 영양죽을 먹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봐. 그러면 스테이크가 필요 없지. 영양죽을 먹어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어.”

 

수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내 말에 분이 나나보다. 그녀의 눈물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는 조금 피로함을 느꼈다. 나는 눈이 건조한 나머지 오른손으로 두 눈을 가볍게 비볐다.

 

“너는 병들었어. 어릴 적보다 확실히 이상해졌어.”

“나는 예전보다 좋아졌어. 맛없는 영양죽을 먹어도 기분 나쁘지 않지. 숨막히는 방독면을 쓰고 스모그 가득한 거리를 걸어도 불행을 느끼지 못하지. 더 건강해진 거야.”

“그게 건강한 게 아닌 걸 알잖아. 너무 크게 좌절해서 네 마음이 망가져 버린 게 아닐까?”

 

나는 나의 툭 튀어나온 턱뼈를 어루만진다. 덜 깎인 수염이 까슬하다. 갸우뚱-. 나는 좌절한 적 없는데.

 

“좌절한 적 없는데.”

“저번에 너 시험이랑 면접 계속 떨어져서, 죽으려고 했잖아.”

 

음. 그랬지. 좌절인가? 아니다. 그냥, 삶에 대한 선호를 놓아보았을 뿐이다. 죽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들어 고층에서 뛰어내린 것이었다. 죽지는 않았지만.

 

오랜 침묵 후 나는 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여전히 삶이 아름답다고 생각해.”

“그런데 너는 죽어 있는걸. 무언가를 좋아하고, 싫어해야 살아있는 거야. 모든 것을 아무렴 좋다고 여기는 것은 죽어 있는 거라고.”

“그러나 편안하지.”

 

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의 그런 표정도 좋다. 수가 조금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너 파란 하늘이 좋다고 옛날에 그랬잖아.”

“너무 옛날이지. 뭣 모르는 소년의 어리석은 말이고.”

“지금은?”

“지금은 스모그를 사랑해. 스모그가 저기 창밖에 가득하잖아. 그냥 스모그를 사랑하면, 마음이 편한걸. 누릴 수 없는 파란 하늘을 사랑하면, 영원히 불만스러울 뿐이야.

 

창밖 아름다운 스모그에 눈길을 떼지 않은 채 수에게 대꾸했다. 수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수가 물었다.

 

“내가 너를 떠나면 너는 뭐라고 할 거야?”

“너 없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하겠지.”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수는 재빨리 방독면을 쓰고, 천천히 일어나 카페를 나갔다.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수를 슬프게 한 것이 미안하지만, 사실이다. 이렇게 홀로 앉아 있는 것도 좋다.

 

 

 

“저어, 죄송한데, 영업이 끝나서요.” 잠시 후 점원이 내게 말했다. 12시. 완연한 밤이다.

 

나는 방독면을 쓰고 일어났다. 스모그 가득한 거리를 걸었다. 별 하나 없이 뿌연 밤이다. 투명하지 않은 밤하늘이다. 검은색 색종이 같은 그런 밤하늘이다.

 

걷는다. 스모그가 아름답다. 아름답다.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아름답다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기에 나는 아름답다고 느낀다.

 

 

 

 

문득 방독면을 벗는다. 스모그를 들이켠다. 먼지가 기관지로 가득 들어온다. 한 숨. 두 숨. 내가 이 스모그를 모두 마셔버린다면, 다시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을까? 나는 오른손에 방독면을 든 채 먼지를 마시며 거리를 걷는다. 

 

곧 쓰러진다. 연약한 폐가 유독 물질 때문에 산산조각 났기 때문이다. 사실, 흡연 때문인지 나는 이미 깊은 폐병을 앓고 있었다. 폐병으로 연약해진 폐에 유독 물질이 들러붙어, 가슴이 쓰리다. 내가 죽어 있다는 수의 말이 귓전을 맴돈다. 나는 지금 살아 있는 걸까?

 

살아있음을 증명하려 숨을 힘껏 들이켠다. 방독면은 쓰지 않는다. 오히려 멀리 버려버린다. 다시 일어난다. 스모그를 들이켠다. 힘껏 들이켠다. 푸른 하늘을 앗아간 이 증오스러운 스모그를 들이켠다.

 

죽더라도, 한 번 크게 숨 들이켜 보자. 몸부림쳐 보자. 이 독한 운명과 싸워 보자. 역겨운 것을 사랑한다고 억지로 외치지 말고, 그렇게 비겁하게 체념하지 말고, 숨 들이켜 보자.

 

들이켜다 보면 언젠가 스모그가 사라지고, 아름다운 푸른 하늘이 보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