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겨울의 일이다. 필자는 언제나 그러해 왔던 것처럼 낮과 밤이 뒤바뀐, 공간은 공유하지만 시간대는 공유하지 않는 삶을 이어가며 인생을 낭비하고 있었다. 그러한 삶이라 할지라도 그 어떠한 이와의 접촉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새벽 3시를 넘긴 시점에 초콜릿 등을 구매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방문하던 편의점에서는 언제나 장발에 피어싱이 매력적인 직원과 마주하였고, 이따금 야밤에 술에 취한 채로 방황하는 이를 먼 발치에서 지켜 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잦은 빈도도 마주했던 상대는 야간 경비원이었다. 새벽 2시 정도에 흡연장에서 이따금 마주하는 그 남성은 60대는 확실히 넘은 것처럼 보이는 주름과 흰 머리, 약간 빛이 바랜 겉옷을 언제나 입고 있었다. 눈길조차 주지 않는, 심지어 그보다 훨씬 어린 필자를 향해서도 언제나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내 주는 그의 태도는 약간 부담스러웠지만, 그러한 시간이 반복되며 필자 역시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돌려줄 수 있게 되었다. 주위에 인간이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안락하지 못한 필자가 그를 그나마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은, 적어도 그가 그 이상의 대화를 요청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2시의 시점이었다. 언제나 그러했던 바와 같이 니코틴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고, 피로감을 종식시킬 겸 편의점에 방문하여 초콜릿과 담배, 그리고 이름모를 값싼 술을 한 팩 구매하여 흡연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도 반갑지 않게도, 경비원은 먼저 흡연장의 한 편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잠시 불길한 생각이 엄습하여 거처로 돌아갈 생각을 했지만, 다시 나오는 것이 귀찮았기에 그냥 예정대로 움직였다. 적어도 그가 인사 이외의 대화를 요청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험론적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필자를 발견한 그는 경험론적 기대에 응답하듯 간단한 인사를 건내 준 뒤, 그저 침묵하였다. 불안감도 동시에 침묵하였고, 필자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 뒤, 흡연장의 한 켠에 놓인 의자에 앉아 가방에서 술을 꺼내 팩에 빨대를 꼽았다. 바로 그 순간, 경험론에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실감하도록 하는 한 인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술을 드시면 교회는 어떻게 가시나요?”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서 튀어나온 신경을 건드리는 질문이 뇌에 도착하기도 전에 척수에서 반사적으로 한 마디 문장이 튀어 나왔다.
“전 신을 믿지 않습니다.”
후회의 감정과 자중의 필요성을 느낀 것은 이미 그 문장이 완성되어 음성으로 전환된 이후였다. 그러나 이미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피로한 새벽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종교를 향한 논쟁을 시작해야 하는 셈이었다. 필자는 모순적이게도 이 상황에서 신에게 빌었다. 이 자가 관대한 부류이며, 신을 믿지 않는 것에 크게 신경조차 쓰지 않는 개체이기를 기도하였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신을 안 믿다니? 신이 얼마나 많은 걸 당신에게 베풀어 주시고 계시는데, 농담이라도 신을 모욕하면 안 되죠.”
다시금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사실 필자는 그저 여기서 대화를 끝낼 수 있었다. 스스로의 발언이 농담이었다 거짓을 고한 뒤, 술을 가방에 다시 넣고 흡연장을 빠져나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와의 관계가 그 선택을 봉인하였다. 한 번 보고 말 상대라면 그러한 방법은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와 필자는 필자의 기준에서 상당히 자주 마주하는 편이었다. 토요일 저녁이나 일요일 새벽에 그와 마주쳤을 때 이 곳에서 술을 마시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했기에, 상대가 다시는 필자에게 그 어떠한 말을 걸고자 하는 의지조차 상실할 수 있도록 무신론자가 아닌 반신론자로서 발언하기 시작하였다.
“신은 없습니다. 신은 죽었습니다. 죽은 채로 있습니다. 그러니 뭘 하든 모욕이 아닙니다. 애당초 신이란 게 있다면, 이렇게 말하는 즉시 천벌을 내려야 할 건데, 그런 것도 없지 않습니까? 아니면, 당신이 천벌의 대행자로서 저를 처벌할 생각입니까?”
불쾌감을 가득히 담은 반신론의 시작으로 나쁘지 않았다. 상대를 자극하되, 미연에 상대가 필자를 필요 이상으로 공격하는 것을 방지하는 방식은 이상적인 시작은 아니더라도, 나름 수용할 법한 전략이었다.
“신은 그렇게 소인배가 아닙니다. 당신이 살아있는 모든 시간동안 당신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계신 겁니다. 지금이라도 반성하고 신께 용서와 구원을 기도한다면, 그분께서 모두 용서해 주실 겁니다.”
그의 언어는 날카롭지 않았다. 아직은 필자를 배척하고 있지 않았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그저 모든 것을 불신자의 어리광으로 취급하며 모든 불쾌감을 수용하기만 하는 신실자에게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조금 과감한 전략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신이 소인배가 아니라면, 애당초 아무 조건도 없이 인간을 모두 구원했겠죠. 왜 굳이 시험하고, 합격 불합격을 판단합니까? 자기를 믿으면 구원해 주고 믿지 않으면 구해주지 않는 모습을 보면, 꼭 초등학생이 자존심 때문에 화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소인배 그 자체인데.”
상대가 활용한 단어를 실시간으로 반영하는 것은 효율적인 방법이다. 상대가 결코 아니기를 바랐던 신의 형상이 사실은 그러했음을 서술하는 것 만으로도 대다수의 신실자들은 모욕감을 느낀다. 이는 비단 필자의 추측이 아니다. 경험이 적은 신부나 신실한 목사 조차 이러한 발언에는 인간성을 드러낸다. 어디까지나 경험론이다. 그러나 불과 수 분 전에 경험론의 불확실함의 따끔함을 경험한 자로서는 그다지 현명하지 않은 방식일 터이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경험론이 배신하지 않았다.
“그건 원죄 때문입니다. 인간이 신의 말을 거역하고 지혜의 열매를 먹었기 때문에 신께서는 슬픔을 인내하시고 인간에게 벌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죄를 지었으니 벌을 내린다. 이 얼마나 합당하고 공정한 심판입니까? 스스로 뉘우치고 반성할 기회를 주신 겁니다. 심지어 그럼에도 다시금 신에게 구원받을 수 있도록 예수님을 보내셨는데, 그토록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을 어떻게 모욕할 수 있습니까?”
미약한 단계임에도 명확히 분노가 내제된 표현이었다. 그가 불신자와 방랑자를 포용하고자 하는 부류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표할 수 있었다. 이제 상대의 전문분야로 발을 옮겨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은연 중에 드러내야 한다.
“만약 신이라는 게 완전한 존재라면, 왜 애당초 인간이 신의 말을 거역하도록 설계한 겁니까? 왜 인간을 타락시키는 뱀을 창조했죠? 애당초 에덴동산에 지혜의 열매를 안 뒀으면 모든 게 시작되지도 않았을 터인데? 게다가, 인간만 지혜의 열매를 먹었다면, 이 많은 생명체들은 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겁니까? 뭐 하나 말이 되는 게 없지 않습니까?”
이 내용은 구약과 신약을 포함한 모든 성경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내용이다. 근본을 뒤흔드는 것은 세부적인 모순을 뒤적거리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효율적인 방식이며, 상대의 도주로를 차단할 수 있는 전략이기도 하다. 물론 언제나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배수의 진 속에서 필사적으로 성경 속 내용을 조합하여 필자의 무지함을 증명해 내는 경우도 있다. 다만, 이 경우라면 안심할 수 있다. 상대는 수 년간 신학을 연구해 온 전문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신께서 인간을 시험하신 겁니다. 기회를 주신 겁니다. 그리고 이 생물들은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으니 인간을 위해 이 곳에 있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신의 뜻 아니겠습니까?”
예상한 바와 같이, 그는 논점을 흐리는 효율적인 방식을 활용하는 대신, 가령 필자에게 성경의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증명한 뒤, 무지한 자가 오해를 한 것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하는 대신, 그저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그는 상대를 모르고 있었다. 상대가 성경에 정통하거나, 적어도 한 번 이상 읽어본 경험이 있는 자라 착각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망상이 만들어 낸 허황된 그림자의 앞에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허상이 사라지기 전에 조금 더 압박해 둔다면, 이 논쟁은 끝이 난다.
“신이 그토록 완벽하다면, 애당초 인간을 시험할 필요가 없죠. 애당초 시험할 필요도 없는 완전한 형상으로 인간을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인간이 지혜를 얻는 것을 그토록 두려워하는 존재라면, 사실 인간보다 나약한 존재가 아닐까요? 인간이 지혜를 얻고 영원한 생명도 얻으면 자신보다 더 뛰어난 존재로 거듭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는 존재가 아닙니까?”
신을 비난하고, 인간을 찬양하는 방식은 꽤나 까다롭다. 신을 변호하고자 하면 인간의 가능성과 위대함을 부정하여야 한다. 광적으로 신을 신봉하고, 인간을 그저 신의 노예이자 창조물에 불과하다 사고하는 존재가 아니라면, 이 질문은 하나의 난제로 변모한다. 인간 역시 위대하다 사고하기 때문이다.
“신이 존재하고, 그가 완벽한 존재라고 한다면, 인간을 잘못 만든 게 아니라 애당초 결함이 있게 만들었다는 뜻인데, 그리고 그걸 고쳐 줄 생각도 없다는 뜻인데, 그럼 애당초 사람을 사랑하는 게 아니죠. 그런 존재를 숭상해 봐야 의미는 없고요. 반대로 신이 최선을 다해 만든 게 지금의 인간이라면, 신도 실수를 한다는 뜻인데, 완전하지도 못한 존재를 굳이 받들어야 할 이유도 없을 것 같네요.”
필자는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도 않았다. 그저 유명한 악의 문제를 약간 변형한 뒤 상대의 사고의 흐름을 끊었다. 신의 완벽성을 부정하지 않으면 결코 설명할 수 없는 논지 속에서 상대의 사고는 혼란으로 향한다. 물론, 신의 전지전능을 부정하는 것만으로도 간단히 탈출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현존하는 그 어떠한 종교도 신의 완벽함을 부정하지 않는다. 잃는 것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는 기초적인 관념조차 망각한 채 모든 것을 손에 쥐려 든 이들의 결국 모든 것을 잃기 마련이다.
“신이 존재하던 존재하지 않던, 결국 숭배할 가치는 없다는 뜻입니다.”
이윽고, 필자는 반신론의 결론을 도출하여 선언하였다. 동시에 멈추었던 음주를 보란 듯이 재개하였다.
“도저히 말이 안 통하네! 사탄 같은 놈!”
그의 인내심은 비로서 한계에 다다랐다. 상대를 설득하여야 한다는, 적어도 상대를 말로서 구슬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한 줌의 재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논쟁에서 승리하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순간에 맛볼 수 있는 값싼 술은 수 십만원을 호가하는 고급 양주보다도 더욱 훌륭한 맛과 풍미를 자아낸다. 아주 잠시였지만, 상대에게 감사함을 표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감각에 휩싸일 수 있었다.
사탄과도 같은 인간이라는 선언이 내려진 뒤, 그와 다시 마주하는 일은 없었다. 아마 그가 의도적으로 필자를 피했기 때문일 터이다. 필자는 이 이야기가 이렇게 종결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광적으로 종교를 신봉하는 자와의 대화는 언제나 이러한 방식이었기에, 기록할 이유조차 없는 평이한 하나의 이야기로 기억 속에서 이내 사라질 것이라 판단하였다. 그저 우연히 손에 들고 있었던 값싼 술의 맛의 변화만이 기억에 남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사탄의 선언 이후 3주가 지난 시점, 정확히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2시의 시점에서,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가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인사를 건내 주었을 때, 그러나 그가 평소의 경비원의 복장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였을 때, 그의 손에 무거워 보이는 가방이 들려 있다는 시각 정보를 확인하였을 때, 어쩌면 그 순간이 필자의 혀가 심판을 받는 순간일지도 모른다고 사고하였다. 그가 필자의 눈 앞까지 다가왔을 때에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가방에서 둔기나 흉기를 꺼내는 것을 대신하여 고개를 숙이고 필자에게 한 가지 요청을 했다.
“바쁘신 중에 죄송하지만, 잠시만 대화상대가 되어 주실 수 있을까요?”
확신은 의문으로 이윽고 추측으로 변질되었다. 어쩌면 필자를 설득하기 위해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저 가방은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만약 흉기가 들어 있다면, 이것은 아마 필자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기 위한 행위일 터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 광신도의 모습은 아니었다. 더 나아가 신실한 자가 스스로의 손으로 살인을 행할 것이라 추측하기는 어려웠다. 그렇다면, 저 안에 든 것은 성경과 같은 신앙에 관련된 물품들일 것이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다양한 도구들일 터이다. 다만, 십자가로 사람의 머리를 내리쳐도 아마 사람을 죽일 수는 있을 것이다. 애당초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고안된 도구이니, 오히려 적합한 사용법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생각 속에서도, 필자는 자신의 목숨의 안보를 조금도 고려하고 있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필자는 스스로의 생명을 이어 나가기 위해 유연하게 사상을 굽힐 수 있는 부류가 아니었다.
스스로의 망상 속에서 사체의 발견과 처리, 그리고 형법수사가 이어질 무렵, 그는 필자의 앞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언제나 관찰하여 왔던 노인이었지만, 조금 이질감이 느껴졌다. 머리를 검게 염색하여 새치는 보이지 않았고, 옷은 단정했다. 몸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으며, 걸음걸이도 조금 가벼워 보였다. 확실히 필자가 이전까지 바라보았단 60대 이상의 노인은 아니었다. 50대 후반, 어쩌면 중반의 모습에 가까웠다. 무엇보다도,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입가에 피어나 있었다. 그의 의도를 도저히 파악할 수 없었기에, 꽤나 혼란스러웠다.
“일단 이것부터 받아 주세요.”
그는 손에 들고 있었던 가방을 건내 주었다. 필자는 그것이 성경과 관련된 무엇일 것이라 추측하고 있었기에 마치 받고 싶지도 않은 선물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가 설득의 전략을 바꾼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가방을 열었다. 그러나 그가 건내 준 가방 안에는 성경을 대신하여 양주와 정종, 사케와 와인 등의 비교적 값비싼 술이 도합 6병이나 들어 있었다. 내용물을 확인한 직후 약간의 당혹감에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마치 준비한 것처럼 조금은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좋아하시는 술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받아 주세요. 아, 가방도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라고 추천 받아서 샀습니다. 사과와 감사의 의미입니다.”
그 날은 분명히 일요일 새벽이었다. 불과 수 주 전에는 작은 팩에 담긴 술을 입에 대는 것에 불경함을 논했던 자가 갑자기 돌변하여 술을 선물한다는 사례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심지어 탈무드에서 조차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를 읽어본 적이 없다. 상대의 의도는 미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사과는 몰라도, 감사를 받을 일을 한 기억은 없습니다.”
약간의 거부감과 본능적인 수상함이 뒤얽혀 만들어 낸 언어적 표현이었다. 선물의 거절의 의사를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임과 동시에, 감사의 이유를 밝힐 것을 종용하는 의도가 전제되어 있기도 하였다.
“아니요, 당신은 제 인생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의 대답을 들은 즉시 다시 되물었다. 필자는 그의 삶을 바꾸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설령 그의 삶이 바뀌었다 할 지라도 그것이 필자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근거는 없었다.
“사실, 지난 3주간 교회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다시 가지도 않을 겁니다.”
그의 답변을 바탕으로 3주 전에 있었던 논쟁이 다시 떠올랐다. 그 논쟁을 빙자한 비난의 형상이 실질적으로 탄생하였던, 아주 오래 전에 이미 변질되어 버린 목적 역시 잠시 모습을 비추었다. 필자는 그 논쟁의 양상을 아주 오래 전, 신에 얽매인 자들이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라며 구상하였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하였기에, 그저 상대의 분노를 자극하기만 할 뿐이었기에, 현 시점에서는 그저 신실자들이 필자에게 다시는 말을 걸지 않도록 하는 목적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독실하신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책망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불과 몇 주 전에는 신을 믿지 않는 불신자라고 저에게 질책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는 의심이었다. 기대를 하면서도, 그런 일은 결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험론에 의거한 의심이었다. 그러나 마음 한 켠에서 경험론의 위험함에 관해 되뇌는 스스로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네, 그러했죠. 그런데, 그 날 당신의 말을 듣고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당신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집에 돌아가 몇 번이나 당신의 말을 다시 생각했고, 당신의 말을 부정하기 위해 성경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모든 게 신이 내린 시련이고,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말입니다. 그런데, 안 되더군요. 당신이 맞았습니다. 신은, 없었어요.”
주저하면서도 확실히 언급한 신의 부정의 발언에 진심으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논지의 본래의 목적이 달성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이었기에, 그럼에도 조금도 예상하지도 못한 시점이었기에, 긍정적인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저, 그 상황을 한 번 더 의심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저를 원망하고 싶으신 겁니까? 신실한 당신을 불신자로 전락시킨 저에게 책임을 묻고 싶으신 겁니까?”
경계심은 쉽사리 풀어지지 않았다. 진솔한 의미에서 필자는 오히려 그러한 상대가 조금 두려웠다. 무언가 숨겨진 의도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행동과 언어적 형상 속에서 거짓을 말하는 이의 보편적인 특성은 조금도 확인되지 않았다.
“아니요. 당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사실, 원망을 했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설명이 되었다. 논리적 연결고리가 있었다. 만약 그가 진실로 신을 부정하는 데 성공하였다고 가정한다면, 이 모든 상황이 설명이 되었다. 다만, 그것을 필자가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한 인지부조화의 상황 속에서, 그는 조금 더 상세한 설명을 이었다.
“신이 없다는 걸 이해한 다음부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신의 교리가 거짓이고, 아무리 독실한 삶을 살아도 결국 구원이 없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감이 안 잡히더군요. 그래서 처음에는 당신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당신이 제 모든 것을 앗아갔다고 생각했습니다.”
솔직한 표현이었다. 만약 필자가 누군가의 경계를 풀고자 한다면, 무의식적으로 상대를 향한 악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피할 터였다. 그저 상대를 찬양하기만 하는 것이 일반적인 특징이었다. 그러나, 그는 마치 고해를 하는 이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무엇 하나 숨기지 않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신이 잘못한 건 없었죠. 당신은 그저 저를 일깨워주려 했을 뿐이니까요. 그래서 당신을 원망할 수 없었습니다. 그 대신, 우울했습니다. 제 삶이 부정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정말 모든 걸 잃은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신을 찾았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저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 뿐이었습니다. 신에게 구원을 받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저 신에게 심판을 받는 것이 두려워 몸을 움츠린 채로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로서 필자는 그를 신뢰할 수 있었다. 그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알았고, 그가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많은 시간을 인내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그가 그 모든 것을 극복하였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솔직히, 상쾌했습니다. 두려워해야 할 상대가 사실은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저는, 자유로웠던 겁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도 괜찮다는 걸 알았습니다. 저는 이제 정말 자유롭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느낌이 듭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꽤나 통쾌하게 웃어 보였다. 후련해 보였다. 아주 약간에 불과하지만, 필자 역시 그의 웃음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어 보일 수 있었다. 웃음을 그친 그는 주름진 얼굴은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그림과도 같은 웃음으로 필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전 하고 싶은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신의 이름 아래에 놓인 수많은 의무들을 따라가다 보니 진정으로 제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지 못한 채로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솔직히 그 시간들이 아깝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시간은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 신경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대신, 지금부터라도 제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여생을 보내려고 합니다.”
잠시 그의 삶을 상상했다. 의무와 책임이라는 이름 아래에 포기해야 했던 수없이 많은 꿈들이 있었을 터이다. 해야 할 일에 막혀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지 못했고,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있는 시점에 되었을 때는 시도하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결국, 그저 하던 일을 계속하며, 익숙한 삶의 모습을 유지하기로 하였을 것이다. 세간의 시선이 두렵고, 자신의 잠재력이 두려웠고, 또한 지나가 버린 시간과 함께 기회 역시 사라졌을 것이라는 사고에 두려워 그저 시간을 보내기만 했을 것이다. 필자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다 마지막 순간에 후회를 남긴 노인들을 알고 있었기에, 조금은 애석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애석의 끝에 도전을 시작하고자 하는 노인이 보였다. 노인은 굳은 의지를 시사하듯 입술을 강하게 문 뒤, 비로서 선언하였다.
“당신은 제 삶의 주인은 바로 저 자신이고, 저는 제 의지로 제가 원하는 일을 선택하여,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즐기며, 진정한 저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당신에게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있겠나요?”
순간 필자의 뇌리 속에 한 인물이 지나갔다. 프리드리히 니체. 이윽고 이해하였다. 그는 니체였다. 불과 3주라는 짧은 시간 속에서 스스로의 삶을 통해 축적된 경험론과 종교적 교리를 깔끔히 떨쳐낸 뒤, 스스로의 삶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며, 원하는 것을 선택하여 그것을 목적으로 삼으면 된다는 니체의 사상을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재연해 보인 것이다. 순간, 마치 얼어붙는 듯한 감각이 일었고, 할 말을 잃은 채로 그를 바라보아야 했다. 경이롭다는 사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필자를 바라보며 상대는 머쓱한 듯 미소를 지으며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양 손으로 자신의 양쪽 허벅지를 반복하여 문질렀다.
“사실 전 이제 여기 경비원이 아닙니다. 그만두었습니다. 돈은 충분히 있고, 돌아갈 집도 있고, 자식들은 장성했고, 연금도 나오니까요. 나중에 필요하다면 다시 일자리를 구해도 되겠죠. 몇 년 뒤면, 저는 더 많은 걸 알고, 더 나은 기술을 가지고, 더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가 평소와 다른 복장을 입고 있었던 이유를 비로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단순히 사고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으며, 곧바로 행동하는 실행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스스로가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을 나열한 뒤, 무엇을 투자한다면 무엇을 가질 수 있는지에 관한 모든 계산을 마치고 행동한 것이다.
“어디로 가십니까?”
경이로움과 약간의 감탄을 간신히 감추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질문하였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즐겁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우선, 한동안 여행을 다닐 생각입니다. 배낭여행이요. 혼자서.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에게 남은 시간 중에서 지금이 가장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시간이니까요. 그 다음엔,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대학에 가고 싶어요. 가정사정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취업을 해서 대학을 항상 동경했거든요. 수험공부는 어렵겠지만, 수험생들보다 시간은 많으니까 언젠가 합격할 수 있을 겁니다. 항상 역사를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책도 써 볼 생각입니다. 꼭, 당신과의 만남이 제 인생을 바꾸었다는 내용을 담겠습니다. 악기도 배우고, 외국어도 좀 배우고, 사진도 배우고 싶네요. 전부 다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할 일이 많아서 저는 지금 정말 즐겁습니다.”
약간 미숙하면서도 만족스러운 상상을 하는 그의 모습 속에서 필자는 위버멘쉬를 보았다. 진정으로 스스로의 인생을 즐기는 그의 모습은,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죽음이 아직 다가오지 않았기에, 아직 살아 있기에 여전히 기회가 남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었다. 늦었을 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의지가 가득히 담겨 있었다. 그는 몇 주 전에 보았던 의지조차 없이 신의 구원을 갈망하던 그 노인이 아니었다. 그의 외면은 늙은 그대로였지만, 그의 내면 속에는 모든 것을 향한 강한 호기심에 그저 즐거운 한 명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그 늙은 어린 아이는 그렇게 스스로의 삶의 주인으로서 모든 것을 즐기기 위하여 떠났다.
그를 떠나 보내고, 홀로 흡연장에 앉아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뒤 조용히 대화를 반추하였다. 만약 그가 조금 더 일찍 태어났었더라면, 만약 그가 생각을 정리하여 글을 작성하여 발표하였더라면, 만약 그가 조금 더 운이 좋았다면, 그가 만약 그의 사상을 알아봐 주는 이를 만났더라면, 필자는 수없이 많은 가능성을 탐색하며 그가 니체가 된 평행세계를 사고하였다. 그는 니체가 될 수 있었고, 니체 역시 그가 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세상에 존재하였던 수 없이 많은 니체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 명의 니체는 세계 1차대전의 참호 속에서 사상을 사고하다 눈먼 총알에 맞아 침묵하였다. 한 명은 스페인독감에 걸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순간 속에서도 사고를 계속하다 말 한마디를 남기지 못한 채로 삶을 등졌다. 한 명은 사상을 완성하여 출판사로 보냈지만, 이름모를 배달부가 우편물을 잃어버려 답을 받지 못한 채로 평생을 기다리다 숨을 거두었다. 세상의 풍파 속에서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태어나 동일한 철학을 구성하였음에도 기회가 없어서, 운이 좋지 않았기에, 실행력이 부족하였기에, 그저 스스로 만족하였기에, 조금 늦었기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수 없이 많은 니체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눈 앞에 실존하였던 그 가능성의 니체의 형상 속에서, 필자는 비로서 인지할 수 있었다.
니체는 유일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수없이 많은 니체의 가능성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으며, 가장 처음으로 성공하여 유명해 진 니체의 형상이었다. 1등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수없이 많은 2등의 니체의 형상을 비로서 이해할 수 있었다. 이는 비단 니체 만이 아닐 터이다. 세상에는 아마 수없이 많은 뉴턴과 수없이 많은 아인슈타인과 수없이 많은 한신과 수없이 많은 제갈량이 존재하였을 터이다. 단지 기회가 없어서, 선천적인 신분의 차이로, 시대의 착오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데 실패한, 그럼에도 위인의 잠재력을 소유한 자들이 있었을 터이다. 그러한 모습 속에서 필자는 조금은 수치스러웠다. 여전히 심상 깊은 장소에 노력과 재능 만으로도 충분히 위대한 자로서 남을 수 있다고 사고하고 있었음을, 이름을 남기지 못한 자들은 노력이 부족하였거나 재능을 낭비하였을 것이라 착각하고 있었음을 이해하였기에 그러했다. 그러한 착각 속에서 선민의식에 찌든 스스로의 역사가 상당히 어리석었다고 사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중하게 이미 떠나버린 니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고 잠시 그에게 니체라는 존재에 관해 언급할 필요가 있었는지에 관해 고뇌하였다. 이윽고 필자는 그러지 않는 편이 나았다고 판단하였다. 스스로의 사고를 투자하여 비로서 완성한 철학이 그저 바퀴의 재발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침울한 사실을 굳이 그에게 알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적어도 필자에게 있어서 그는 진정한 니체였기에, 이미 죽어 사라진 니체가 아닌 살아있는 니체였기에, 어쩌면 그가 니체는 생각하지도 못한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사고하였기에, 그에게 실망과 허탈함을 선사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학습하여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주었음에 안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