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바다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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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여명의 복수


그로부터 2년이 지났다. 이곳은 노스 블루의 루브니르 왕국. 그 유명한 ‘거짓말쟁이’ 몽블랑 노랜드의 고향이기도 한 곳이다.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들은 역시나 이 왕국 출신의 부모에게 두 가지 이야기를 듣는다. 하나는, 거짓말하는 아이에게 들려주는 ‘거짓말쟁이 노랜드’이야기로, 거짓말을 하다간 노랜드처럼 죽는다는 교훈이 있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 얼마 전부터 돌아다니는 이야기로, 밤 늦게 돌아다니는 아이들은 온 몸이 돌로 뒤덮인 괴물 ‘더 씽’이 나타나 잡아간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어느 날 밤, 루브니르 왕국에 정박한 무역선 선원들이 배에서 내린 짐을 옮기고 있었다.


“뭐가 이리 무거워…!”


“아마 설탕일 걸?”


“으으… 아 맞다. 이봐, 그 소문 들어 봤어?”


“무슨 소문?”


“’더 씽’ 말이야. 이 나라에선 유명하더라고.”


“’더 씽’?”


“온 몸이 바위로 뒤덮인 괴물인데, 이렇게 빛도 없는 밤이면 골목 어딘가에서 나타나 사람들을 잡아간데.”


“참나… 그냥 아이들보고 늦게까지 돌아다니지 말라고 하는 흔한 이야기잖아.”


“아니야! 얼마 전에 다른 선박 선원을 만났거든? 그 선원이 일주일 전에 ‘더 씽’을 봤다고 했어!”


“진짜야? 럼에 꼴아서 잘못 본 거 아니고?”


그때, 두 사람은 마치 돌 조각이 보도블록 위로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


“무슨 소리지?”


곧이어 뒤편 골목길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둘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3m에 달하는 거구, 그것도 온 몸이 바위로 뒤덮인 황색 거인이 낮은 울음소리를 내며 그들을 바라보자 두 사람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지…”


“진짜… 있어…”


마침내, 그것이 솥뚜껑만한 양 손을 들며 울부짖자 둘은 가지고 있던 짐도 던져버리고 그대로 달아났다.


“더 씽이다아아아아아!!!”


두 사람이 저 멀리 사라지자, ‘더 씽’은 그들이 버린 짐들을 번쩍 들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어느 골목. 험상궂은 사내들이 줄지어 있는 그곳에 ‘더 씽’이 나타나더니, 짐들을 내려놓았다. 그들 중 한 명이 물었다.


“또 겁줘서 물건 가져온 거죠? 이번엔 뭡니까?”


‘더 씽’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설탕이랑 옷감.”


그렇게 말한 ‘더 씽’의 덩치가 급격히 쪼그라들고, 바위 피부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렇게 나타난 것은 어느새 15살이 된 벤지였다. 벤지가 물었다.


“그나저나 형님… 아니, 대장은 어디 있어?”


사내 중 한 명이 코웃음을 쳤다.


“대장이요? 뻔하지 않습니까? 또 거기 가서 그 여자랑 뒹굴고 있겠죠.”


벤지는 한숨을 내쉰 다음 자리를 뜨려 했다.


“너희는 그거 정리해서 팔 준비 해. 난 대장 찾으러 갈 거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한편, 그들이 찾는 대장, 카르마는 어느 낡은 방에서 다른 소녀와 몸을 섞고 있었다. 파랗고 긴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었지만 하얗다 못해 창백하기까지 한 몸은 너무 말라 조금만 힘을 줘도 부러질 것 같았다. 소녀가 몸을 부르르 떨자, 카르마는 소녀에게 입을 맞춘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 입었다. 소녀 역시 몸을 추스리며 물었다.


“르마(그녀 역시 이름이 카르마라는 것을 알지만, 그녀는 ‘르마’라고 부르는 것을 더 좋아한다.), 오늘 신문 봤어?”


“갑자기 신문? 왜 그러는데?”


소녀는 탁자 위에서 신문을 가져왔다.


“너 해적 좋아하잖아. 오늘 해적 기사가 하나 떠서 그래.”


카르마는 그녀가 건넨 신문을 펼쳤다.


“’불주먹’ 포트거스 D. 에이스, ‘신세계’에서 목격. 강력한 주의 요망. 이스트블루 출신으로 알려진 해적 ‘불주먹’ 포트거스 D. 에이스가 얼마 전 신세계에서 목격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1년 전 본격적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그는 단숨에 성장세를 보이며 3억 베리가 넘는 현상범이 되었다. 신세계 주민들은 각별한 주의를 요하는 바이다.”


“어때? 르마가 좋아하는 내용이잖아.”


“그래, 한나. 이런거 좋아해.”


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나 왔어. 문 좀 열어 봐.”


카르마는 한나를 슬쩍 바라보더니 다가가 문을 열었다. 동생 벤지가 서 있었다.


“동료들이 찾아. 형수님이랑 그만 있고 가자.”


“그런 관계까진 아니야, 벤지.”


한나도 거들었다.


“그럼, 그냥 파트너일 뿐이지.”


카르마는 한나에게 다가가 작별의 입맞춤을 한 뒤 벤지와 집을 나왔다. 낡은 산동네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배가 드나드는 것이 보였다. 벤지가 물었다.


“벌써 2년이나 지났어. 형님, 그동안 우리가 뭘 했는지 기억 나?”


“도시 뒷골목을 엎어 버리고, 우리랑 훗날 바다로 나갈 사람들을 모으고, 돈을 계속 얻었지.”


“형님은 그동안 저 여자랑 뒹굴고 있었잖아. 그냥 고백하고 같이 바다에 나가면 안 돼? 한나 씨는 형님 엄청 좋아하는 것 같던데.”


카르마는 담배를 물었다.


“난… 누군가의 남편이 될 수 없는 사람이야. 돈은 필요한 만큼 모였지? 이번주 내로 출항하자, 적당한 배도 찍어 놨어.”


“그래, 형. 돌아가서 그것도 알리자.”


잠시 후, 카르마와 벤지는 동료들 앞에 섰다.


“지난 2년 동안 내 말에 따라 줘서 고맙다. 우리들의 노력 끝에… 우린 이번주 안에! 출항한다!”


카르마가 칼을 높이 치켜 들자, 다른 이들도 환호와 함께 칼이며 주먹이며 높이 치켜들었다. 그 중 누군가 물었다.


“대장, 아니 선장! 배는 어디 있습니까?”


“이미 점 찍어둔 배가 있지. 거기 너! 너, 그리고 너, 벤지! 날 따라와라.”


카르마가 지목한 이들을 데리고 간 곳은 항구 바깥쪽이었다.


“우리가 가져갈 배는… 바로 저거다.”


그들 중 한 명이 말했다.


“브릭이네요? 근데 저거 상선 아닙니까?”


“배의 이름은 ‘북풍(노스윈드)호’ 스베리예 왕국 소속 상선인데 일주일 전 관세 문제로 억류 당했어. 보다시피 루브니르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지. 엊그제 몰래 잠입해 봤는데, 단순히 저놈들이 지키고 있을 뿐 키를 잠궈놓거나 하진 않았어. 대충 들어보니 스베리예 왕국 측에서 관세를 내줄 것 같지는 않더군. 이번주 내로 야밤에 잠입해 배를 탈취하고 출항한다.”


모두 고개를 끄덕이자, 카르마는 그들에게 일렀다.


“여기서 날짜를 정하는 게 빠르겠지. 시행은 그믐달이 뜨는 사흘 뒤 자정. 우리들을 비롯해 가장 실력이 좋은 녀석들로 셋 정도 더 붙인다. 다른 이들에게 알려서 그동안 항해에 필요한 물품들을 사 놓고 준비하고 있어. 알겠지?”


“네.”


“해산.”


순식간에 정해 놓은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작전 시행 12시간 전, 카르마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한나를 찾았다. 언제나처럼 한나는 미소를 띄우며 그를 맞이했다.


“어서 와, 이틀만 이네?”


카르마는 말없이 한나의 품에 안겼다. 부드러움 하나 없이 딱딱한 몸이었지만, 카르마에게 그녀는 동생 벤지를 제외하면 세상에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한나는 조용히 카르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많이 힘들었나 봐?”


“그래… 한나, 아마 오늘이 마지막일 거야.”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오늘 밤에, 출항할 거야. 아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높고.”


“르마… 꼭 떠나야 해?”


“한나, 난 어렸을 때부터 바다로 나가는 것에 내 인생을 바쳤어. 이젠 돌이킬 수 없어.”


“그, 그렇다면 나도 데려가! 나도 바다로 가고 싶어!”


카르마는 대답 대신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내가 나가는 바다는… 너에겐 거칠기 그지없을 거야. 너는 안전한 이곳에 있어 줘.”


한나는 울먹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울기 시작했다.


“르마, 제발…! 난 네가 죽는 건 원하지 않아… 널 사랑해! 너랑 오랫동안 같이 있고 싶어!!”


카르마는 다시 입을 맞추더니 혀를 섞으며 천천히 한나의 옷을 벗겼다.


“고마워, 한나. 하지만… 나는 널 사랑할 수 없어. 네가 행복하기 위해선 내가 떠나야 해.”


몇 시간이 흘러 해가 뉘엿뉘엿 저물 때 즈음, 둘은 집 밖으로 나와 바다 저 너머에서 저무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카르마가 말했다.


“여기서 석양을 수도 없이 본 것 같지만… 볼 때마다 아름다운 것 같아.”


눈이 퉁퉁 부운 한나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응…”


그렇게 말한 한나는 대뜸 카르마의 어깨를 잡고 자신과 눈을 마주치게 만들었다.


“르마, 약속해 줘. 꼭… 여기로 돌아오겠다고.”


카르마는 그녀를 위해 미소를 짓고 싶었지만, 미소가 지어지지 않았다.


“그래, 꼭 돌아올 게.”


둘은 끝까지 서로를 기억하도록 꼭 껴안았고, 카르마는 눈물을 흘리는 한나를 두고 떠났다. 그날 밤, 그믐달이 떠서 어둡기 그지 없는 항구. 병사들이 억류된 스베리예 왕국 소속 선박을 지키며 서로 잡담을 나눴다.


“이봐, 그거 들었어? 노스 블루의 해적 말이야. 그… 의사 어쩌고 하는 놈.”


“트라팔가 로 말하는 거야?”


“아! 그래, 맞아. 그 ‘죽음의 외과의’. 그 놈 얼마 전에 ‘위대한 항로’로 들어갔다던데?”


“그래?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까?”


“알라바스타도 못 가고 죽을 걸? 나도 귓동냥으로 들은 건데, 위대한 항로 초반에 죽는 해적이 그렇게 많데.”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몇 몇 형체들이 움직이더니 하나의 형체가 바람처럼 둘을 스치고 지나가자, 두 경비병들의 목이 잘리더니 바다 속으로 추락했다. 그 형체, 카르마가 칼을 든 손으로 손짓하자 다른 이들도 줄줄이 배에 올라타 바람처럼 빠르고 신속하게 경비병들을 처리했다. 단 10여분 만에 배 위의 경비병들이 모두 살해당하자, 카르마는 배 뒤편으로 올라가 횃불을 흔들었다. 그러자 미리 근처에서 대기하던 다른 이들도 짐을 들고 빠르게 배에 탑승하고, 벤지가 타륜을 잡자 카르마는 30명에 달하는 선원들을 바라보았다.


“아드리안, 앤더슨. 메인 마스트의 돛을 펼쳐라! 애런, 미키. 너희는 부 마스트의 돛을 펼쳐. 다른 선원들은 혹시나 모를 전투에 대비해 대포를 준비해라. 벤지, 바람은?”


“아주 양호해. 돛만 펼치면 엄청난 속도로 움직일 거야.”


“벤지, 공석에서는 선장이야.”


“알겠습니다, 선장님.”


곧이어 돛이 펼쳐지자, 카르마는 다시 소리쳤다.


“레지, 닻을 올려라! 출항이다!”


모든 선원의 함성소리와 함께 바다 깊숙이 가라 앉아 있던 닻이 끌려 올라오자, 강한 바람과 함께 배는 항구에서 떠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떠나가는 배를 한나는 말 없이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꼭 돌아와야 해… 르마.’


어느새 루브니르 왕국이 보이지도 않게 되자, 벤지가 물었다.


“선장님, 이제 이 배가 우리건데, 이름도 지어줘야지 않겠어요? ‘북풍’호도 좋지만 그건 상선 이름이잖아요.”


선원들이 앞다투어 자기들이 원하는 새로운 배의 이름을 불렀다.


“’블러드 메리’ 어떤가요?!”


“’잭도우’가 좋을 것 같습니다!”


“’블랙 펄’은 어떻습니까?!”


“그냥 화끈하게 사모님 이름을 붙여버리죠!”


“누가 방금 그 말 한 새끼 한대 때려!”


그렇게 말한 카르마는 씨익 미소를 짓더니 이내 표정을 굳혔다.


“…’여명의 복수’호. 그게 괜찮을 것 같아.”


다른 이들도 따라 미소를 짓더니 이내 칼을 높이 들고 소리쳤다.


“’여명의 복수’랍신다!”


“’여명의 복수’호!”


벤지가 말했다.


“다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네, 형님. 그런데 이제 어디로 가지?”


“항해사, 가장 가까운 섬이 어디지?”


항해사는 노스 블루의 지도와 나침반을 비교하다 말했다.


“노티스입니다.”


“그럼 거기로 가자. 거기서 해적기도 만들고, 짧게 정비를 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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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작품의 클리셰 급인 주인공을 기다리는 여자, 한나입니다. 원피스 세계관에서 동물계 환수종 열매보다 희귀하다는 빈유 여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