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드백 두 손 들고 환영입니다.

아직 부족한 소설가이고 창문챈에 올리는 첫 작품이니, 어떤 부분이라도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으면 바로 짚어주셨으면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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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고서도 시야가 한동안 일렁여, 한동안 그 자세 그대로 가만히 있어야 했다.


눈을 길게 감았다가 다시 뜬다.

눈을 비비려고 손을 움직이고 싶었지만,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귀찮음이라는 감정이 내 팔을 놔주지 않았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저 눈을 깜빡이는 것만을 반복하기로 했다.


그렇게 5번 정도 지루하지만 귀찮지는 않은 해결법을 쓰고 나니, 눈 앞이 생생하게 보였다.

시야를 한없이 채우는 많고 많은, 끝없는, 꽉 채워져 있는, 그것.


"책이네."


책이 늘어선 책장들이 여기 앞에도 보이고, 책들의 사이 너머에도 보이고, 그 책장의 책들 사이 너머에도 또 보이고, 그렇게 반복되는 곳.


서점 아니면 도서관인가.


아마도.


적어도 지금 몸을 일으키면 더 확실하게 알게 되겠지.

한쪽 팔을 벤 자세 그대로,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만 했다.

시야가 확실해졌는데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시야를 확실히 해봤자 도움이 안 되는 거였나.

애초에 눈을 깜빡일 필요도 없었던 걸까.

적어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서 다행인가.

다행인걸까.

아마도 다행이겠지.


여하튼, 이제 일어나자.


그 생각을 끝으로 나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





한 번 마음을 먹고 나니 움직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움직이려 들 떄마다 근육이 움찔거리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팔을 베고 있던 자세에서 벗어나 책상의 옆에 일어섰다.

왜인지 김이 빠졌다. 이렇게 쉽게 일어날 거였으면 아까의 귀찮음은 무엇을 위해서였을까.

아까 눈을 깜빡인 건 무엇을 위해서였을까, 라고 느낄 때와 같은 허탈감이 다시 찾아왔다.


하지만 허탈해 있을 여유는 나에게 없는 것 같으니, 나는 새삼 처음 보는 이 곳을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누워서 한 쪽 시야만 보던 전과는 다르게 360도를 돌려보니, 여기는 확실히 도서관이었다.

책장에는 책들이, 전부 커버가 어떤 색감의 초록색이든, 결국 초록색인 책들만이 꽂혀있는 도서관.

연두색, 진녹색, 카키색, 민트색, 그런 색들의 향연이 내 눈앞에도, 나에게서 1 미터 거리에도, 저어어어 멀리에도, 끝 없이 보였다.


...아니, 이 공간 자체의 모든 곳에 책이 꽂혀 있는 것 같았다.

테이블이 있는 건 이 곳 뿐인 것 같다.


이 공간은 사람 하나와 테이블 하나만 빼면 온통 책장과 책인건가.

만약 그렇다면 엄청난 도서관이다.




이 곳이 도서관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다음으로 따진 것은, 내가 왜 이곳에 있느냐, 라는 것이다.

생판 처음 보는 곳이다. 내가 이 곳에 팔을 베고 쳐 자고 있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그러면 그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게 하려면,

내가 자기 시작한 후 나를 여기에 데려 와서, 의자 위에 앉혀, 팔을 책상 위에 놓고, 내 옆머리를 내 팔 위에 놓은 누군가가 있었다는 게 합당하다.


그럼 단지 친절한 건지, 따로 계획이 있는 건지 감이 안 잡히는 '누군가'는 대체 누구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나를 여기에 버려두고 그냥 가지는 않지 않았을까.

어딘가 근처에서 돌아다니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으려나...


하지만 단순히 생각하자. 나는 생판 처음 온 곳에 있다. 그러니 내가 익숙한 장소로 돌아가려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결국 나는 누군가를 찾아야 한다. 그게 나를 여기에 데려온 사람이던, 아니던.

나는 그래서 사람을 찾기로 했다.

누구든, 좋으니, 지금 내 상황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여기, 누구 계신가요?"


도서관에서 소음은 금물이라고 하지만, 나는 정신을 차려 보니 영문을 모르겠는 장소에 온 처지다. 이 정도면 면죄부가 되겠지.

그런 생각으로 외쳐본 말이었다.


...아무 반응이 없는 걸까, 그럼 움직여보자, 하고 생각하던 때였다.


멀리서 허둥대듯 의자를 바닥에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 쪽으로 뛰는 듯한 육중한 발소리.


바닥이 쿵쿵 울리는 것을 발바닥으로 느낀다. 서서히 고개를 들어, 그 방향을 가늠한다. 

아무래도, 이쪽...?


가까워지는 울림을 느끼면서, 가만히 그 방향을 바라보니...



책장의 사이로, 누군가의 얼굴이 나온다.

몸통이 나온다.

다리가 나온다.


알고 보니 미소녀다, 같은 라노벨식 전개는 적어도 아니다.





남색과 흰색 세로 줄무늬 셔츠를 초록색 앞치마 아래에 갖춰입은, 몸집 큰 남자가.

두꺼운 녹색 커버의 책을 들고 나를 보고 있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여기저기 헝클어진 푸른 머리와 관리도 안 된 턱수염이 있었다.


잠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침묵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저 사람은 무엇 때문에 나를 바라보며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그리고 저 사람은 왜 아무 말도 못하는 채, 그저 헤벌레ㅡ 입을 벌리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느라 먼저 입을 떼지 않았다.


저 사람은 몇 초가 이대로 지나는 것을 눈 뜨고 보고 나서야, 겨우 말을 꺼냈다.


"왜... 벌써?"

"네?"

"왜 벌써 일어났어?"

"...왜 벌써 일어났냐뇨?"

"왜.. 지금 일어나냐고. 아직 조정은 다 마쳐지지 않았을텐데.. 적어도 지금까지는.. 아니, 조금의 예외가 있었긴 해도.. 적어도 이런 식은.."


그대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한 남자. 그 모습에 조금은 짜증이 났다.


그의 말을 따져보자. 그는 나에게 '왜 벌써 일어났냐'라고 물어보았다. 그 사실은 적어도 세 가지 결론으로 이를 수 있다.


1. 나는 저 남자가 예상한 것보다 일찍 일어났다.

2. 저 남자는 내가 잠들었다는 것과,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일어났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3. 그리고 저 남자는 내가 이 '도서관'에서 일어났다는 것에 대해서 문제삼지 않는다. 즉, 내가 이 도서관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것 자체는 이미 정해져있었다는 것이다.


최종 결론 : 저 남자는 내가 이 곳에 깨어나 영문 모르는 곳에 있는 상황에 대해 알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니, 애초에 이 상황을 만드는 데 일조했을 가능성까지 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눈 앞에서 나를 휘둥그레 쳐다보면서 영문 모를 말을 중얼거리고 잇으니, 짜증이 조금 날 법도 하지 않은가.

나는 그 감정을 담아 말을 꺼냈다.


"저기요."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
"저기요!"

"...너, 지금 화나 있나?"


갑자기 훅 들어온 질문에 순간 당황했다. 그리고 내가 화났다는 사실을 당연하다는 듯이 언급하는 사실에 더 짜증이 났다.


"당연히 화가 나죠! 사람이 이런 상황에 있는데 어떻게!"

"하지만 감성적으로 되어서는 아무것도 못해. 이성적으로 너는 상황을 바라보아야 해. 알겠어?"


맞는 말이다.


"..네, 알겠습니다. 당신은 제가 이 상황에 처한 이유에 대해서 아시는 게 있으신가요?"
"이성적 판단으로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위화감 없음. 테스트 1 통과."

"네?"


그제서야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나.. 화내고 있었지?'

분명 화가 났다. 짜증이 났다. 눈 앞의 저 남자에게 잔뜩 화내고 있었다.

그런데...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은 이제 내 쪽이었다.

혼란스러운 머리를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갔다.


"다음. 지금 너는 나를 바라보고 있어. 그것도, 올려보고 있어, 맞지?"

"..네."


나의 작은 키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아까보다는 조금 냉정해지고 침착해진 얼굴을 올려다보며 나는 말했다.


"그리고.. 너는 이제 침착해졌지?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해, 그렇지?"

"네."

"너는 여자구나. 그것도.. 꽤나 매력적인 여성이네."

"매력적.."


이런 상황에서 이상한 남자에게 들은 말이지만, 그래도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감사하다, 라고 해야 하나요?"

"뭐, 됐어. 테스트의 일환이야."

"네?"


갑자기 약간은 좋아진 기분이 팍 식었다.


"자, 다시 질문. 너는 꽤 키가 크구나. 그것도 나보다. 나도 덩치가 크다고 생각하는데, 너는 더 크네. 그렇지?"

"뭐.. 그렇죠."


약간 기분이 상했으면서도, 나는 그 말에 자동적으로 긍정했다. 뭐, 내 몸집이 평균보다 훨씬 크긴 하지.

...응?


마음 속에 낀 조약돌 같은 위화감이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질문이 이어져 그 움직임은 뭍혔다.


"너는... 이성적으로 행동하지만, 가끔은 밤하늘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그런 타입의 남자네. 그렇지?"

"어..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남자에게 혼란스러워하며, 나는 외쳤다.


"뭐..죠? 당신, 지금 그건 어떻게 알아본..!"


확실히, 시골에 살면서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나의 취미 중 하나고, 가끔은 그 아름다움에 경탄하며 눈물을 흘릴 때도 있긴 했다. 남자답지 않은 것 같아 다른 사람들에게 필사적으로 숨겼는데..


숨겼는데..


숨겼.


다.


고 생각했다.


하지만,


밤하늘이, 정확히 어떻게 생겼더라?

눈이 핑핑 도는 것 같다.

가면 갈수록 처음의 허둥지둥함은 사라져가는 남자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감이 안 온다.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도 감이 안 온다.


손가락을 허공에 들어, 분명 기억 속에 있는 밤하늘을 그리려 했다.

별들의 궤적을.

그들의 반짝임을.

내 기억 속의 무언가를.




ㅡ허공을 손가락이 가른 채, 멈췄다.




그런 나를 남자가,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던 관심 없다는 듯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마지막 질문, 이 도서관을 본 적이 있나?"

"...아니요."


나도 모르게 질문에 대답하며,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올려다보았나? 내려다보았나? 모르겠다.

나는 여자인가? 남자인가? 모르겠다.

나는 이성적으로 행동하려 하는가? 아니면 이 감정에 휩쓸릴 것 같은가? 모르겠다.

나는 친구가 많은가? 인기가 많은가? 아니면 적은가? 친구가 많으면 하나하나의 관계는 약해질 뿐이라고 자위하는 편인가? 모르겠다.


모르겠다.


정말로.


남자는 그제야 안심했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뚱한 표정으로 돌아가, 헝클어진 머리를 긁적였다.


"그저 행정상 실수인가. 아니, 예정보다 빨리 왔으니, 실수라기보다 능률화라도 있었나.

어찌 되어도 나에게는 상관없지.

귀찮은 일만 안 일어나면 나에게는 그만이야.



어쨌든, 도서관에 온 걸 환영한다, 라고 할까.


배우... 85289342호."


나는 혼란함 속에 빠진 채 그대로 자리에 못박혀 움직이지 못했다.

남자는 그런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NG는 그만하고 내 자리로 돌아오라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