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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 사과 / 과학자 / 아크릴 / 개치네쒜 / 체코 / 비디오 테이프 / 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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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치네쒜.”


“무슨 말이에요. 누님.”


Bless you. 누님이라 불린 여자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남자는 잠시간 고민하다가 아직도 간질거리는 콧방울을 손등으로 훑으며 말했다.


“제 국적은 체코에요. 미국이 아니라.”


“알아. 그래서 한국식으로 말해줬어. 나 체코말은 모르거든.”


한국에서도 잘 안 쓰잖아요. 남자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여자의 뒤를 따라 걸었다. 경쾌한 구두소리와 박자감 있지만 귀찮음이 묻어나는 군화 소리. 두 사람분의 따 각거리는 발소리가 서로 어울리지 않고 엇박자를 이루며 복도를 울려 대었다.


여자는 제 손에 들려 있는 보고서를 천천히 훑기 시작했다. 그래프와 도표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문맥에 맞지 않는 단어들의 선택과 군데군데 묻은 불그스름한 자국들. 그녀는 있으면 안 되는 부자연스러움을 매만져보기도 하고 냄새를 맡기도 했다. 그러다가 여자는 고개를 조금 돌려 남자를 보며 말했다.


“이 보고서 쓴 사람. 검수는 한 거야? 단어들이 이상한데? 게다가 이 자국들. 코피라도 쏟았어?”


여자의 말에 남자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상식적으로 지문의 형태를 유지한 채 말라붙은 검붉은 자국을 보면 손에 묻었던 피라고 생각하지 않나?


그럼에도 남자는 그런 의구심을 입 밖으로 내뱉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분명 이 일을 빌미 삼아 더욱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이 분명했기에. 그는 가벼운 한숨과 고개를 몇 번 저어대고는 말했다.


“아까 제가 한 것처럼 코를 손등으로 훑다가 묻었나 보죠.”


“콧물인 줄 알고 닦았더니 코피였다?”


“뭐, 그런 추론도 가능하겠네요.”


“게으르기는. 나였으면 화장실에 가서 닦았을 텐데.”


암요. 그러시겠지요. 그렇게 중얼거린 남자는 그동안의 정보를 통해 이 대화가 꼬여버린 비디오테이프의 줄을 다시 펴보려는 일 처럼 무의미할 것임을 직감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의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 여자가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에 성의 없는 추임새와 함께 줄을 걸어 어깨에 사선으로 걸쳐놓은 기관단총의 몸체를 손가락으로 툭툭 칠 뿐이었다.


복도의 끝 방에 다다를 즈음, 구두와 군화의 소리가 천천히 제소리를 잃어갔다. 여자는 다 읽은 보고서를 돌돌 말아 어깻죽지를 툭툭거렸고 남자는 가벼운 한숨을 쉬며 그녀의 옆을 지나가며 문고리를 잡았다.


가죽 장갑을 낀 손에서도 느껴지는 찌릿함이 그의 몸을 타고 움찔거렸다. 전기신호가 아닌, 군인이자 용병으로서 살아온 본능이 말해주는 경고와도 같은 느낌이었지만 그는 그런 반응을 애써 무시한 채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묵직하고 음습한 공기가 짙게 내리깔렸다. 숨쉬기도 벅찬 중압감이 어깨와 목을 서서히 그들을 조여갔다. 남자는 두꺼운 아크릴판을 하나 두고 서 있는, 인간 크기 정도 될 것 같은 황색의 로브를 뒤집어쓴 괴물을 바라보았다.


형용할 수 없는 공포. 분명 여자가 읽고 있던 보고서에 그렇게 적혀있었다. 크툴루니 그레이트 올드 원이니 하는 그런 단어들의 나열은 그에게 있어 하등 의미가 없었다. 


알지 못하니 이해하기도 싫었다가 정확한 표현이었다. 이런 오컬트적인 이야기는 그의 인생에서 아주 작은 지식에 불과했으니까.


중요한 것은 사태가 벌어졌을 때 그녀를 온전히 데리고 나갈 수 있는가. 아니. 저 괴물에게서 도망칠 수 있는가부터 고민해야 하는 문제였다. 


그런 남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는 천천히 그 혹은 그것을 바라보며 때 묻기 시작한 보고서를 만지작거렸다.


“저거 봐. 보고서에 적힌 대로 다리가 촉수 형태로 되어 있어. 문어? 아니면 오징어? 촉수에 붙어 있는 빨판이 촉각을 담당하는 기관인가? 아. 그래. 여기에 적혀 있는 대로 음식이나 음료의 섭취는 일절 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지만, 만약 신적인 존재나 그에 준하는 존재라면 사과는 어떨까? 사과는 선악과로 묘사되기도 하니까 반응하지 않을까? 아니, 그러면 고고학적으로 따져서 살구나 무화과를...”


남자는 그녀의 눈에서 황홀경을 읽었다. 이래서 과학자라는 족속들은. 지식의 탐구를 위해서라면 제 목숨도 바칠 인간들 같으니. 그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 손을 뻗어 여자의 어깨를 잡아 제 몸으로 끌어당기고는 말했다.


“누님. 위험해요.”


“탐구 정신이 불끈 솟는 느낌이야. 솟아오르는 것은 가슴에 달려 있는 해면체뿐이지만. 아. 하나 더 있네.”


“이상한 소리 하지 마요. 직장 내 성희롱으로 고소해버릴까 보다.”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와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혀를 차며 언제든지 방아쇠에 손을 걸 수 있도록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명백히 적대적인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괴물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 남녀를 관찰하듯 지그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때? 기이하지 않아? 어쩌면 우리가 관찰당하는 게? 심연이 우리를 들여다보듯이.”


“실험체에게 관찰당하는 연구원이라니. 아이러니네요.”


“원래 모든 것이 아이러니야. 지금도 그렇잖아? 가장 이성적인 학문인 과학에서 굉장히 감정적이고 미지스러우며 비과학적인 오컬트적인 것을 해쳐하는 것. 과학자의 나인가 인간인 나인가.”


여자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계속해서 남자를 향해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그것이 황홀경에 빠져버린, 행복에 겨운 과학자의 지껄임이라고 생각한 그는 평소처럼 적당한 추임새를 곁들여 넘겼다.



그러기를 몇 분. 그녀의 코에서 따뜻한 피가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 어느샌가 인중을 타고 흘러 턱에 맺혀 톡하고 떨어진 한 방울. 그제서야 자신의 상태를 파악한 여자는 본능적으로 콧방울에 손등을 가져다 대어 훑었다.


“아. 코피.”


“얼씨구. 가지가지...?”


그 순간, 남자는 무언가 크게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미리 읽어본 보고서에 적힌 이상한 단어들의 나열. 군데군데 피가 묻어 굳은 자국. 그 모든 것이 지금을 가리키고 있음을 깨달은 남자는 옆에서 휘청거리고 있는 여자를 안아 들고는 문으로 달려 나갔다.


위험하다. 생사를 넘나들었던 남자의 본능에 의거한 행동이었다. 발걸음 한 번씩 내 딛을 때마다 촉수가 발목을 붙잡는 듯 무겁고 끈적거렸다. 몇 걸음 가지도 않았는데 몇 킬로를 달린 듯 숨이 가빠왔다. 그는 아무도 없었지만, 서서히 닫히는 문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몸을 비틀며 미끄러지듯 자신을 던졌다.


강하게 부딪히는 문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그사이에 묻혀버린 남자의 몸은 등에서부터 찌릿하게 전해져오는 낮은 비명의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의 가쁜 숨과는 별개로 정신을 잃은 듯 눈을 감고 있는 여자는 그의 품에서 아무런 행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하. 일 때려치울까 보다.”


어깨부터 다리까지 구석구석 욱신거림을 참아낸 남자는 몸을 천천히 일으켜 기절한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 쉬며 발걸음을 옮기다 문득 뇌리를 스친 순간이 생각나 고개를 돌렸다.


분명히 그 괴물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