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다. 아버지는 운동권이었다. 1971년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어릴 적 5.18을 겪고 조선대학교에 91학번으로 입학했다. 학생운동 최후의 전성기였던 격동의 90년대에 아버지 역시 자연스럽게 운동권에 발을 들였고, 그 중 경찰 세력과 직접적으로 격돌하던 사수대, 통칭 ‘녹두대’의 일원이 되었다. 아버지는 주로 시위 현장에서 깃발을 들었고, 뉴스에도 몇 번 나왔다고 한다. 당연히 최루탄을 막기 위해 얼굴에 천을 두른 채로. 잘 대해주던 후배가 프락치라 한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한 적도 있었고, 시위 중 누군가 던진 화염병 파편에 맞아 아직도 손에 작은 흉터를 지니고 있으며, 진짜로 잡혀서 국보법 위반으로 집행유예를 받은 적도 있었다(이쪽은 훗날 재심으로 무죄를 받았다.). 놀라운 것은 이럼에도 단 한 번도 어머니, 그러니까 나에게는 할머니한테 걸린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한때 학생운동의 선봉으로 90년대를 함께 한 아버지는 졸업 후 IMF 사태를 피해 우연히 연고도 없던 울산의 어느 기업에 취직하게 되었고, 거기서 우연히 어머니를 만나 결혼했다. 나이가 들며 그때의 과격함은 사라지고, 유연하고 부드럽게 변해 한때 반미 반일을 외치며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 프롤레타리아 혁명론을 독파하던 과거에서 벗어나 누구보다 미국의 문화와 정책 등을 동경하는 아저씨가 되어 심심하면 미국 출장간 이야기를 아들에게 풀게 되었다. 뭐, 아직 성향은 크게 안 변했지만 말이다. 그 누구보다 운동권이라는 배경을 자신의 커리어로만 삼는 정치인을 싫어하고, 그보다 더 전향한 정치인을 싫어하는 중년 남성이 된 아버지는 어쩔 때는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아저씨로, 또 어쩔 때는 결코 뒤쳐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남자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는 항상 나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루는 한창 어머니와 술을 마시던 때, 아버지가 나를 부르더니 알바도 하지 않는 나를 가볍게 질책하며 자신은 대학생 때 아침마다 공중전화에 있는 전화번호부에서 이삿짐센터 전화번호를 누르며 아르바이트 거리를 찾았고, 그걸로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가입금?을 냈다며 일장 연설을 했다. 그러더니 아버지는 집 앞편의점에 가면 사장이 이 시간에 홀로 일하지 않냐며, 가서 나 알바 좀 시켜주소! 라고 말은 해봤냐고 했다. 당연히 해본 적이 없지. 그러더니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가서 사장한테 그렇게 말하고 와!”

라고 말한 아버지의 손에는 카드가 들려 있었다. 이런 젠장, 아버지의 빌드업에 무릎을 탁 친 나는 얄짤 없이 맥주를 사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