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노란 해가 노을 지는 계절. 푸른 잎사귀가 물드는 계절. 달력의 숫자가 붉게 색칠되는 계절. 그러나 요즘의 추석은 명절 같지 않다. 코로나? 가족 간의 공동체 의식의 상실? 지나친 도시화와 현대화? 나는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그 원인에 대해서는 확신신할 수 없다. 


그러나 누군가 내게 이유를 물었을 때 벙어리처럼 입을 다문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질문에 대해서는 당연한 시대의 흐름이라고 답하고 싶다. 서로 다른 시대의 풍습과 문화가 서로 공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농촌 시대의 문화인 추석이 정보화 시대인 오늘에도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제는 단풍도 물들지 않는다. 남겨진 것은 노을과 달력의 붉은 숫자 뿐이다. 서글프지만 당연한 흐름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직은 농경 사회의 냄새가 짙던 시절의 이야기다. 가족과 고향에 집착하던 시절의 사연이다.


몇십 년 전, 그때 나는 한 시내 병원의 간호사로서 근무하고 있었다. 인구 20만의 나름대로 규모 있는 도시였지만 병원 업무는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던 것으로 생각한다. 애초에 그 도시는 소위 베드타운으로써, 일자리는 구했지만 집은 구하지 못한 사람들의 거대한 침실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그 도시에는 낮과 밤이 없었다. 나가려는 아침과 들어가려는 저녁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병원도 침대만이 길게 늘여져 놓아져서는 별다른 의료 장비나 도구 또한 없던 것으로 기억한다. 3층 크기의 건물에서 의사는 4명뿐이었으며 간호사는 나를 포함해서 15명 정도였다. 


하지만 말이 간호사였지 청소를 더 많이 했었다. 찾아온 환자들도 나를 보고 청소부라고 오해한 일도 종종 있었다. 위치는 꽤 외진 곳에 있었는데 아마 땅값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5년 동안 병원에서 근무하며 부당한 일도 겪었고, 황당한 사건도 겪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생각나는 사건은 오직 하나 뿐이다. 


그 사건은 198*년 8월 **일에 있던 것이었다. 나는 추석임에도 불구하고 근무를 서고 있었다. 그때는 평일과 휴일의 경계도 희미하던 시절이고, 고된 타지에서 돈 말고는 믿을만한 친구가 없던 때이기도 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사람뿐이라고 했지만, 때로는 급여 명세서도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나았다. 


사건은 그날의 19시와 20시 사이에서 일어났다. 나는 비어있는 접수실의 의자에 앉아 다른 간호사들과 하릴없는 시간을 태우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간단한 자랑거리, 소식. 그리고 사이렌 소리. 그때의 우리들은 통금시간도 아님에도 사이렌이 울리는 것에 대해 의아해 하며 대화를 계속하고 있었다. 한 중년의 남성이 구급대원들의 들것에 들려서 오기 전까지는. 


"환자입니다!"


의사는 3층의 개인 휴게실에서 쉬고 있었기에 나는 계단으로 향했다. 


"선생님, 환자가 들어왔습니다."


그는 달갑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환자? 왜 하필 오늘?" 


그는 커피를 마시며 숨을 내쉬더니 곧장 계단을 내려갔다. 여담이지만, 그때 커피를 처음 맛보았다. 내가 내려갔을 때는 분위기가 다소 무거워져 있었다. 


"야,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지금 분위기 장난 아니야."


"죄송합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에요?"


"우리 병원에서 처음으로 송장 치우게 생겼어. 저 아저씨 간에 종양이 있다나 뭐라나."


"종양? 우리는 그런 거 할 수 없잖아요."


"서울에서 검사했대. 거기서 간암이 나왔다고 하더라고. 술 냄새가 독한 것을 보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면 어째서 여기로.."


"나도 몰라. 그나저나"


그때, 나보다 5살 위의 선배가 우리를 불러서 다들 바쁜데 뭐 하고 있냐고 꾸중했다. 나는 그 당시 들어온 지 2달이 갓 되는 신참이었기에 그녀가 크게 무섭지는 않았다. 다만 내 잘못까지 함께 꾸중 받은 선배의 내리 갈굼이 더 두려울 뿐이었다. 


"정**, 너는 나랑 같이 창고에 가자. 김**, 너는 저기 아주머니 좀 진정시키고 말동무나 해줘."


나는 병원 접수실의 의자에 한 중년의 여성이 앉아 흐느끼는 것을 보았다. 50 정도로 보였는데, 그녀는 흐느끼지만 울부짖지는 않았다. 그녀는 내 존재를 인식한 듯 먼저 말을 걸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젖어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낡은 가방의 해진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


"우리 남편, 나을 수 있을까요?"


"아, 네. 그럴 거예요." 나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어떻게 나을 수 있나요? 그럼 살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혹시 언제까지 살 수 있을 까요? 간에 종기가 있다고 하던데 제가 할 수 있는 건 뭔가요?"


"저도 몰라요. 제가 알아요?"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에는 서비스직이라는 개념과 윤리 의식이 희미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 답변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아주머니는 워낙에 선하셨던 나머지 그런 나에게도 사과하며 얌전히 앉아있었다. 불편한 분위기가 접수실을 맴돌았다. 죄책감과 의구심으로 아주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걸어보았다.


"혹시 어떻게 만나셨나요? 그 남편분이랑요."


"같은 마을 동무였죠. 40년 전쯤 되었을 거예요. 그때 놀면서 지냈죠. 그때는 제가 가장 키가 컸는데 지금은 아니네요."


"그럼 혹시 어떻게 사귀게 되었을까요? 그, 원래 보통 이성으로써의 감정이 잘 들지 않잖아요. 저도 그렇고 그러실 것 같아 보이던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아주머니와의 대화는 즐겁지 않았다. 그저 병원의 한 곳에서 모두가 최선을 다하듯이 나도 나만의 최선을 다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사실 제가 처음 좋아하던 사람은 저희 남편은 아니었어요. 따로 사람이 있었죠. 하지만 저희 고향이 이북이고, 또 저희가 이제야 막 꽃처럼 피어나려고 할 때 큰 난리가 있었잖아요. 다 죽었겠죠. 아, 숙이라는 동무가 있었어요. 그때 저랑 숙이는 산에 나물 캐러 갔죠. 


산 중턱에 작은 동굴이 있었고, 그 동굴 오른쪽으로 가다 보면 작은 들판이 있는데 그곳 근처에 나물이 많았어요. 그때 마을에서 총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저는 동굴에 숨었지만, 숙이는 내려갔죠. 새벽녘까지 소리가 계속 들렸어요. 따앙. 따앙. 그러다 무서워 거기서 기절했죠."


"이북 분인 줄은 몰랐어요. 사투리를 쓰지 않으시네요?"


"살아야죠. 이북 사투리를 쓰는 사람을 여기서 누가 좋아한답니까? 어찌 되었든 배고프기도 했고, 목이 말라서 결국에는 마을로 내려왔어요. 마을은 의외로 깨끗했죠. 벽이 약간 무너지고, 외양간이 텅 비어있고 군데군데 탄 자국을 빼면 말이죠. 영수는 자기집 마루 밑에 있더라고요. 걔 빼고는 모두가 사라졌어요. 오직 영수만이 숨어서 벌벌 떨며 자고 있더라고요.


나는 궁금했죠. 다들 어디 갔냐고. 총소리가 들렸는데 최 아저씨가 멧돼지를 발견한 거냐고. 영수 그 겁쟁이 놈은 사내답지도 않고 계집아이같이 덜덜 떨면서 군인들이 데려갔다고만 말했죠. 어머니도, 아버지도, 동생도, 동무들도, 그날 다 사라졌죠. 그 겁쟁이와 나만 남아서 있었던 겁니다. 그래도 영수 걔가 겁이 많아서 그렇지 덩치도 크고 잘생겼죠. 


아마 난리만 아니었으면 아마 큰일을 할 사람이었을 거에요. 저희는 영수가 몰래 움켜놓은 감자를 먹으며 계속 움직였죠. 먹을게 떨어질 때 사람 무리를 발견했죠. 영수가 말했죠. 


'어디로 가십니까?' 그러자 한 아저씨가 말하더라고요. 


'남쪽으로 간다.' 왜 가느냐고 물었죠. 그러자 아저씨는 


'우리 고향이 남쪽인데 일정 때 강제로 끌려왔다. 정착해 살려다 난리가 보통 난리가 아니어서 그냥 고향으로 간다.' 라고 답했죠. 그리고 


'고향에는 어무니, 아부지도 다 있을 텐데 바뀐 내 모습 보면 알아나 볼지 모르겠다.' 라며 웃기도 했죠.


제가 내려온 것도 영수가 선택한 거에요. 영수가 손을 잡으며 말하더라고요. 


'마을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어라. 무섭게 혼자 있지 말고 함께 갑지비.' 제가 싫다고 하던 걸 영수가 억지로 끌고 온 거에요. 


'너 없으면 나는 진짜 아무것도 없지비.' 웃기는 소리죠. 지깟게 뭐길래 뭘 있다거나 없다는 것을 정하는지. 그래도 싫지는 않았죠.


그 띨띨한 놈이 좀 사내 구실 하는 게 마음에 들었죠. 특히 폭격 때 제 몸 구하기도 힘든데 끙끙거리며 나에게 다가와 팔로 감싸는 게 좋았죠. 이놈이 정말로 뭔가를 할 수 있구나. 적어도 나를 위해 뭔가를 해줄 수는 있겠구나. 혼례는 올리지 못했죠. 하지만 한집에 살며 한밥을 먹으면 그게 혼례가 아니냐고 생각했어요.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걔와 나는 매일 혼례를 올리고 있는 것이죠."


"저희 이모부도 이북 사람이에요."


"정말로 그런가? 그것 참 인연이죠. 혹시 이모에게 물어보세요. 혹시 이모부가 가끔 끙끙거리며 울지는 않냐고. 저희 남편도 원래 그렇지는 않았죠. 몸이 멀쩡할 때는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아요. 멀쩡하면 바쁘니까요. 


하지만 어딘가 다쳐서 일을 못 하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잡생각이 들면서 막 죽으려 하죠. 쓸데없는 고향 얘기도 하고, 술도 마시고, 괜스레 나도 울적하게 만들기도 하고. 허리를 못 쓰면 팔이라도 쓰면 되는데 그것도 못 하고. 그 양반 입은 술 먹는 구멍이죠."


"미우세요?"


"밉지요. 누워있는 걸 보다 욱해서 괜스레 걷어차며 일어나라고 소리치고 싶죠. 하지만 그렇지는 못하죠. 걔는, 내 고향이나 마찬가지고 추억이나 마찬가지인데. 걔마저 가버리면 아무것도 없죠. 


고향의 집. 최 영감님의 마당에 있던 복남이의 털도, 여름날이면 어르신이고 아이고 너나 할 거 없이 몸을 담갔던 계곡의 한기도, 추석 때 영길이 오빠와 정희 언니 결혼식의 추억도, 그리고 순이, 영남이, 정숙이. 그런 동무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도 이제는 저와 제 남편만 남아있을 뿐이죠. 


가끔 그런 기억이 희미해져 외로워질 때 그 사람 모습을 보면서 회상하죠. 저 투박한 굳은살 안에서는 그 계곡의 물이 여전히 묻어있겠구나. 눈알 안에는 여전히 내 동무들의 모습이 들어있겠구나."


그러자 그 아주머니는 몸을 일으켰다. 가방에서는 거친 과도가 들려있었다. 나는 머리가 하얘져서는 가만히 앉아서 굳어있어질 뿐이었다. 아주머니가 내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주머니의 얼굴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도 알아요. 그게 고칠 수 없다는 걸. 하지만 간에만 종기가 난 거죠? 그럼 간만 고치면 괜찮아지는 거죠? 그렇죠?"


"네? 네! 그럴 거예요. 그, 그럴 거예요."


"아, 다행이다. 제 몸은 뜯어서 버리셔도 괜찮아요. 다만 간 만은 제 남편에게 주세요."


그때부터는 일련의 단편적인 기억만이 있을 뿐이었다. 아주머니의 미소가 보였다. 그녀는 자기 목을 찔렀다. 피가 꿈틀거리며 분수처럼 튀어나왔다. 나는 울면서 도움을 요청했고, 다른 선배들이 공황에 빠진 나 대신 응급처치를 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선배는 내가 기절했다고 말했다. '아주머니 간은 아저씨에게 주세요.' 라는 말만 발작하듯이 중얼거리던 내 모습이 무서웠다고 말하면서. 선배는 또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는 아주머니가 도착하고 5분뒤에 돌아가셨어.' 그 후로도 여러 사건이 있었지만, 내 뇌리에 남겨진 유일한 기억은 오직 이것 뿐이다.





+) 오랜만에 써서 이상한 거 많을 거임. 이상하거나 문제 있거나 고쳐야 할 점 있으면 댓글 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