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근본적인 원리가 '점점 더 복잡하게'라고 주장하는 책 속의 책이 있었다. 확실히 세상을 살펴보면 이렇게까지 복잡해질 필요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는 반례로 천왕성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지구보다 수십배 크지만, 보이저 호가 촬영한 사진을 보면 천체 전체가 단조로운 하늘색을 띄고 있을 뿐이다. 세상이 얼마나 단순해질 수 있을지, 그리고 얼마나 복잡해질 수 있는지는 하여튼 물리적 원리에 기반하고 있을 것임은 확실하다. 물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혹시 누군가는 내가 천왕성을 단순하다고 평한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글을 더 읽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뒤로가기를 누르거나 스크롤을 내릴지도 모른다. 솔직히 그게 현명한 선택이고 이 글을 다 읽는 것은 시간이 아깝다. 그렇다고 해도 천왕성이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창조물 치고는 겉으로 보기에 깨끗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사심을 더해서 말하자면 마치 하늘색의 진주같다.


  아무튼 아침이 되면 수많은 차들이 도로 위를 매운다. 내가 그 위에 있으면 환멸을 느낄 것이라 생각했으나 막상 늦잠을 자는게 아닌 이상 그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없었다. 체증으로 인해 차들이 멈춰있으면 나도 그냥 서있으면 되니까. 적어도 내가 주로 다니는 길은 교통신호 체계가 그렇게까지 불합리하진 않았다. 지나치게 신호가 바뀌는 것의 텀이 길다거나, 혹은 너무 빨리 바뀌어서 차들이 교차로를 빠져나갈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거나 하는 것 말이다. 전자는 시간을 들여서 기다리면 되기라도 하지 후자는 굉장한 짜증을 유발하는 편이다.


   나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고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게 아니고서야 내가 여기에 글을 적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인간관계가 삶의 만족도의 핵심인지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때때로 나의 사회성 부족이 스스로에게 어떤 문제를 야기할 지에 대한 고민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몇몇 재미있는 일은 혼자서 결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풀방을 요구하는 유즈맵, 래더 매치, 숨바꼭질, 얼음땡, 말뚝박기, 2인 이상의 입장을 요구하는 식당, 분위기상 혼자 들어가기 뭣한 식당에 들어가기 등등 말이다. 그것은 외로움이라기 보단 나 자신의 결핍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의식을 우주에 비유하는 수필이 있었다. 우리 모두 각자 자신만의 우주를 가지고 있는 셈이라는 것이다. 뭐, 좋다. 하지만 우주는 좀 과장된 것이 아닌가 싶다. 문학적 수사에 너무 꼬투리잡는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객관적일 필요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마틴 스콜세지는 아키라 감독을 '거인'이라고 비유하면서 이 단어가 예술계에서 남용되는 경향이 있다고 언급했다.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우리가 우주에 존재하는 수천억개의 은하(이것도 최근의 추정치인 2조에 비해서는 적게 잡은 것이다)가 정말 내 머릿속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광활할 수 있는가? 이게 가능하다면 문학적 거장들은 스케일이 큰 걸작을 아무런 오류 없이 집필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잘 쓴 소설이라고 해도 보통 오류가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우리의 의식이 결코 우주처럼 크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대신으로 비유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방? 방은 솔직히 너무 작다. 바다? 낭만적인 비유이지만 역시 의식보다는 크다고 생각한다. 숲? 내 생각에 숲은 그 크기에 있어도 너무 모호할 뿐더러 의식에 비유하기에는 너무 크다.


  그래서 나는 '정원' 정도가 의식을 비유하기에 알맞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정원보다는 살짝 클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좀 더 광활한 정원을 상상하기 바란다. 어떤 문화권의 사람들은 정원에 자연적인 특성, 이를테면 바다나 숲을 은유하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또 다른 사람들은 보다 전형적인, 잘 정돈되고 꽃들이 피어있는 정원을 원할지도 모른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인간의 정서적 특성을 반영하여 독창적인 정원을 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혹은 아예 관리되지 않은 부지(정원일 수 있는 것)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그리고 나는 정원도 충분히 낭만적인 비유라고 생각했다. 어찌되었든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의 세계관이 있음은 분명하기에 정원의 일부 혹은 전체가 각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하나의 세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원은 해석된 하나의 세계가 된다.


  장 보드리야르의 '사물의 체계'라는 책을 읽어본 적이 있었다. 지금 읽어본다면 어떨지 모르겠으나 너무 난해하게 적혀 있어 나는 결국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단어나 개념의 어려움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나중에 다른 프랑스인 저서를 몇 권 더 읽어보고 나서야 그들 저술 특유의 장황함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렇게 긴 분량의 책은 아니었으니 언젠가 다시 도전해봐야지. 그 책은 흥미롭긴 했어도 나는 보다 간결한 서술이 좋다.


  영어선생님은 자신이 우울할 때 집 안의 수도꼭지를 모두 열어버린다고 했다. 그리고 '와 집에서 물이 나와~'라고 말하면서 좋아한다고. 나는 결코 그렇게 한 적이 없다.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때 추가적인 잠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뭔가 부족했다. 나는 옷장에서 롱패딩을 꺼내 입고 거실에 누웠다. 날씨가 흐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부시지 않았다. 내가 여기에 글을 쓰지 않는 이상, 아무도 나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시야에는 천장과 거실등이 있었다. 바닥의 냉기가 다가왔으나 곧 이어 따뜻함이 내 몸을 채웠다. 나는 그 느낌이 좋았다.


(스포가 있다.)


 탑건: 매버릭

  : 주인공인 매버릭은 좌천당하는 대신 탑건의 교관이 되어 그들에게 주어진 불가능해보이는 임무를 성공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마하 10을 돌파하던 초음속비행기가 파괴되었을 때 관제소의 디스플레이가 암전되던데 현실성을 고려하면 '연결 끊김'이라는 메세지가 출력되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연결 끊김' 메세지에 이와 어울리는 아이콘을 추가할 수 있는 등 디자인적으로 상상력을 더 발휘할 수 있는 여지도 있으니 말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레이싱과 같은 타임어택 요소도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고안 된 하나의 게임 스테이지와 같은 인상을 준다. 나는 인터넷 스트리머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을 보는 듯한 체험을 했다. 액션 외의 요소는 주인공 주변의 드라마이다. 영화의 여러가지 갈등을 풀어나가는 열쇠의 방식은 확실히 마초적이다. 훈련생들간의 친목은 배구 게임으로 해결하고 사적인 골은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해결하며 어려운 임무의 성취를 위해서 훈련 단계에서의 안전을 위한 제약사항을 무시한다. 합리적이고 투박한 해법이다.


기생충

  : 성공에 대한 욕망은 수석으로 비유된다. 어떤 욕망이든 그렇겠지만 성공에 대한 집착은 목표를 성취하게 하는 순기능도 있겠지만 일단 여기에서는 합리적 사고를 방해한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기택이 박 사장을 죽이는 장면이 있다. 영화에서는 기택의 가족이 가난한 자로서 겪는 비참함이 묘사되고 있다. 침수된 자신들의 집과 문광 부부와 말 그대로 피를 튀기는 싸움을 한 것 등이 있다. 그들이 기생하기 위해서는 똑같은 처지의 가난한 자와 경쟁하지 않고서는 안된다. 이런 불합리로 인한 비참함이 기택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었고 그것이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느끼는 혐오에 반응하는 분노'를 일으키는 에너지가 되었다는 설명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아무튼 나는 이 영화가 빈부격차를 다룬 영화로서 클래식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냄새'와 같은 비유는 그럴싸하기만 할 뿐 이성적으로 와닫지 않는다. 물론 영화의 메세지에 치중한 이야기일 뿐이다. 미장센과 연출은 대중적이면서도 은근히 작가주의적이다. 영화의 많은 상징적인 장면들이 논리와 이성으로 재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이 작가주의적이다.


스즈메의 문단속

  : 일본은 재난의 나라인 것 같다. 자연환경에 산재되어 있는 재앙과 악귀들. 그리고 그것을 지켜내는 복잡한 장치와 수호자들이 있는 곳. 장치가 조금만이라도 어긋나면 곧바로 재앙이 닥치고 마는 무서운 곳이다. 온 열도가 금기다. 미미즈를 격파하고 나서 소나기가 내리고 오로라가 생기는 장면은 청량감이 느껴져서 좋았다. 소타가 책을 뒤질 때 요석의 위치가 시대에 따라 달라져왔음을 언급한다. 이를 연결지어보면 요석의 위치가 바뀌어야만 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스즈메가 요석을 들어올린 것은 우연이기는 하나 미미즈 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한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정론은 스즈메가 우연히 요석을 뽑은 결과로 도쿄의 유석도 자연적으로 뽑혔고, 이 둘을 다시 꽂음으로서 미미즈가 잠잠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을 따른다면 미미즈 발생의 책임이 스즈메한테 있게 된다는 점에서 내키지가 않는다. 그래서 마음대로 전자라고 생각해보고 있다. 신과 인간의 관계 또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고양이로 대표되는 신이 있다. 다이진이 트위터를 타고 화제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연출은 좀 요란해보인다. 이 장면은 일본인들이 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본래 따뜻함을 좋아하지만, 추운 것도 조금은 좋아한다. 어릴 적에 나는 추위를 많이 탔는데 따라서 그런 추위는 나의 어린 시절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나는 이 차가움의 '여왕'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망상을 하는 것도 좋아한다. 그렇게 때때로 나는 차가움의 근원이 의식이 있는 것으로 여길 때가 있다. 그저 상상일 뿐이지만.


  집 앞 슈퍼를 가는 길에 주차장에서 나는 이상한 음악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이상하다기 보다는 야외에서 드론, 앰비언트와 같은 장르의 음악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독특하게 쌓아올려진 사운드의 피치가 서서히 낮아졌다. 주차장의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가 아닌가 싶었다. 근데 보통은 주차장에서는 히사이시 조의 'Summer'의 피아노 편곡 버전이나 DJ 오카와리의 flower dance같은 음악이 나오는데 이런 난해한 전자음악을 틀어주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귀를 기울여보니 음악 소리는 이미 사라졌고 주차장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음악이 들려왔다. 반대편에서 오는 차의 불빛과 함께 말이다. 그건 자동차의 엔진소리였다. 아마도 하이브리드 혹은 전기차의 만들어진 엔진 사운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신디사이저의 패드 사운드를 연상시키는 그 소리가 점점 커졌다. 정체를 알고 난 후에도 나는 그것이 여전히 음악적으로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