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도 님의 소설<드래곤 라자>의 세계관을 씁니다. 

<그 계절을 기억하시나요?>와 이어집니다만, 읽지 않으셔도 크게 상관 없습니다.


바람이 선선해진 걸 보니 이제 가을이 왔나보네요. 가을이라, 제가 싫어하는 계절인데. 바이서스 사람들은 가을을 그렇게나 좋아하더군요? 마법의 가을이라나 뭐라나. 전 그런거 믿지 않아요. 제가 살던 일스에는 그런게 없었어요. 가을이라는 계절은, 그저 날씨가 추워져서 장사를 더 못하기 전에 서둘러 마지막 상행을 떠나는 때였어요. 이곳 바이서스에 와서 마법의 가을을 듣고 나서는 가을이 더 싫어졌어요. 사실 그렇잖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삶의 최고의 순간이 지나가 버린다니요. 너무 매정하지 않나요? 게다가 이때만 되면 괜히 마음이 붕 떠서 짜증나요. 그럴 때면 옛날, 중부대로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그 사랑이 생각나서. 아, 잠시 하녀장님이 찾으시네요. 조금 있다 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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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곳에 3년 전에 왔어요. 이 거대한 저택에서 일한지는 3달 정도 된 것 같네요. 아, 여기는 필립 폰 아도레우스 후작 각하의 저택이에요. 네.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그 분 맞아요. 바이서스의 지성. 일스의 저스티스 기사단을 움직인 남자. 헤게모니아의 부족이 대륙을 가로지르게 만든 남자. 자이펀의 학살자. 음.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까 엄청 무섭고 까다로운 사람인 것 같네요. 사람들은 제가 이곳에서 일한다고 하면 굉장히 대단한 사람인 것 마냥 쳐다보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요. 전속시녀의 입장에서 봤을 때(물론 들어와서 한 번도 실제로 뵌 적은 없지만) 주인님은 전혀 까다로우신 분이 아니거든요. 다만 특이한 점이 몇 가지 있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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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검소하세요. 이게 무슨 특징이야? 라고 하실만한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하여튼 그래요. 주인님의 집무실은 정말 아무것도 없어요. 책상, 의자, 서류더미. 그 외에는 찾아볼 수 없어요. 후작같은 고위 귀족이 왜 그러신지는 잘 모르겠어요. 두 번째는, 갈색 머리카락을 좋아하신다는 거에요. 이건 꽤 유명한 이야기죠? 그래서인지 제 동료들도 거의 대부분 갈색이에요. 하긴, 이게 아니었다면 보증인도 없는 저같은 평범한 여자애가 어떻게 이곳에서 일하겠어요? 마지막은 저택 안의 언덕에 통금이라 해야하나? 여하튼 그런 출입금지 시간이 있어요. 그 시간 외에는 자유롭게 올라갈 수 있지만요. 쓰다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내일은 처음 맞는 휴가 날인데. 뭘 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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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전 그냥 저택에 남기로 했어요. 다른 친구들은 옷을 산다, 카페에 간다고 야단이었지만 저는 그런데에는 관심이 없거든요. 그렇게 사람 많고 시끌시끌한 곳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도 이왕 휴가를 받은거 저택 안에만 있을 수는 없어서 그냥 저택 주변을 걸었어요. 정신을 차려보니까 동산 위더라고요. 슬슬 부는 바람이 시원하고 기분 좋아서, 저도 모르게 그냥 자버렸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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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춥다고 느꼈는지, 곤히 잠을 자던 여자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녀는 자신의 양 어깨에 걸쳐져 있는 코트를 보곤, 앞을 쳐다보았다.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저물어가는 햇빛이 빚은 그림자에 남자의 모습이 가려있었다. 그 코트가 남자의 것임을 어렵지 않게 추측하고는 여자는 입을 열었다.


코트,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잤어요.


남자는 뒤를 돈 상태로 말했다.


가을 풍경을 좋아하시나 보군요. 이 계절에 여기를 올라오는 사람은 잘 없는데.


그의 말에 그녀가 답했다.


아뇨, 싫어해요. 


남자가 물었다.


이유를 여쭤도 될까요?


여자가 답했다.


그냥, 흔한 이야기에요. 가을이 질때 쯤 첫사랑이 끝나버렸거든요. 그때 생각만 하면 아직도 그 애는 뭐하고 있을지 보고싶고 그립고 해서..


남자는 여전히 지는 해를 바라보며 말했다.


에스텔.


여자가 놀라 물었다.


어떻게 제 이름을?


남자가 비로소 뒤를 돌고 웃으며 말했다.


중부대로 근처에 멋진 가을이 있는데, 함께 찾으러 가시겠습니까?


여자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음을 띄며 끄덕였다.


눈이 온 세상을 덮어도 가을은 마법처럼 빛나길. 그들은 진심으로 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