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는 하늘을 우러러봤다. 
그의 복부 중앙에 뻥 뚤린 구멍처럼 탁 트인 하늘.
푸른 캔버스가 노을 빛을 받아 반짝였다.
샛 노란 태양이 지고 있는 중이었다. 

전사는 헛웃음을 뱉었다. 
짧다 짧은 숨소리에 온갖 감정이 뒤섞였다. 
그것들은 하나의 물음으로 축약될 수 있었다. 
인생의 끝자락에 선 전사는 든든한 동반자였던 부러진 검을 곧추 세우며 나직한 물음을 뱉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전사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짚었다. 
바닥에 핏물이 낭자했다. 
자신의 것도 많았지만 대다수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것이었다. 전사는 후회하지 않았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순간 모든 걸 놓아버릴 듯 싶었다. 

그래서일까. 아직도 죽지 못한 까닭은, 이토록 파렴치한 자신을 벌주고픈 넋들의 아우성 탓일지도. 

검사는 치솟은 회환을 입안에 고인 핏물과 함께 뱉었다. 부러진 검을 땅에 박고 안간힘을 써가며 허리를 반듯이 했다. 

복근의 인장력에 상처는 더욱 벌어져 선혈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거친 숨결을 연신 쏟아내며, 아찔한 정신을 특유의 아집으로 붙들어맸다. 노을을 받은 전사의 그림자가 서서히 길어졌다. 

탁. 오른발을 한발짝 딛고 그는 마침내 일어섰다. 일보 전진한 붉은 하늘이 황무지를 거세게 밀어냈다. 솜투성이 이불처럼 따스한 감촉. 은은하고도 강렬한 섬광이 전사를 한아름 품었을 때, 어디선가 나타난 손은 무너지기 시작한 남자의 상체를 부축했다. 

지면과의 입맞춤을 면한 전사는 고개를 힘없이 돌려 손의 주인을 바라봤다. 팔 한쪽을 상실한 여인이 슬픈 눈으로 그를 동정하고 있었다. 전사는 말문이 막혔다.

전사는 불완전한 이해를 혐오하여 대체로 자신을 향한 타인의 감상엔 무관심한 편이었다. 그것은 또한 그가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관계를 맺지 아니한다. 
욕을 얻어 먹을지언정 귀찮은 사건에 휘말리지 않는다. 오해를 풀 생각도 여유를 즐길 어력도 없는 남자가 버젓이 전사로만 남기 위한 발악. 

그를 부축한 여인은 평생의 발악 끝에 낳은 성과였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녀를 만난 날부터 남자는 자신의 소신에 예외 사항을 두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둘씩 늘어가는 편법의 서장은 항상 그녀의 이름으로 시작했다.

전사가 묻는다. 낡은 추억 속에 담아둔 물음이 현재와 겹쳐진다. 

"이리스, 어째서?"

그녀가 답했다.

"그냥. 이제 마지막 이니까요. 한번쯤은 이래도 괜찮지 않을까요?"

말을 끝맺치며 이리스는 살풋 웃었다. 
입술이 희미하게 경련했다. 창백한 안색. 
얼걸겁에 마주잡은 허리춤에서 진득한 진액이 배어나왔다. 전사는 이리스의 머리 너머를 바라봤다. 

"하아, 저나 당신이나 살아남긴 글렀네요."

그녀가 딛은 땅마다 둥근 열꽃이 피어있었다. 수백 송이는 우스울 정도로 가득한 꽃들은 저들끼리 모여 그녀만을 위한 길을 엮어낸 것이었다. 그것은 가시밭길이었다. 


죽음으로 향하는 가시밭길. 전사가 한탄했다.

"너도 참 기구한 운명이야."
"당신에 비하면 별건 아니지만요."
" . . .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지 뭐."
"하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으니까요. 지금 제 눈앞에 보이는 글러먹은 남자만 하더라도 십수년간 나라를 지켜온 보상으로 배 한가운데에 구멍이 뚤렸죠. 나참, 토사구팽이라니. 이래서 적당히 출세해야 한다니까요." 
" . . ." 

전사는 그녀의 말에 침묵했다. 나라를 지켰으니, 보상이니 하는 부분부터 되짚어 주고 싶었으나 그럴 여력이 없었다. 비약의 효력이 격감한 탓에 시야가 차츰 어지러워 지고 있었다. 마침 찬바람이 불어오니 저녁 한기가 폐부를 파고들었다. 두 사람의 몸이 느릿하게 식어갔다. 

그나마 기력이 남은 이리스가 말을 꺼냈다. 

"저희 . . . 좀 앉을까요?"
" . . . 그러자."

털썩. 두 남녀는 맨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리고 어린아이만한 바위에 등을 기댔다. 누가 뭐라 할 새도 없이,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깍지껴 잡았다. 일련의 과정에서 전사는 배덕감을 느꼈다. 여타 전사들과 달리 자신은 봄날 같은 위안 속에서 누군가와 함께 인생을 끝맺을 것 같아, 그것이 몹시 부끄러웠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이리스는 특별한 여자였다. 그녀가 웃으면 전사는 기뻤으며, 그녀가 밤새 울때면 전사는 슬퍼했다. 단지 그 뿐이었다. 

매마른 전사의 마음에 오아시스를 그려넣은 것은 이리스의 다정한 말, 약간의 투정과 장난, 해맑은 미소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손에서 피어오른 일말의 온기. 생물학적으로 신체 발열에 불과한 현상은 전사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도록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전사는 투구를 벗었다. 반쯤 눈이 감긴 이리스가 잠꼬대를 하듯 읖조렸다.

"얼굴 . . . 오랜만이네요."
"네 말대로 이제 마지막이니까 . . . 한번쯤은, 이래도 괜찮겠지."

이리스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누가 말하길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본성이 드러난다고 하죠. 물욕도, 신분도, 명예도 전부 무의미해지는 시점에서 드러난 절박함이 허장성세로 가득 찬 허물을 벗겨내는 순간. 그때만큼 사람이 무력한 순간은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지금만큼은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약해빠진 자들이군."
"통상적으로 보면 그렇다는거죠. 당신은 지금 이순간에도 적군 한명 정도는 순식간에 죽일테니까. 뭐, 예외로 치구요. 아무튼, 죽기 직전의 사람에게 질문을 던진다면 의외로 솔직한 답변을 얻을 수 있다네요. 취기로 사람을 죽였다는 둥, 부모님의 재산에 손을 댔다는 둥."
" . . . 예시가 하나같이 부정적이야."
"물론 긍정적인 것들도 많아요. 너를 용서했노라, 미안했다고 사과하거나, 혹은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있죠. 하지만 전 그것을 믿지 않는 편이네요."

이리스는 초연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해가 져문 하늘에 별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복잡한 가정사를 알고 있던 전사는 말없이 그녀를 다독였다. 여전히 서투른 전사라 손놀림은 어색하기 그지 없었지만, 이리스는 신경쓰지 않았다. 

바람 빠진 웃음을 분출한 그녀는 몸을 살짝 눕혀 전사와 몸을 밀착시켰다. 이윽고 작은 머리가 딱딱한 어깨에 닿았다. 말문이 트였다. 

"그런데 있잖아요 . . . 설명하긴 어렵지만 . . . 당신과 함께라면 간혹 그 헛소리를 믿게 될 때가 있어요. 혹시 당신은 그 이유를 아시나요?"

전사와 이리스의 시선이 만났다. 전사는 당혹스러운, 동시에 희미한 미소를 띄우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리스는 몸을 더 기울였다. 서로의 손이 교차하고 이마가 맛닿을때까지. 서로의 숨소리가 가까워졌을 무렵, 두 사람은 무언가 홀린 듯 고개를 비틀었다. 

이내 입술이 부딪쳤다.

두 사람은 망부석이 된 채 서로의 호흡을 공유했다. 꽤나 오랫동안 이어진 입맞춤은 이리스가 한차레 물러섬으로서 끝났다. 얼굴이 벌개진 그녀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던진 물음에 스스로 답했다. 

"이제 . . . 알겠네요.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그런 거였어."
" . . . "
"나는 당신을 믿었어요.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믿었어요. 그래서 - "

이리스가 말을 끝맽기도 전에 전사는 말없이 그녀를 껴안았다. 때문에 이리스는 전사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리스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 . . 울어요?"

전사는 울고 있었다. 탁한 눈동자에서 흘러나온 눈물은 아직 더럽혀지지 않아 순수했다. 그것은 전사의 볼을 타고 흘러내려 바닥과 조우해서야 비로소 더러워졌으니.한방울씩,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감에도 전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울지마요. "
"미안해. 내가 미안해."
"당신은 잘못한 것 없어요."
"나도, 너를 . . . "
"알아요."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전사의 눈이 커졌다. 그것도 잠시, 밤색 눈동자는 밤하늘을 밝히는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바닥에 고인 피웅덩이가 헌사로운 달무리를 반사했다. 고개 숙여 대지에 비친 하늘을 바라본 전사는 두어번 입술을 들썩이다가 쥐꼬리만한 용기를 짜내어, 저 달에 부끄럽지 않을 진심을 건냈다.

"사랑해."

이리스가 속삭였다.

"저도요."


두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는 바람을 타고 허공을 배회하다가 언덕 밑으로 사라졌다. 


대화는 더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 달달한거 적고 싶은데 자꾸 씁쓸한 것만 떠오르는 건 왜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