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라는 것은, 이를테면 무능한 직장 상사와 같습니다.

제대로 된 도움은 주지 못하고 허황된 말만 늘어놓으며 말하죠.


'나만 믿고 따라오면 언젠가 반드시 오늘날의 노력을 보상받을 거야'


가만 보면 그 말을 철썩같이 믿은 이는 물론이고 반신반의 하던 사람들도, 내심 불편해 하며 믿지 않는 사람들도

결국은 그의 인도에 따라 온갖 수모와 고난을 겪더군요.


땀을 뻘뻘 흘려가며 한껏 고생을 하고 있다보면 어느샌가 옷을 멀끔히 차려입은 사람이 하나 다가옵니다.

그리고는 제가 하고 있는 일을 유심히 살펴보며 몇 번 고개를 끄덕이기도, 턱을 흔들며 혀를 차기도 하더니 저를 나무랍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하고 있느냐고.


그가 현실입니다. 제가 따르는 방식이 비효율적이고, 생산적이지 못하다고 꾸짖지요.

누구에게 배웠기에 그리 하느냐고 다그치는 물음에 제가 저쪽을 살펴보니

꿈은 모른척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피우더랍니다.


그리고는 현실이 다시 떠나고서야 험험 헛기침을 하며 뒷짐을 지고 다가와 말합니다.

'그건 이렇게 하는 게 아니야. 내가 다시 가르쳐야겠구만.'

그가 시킨 방법과 현실이 일러준 방법의 바로 중간입니다.


저는 그때도 꿈을 믿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에 따라 모든 방식을 처음부터 바꾸고 다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허나 현실은 저를 한 번만 들여다 보지 않았습니다.


제 나이가 찰 수록, 시간이 저를 그 자리에 둔 채 무심히 나아감을 체감할 수록 빈번히 찾아와 저를 나무랍니다.


어느 순간 보니 그가 내 옆에 가만히 서서는 제가 하는 모든 일을 쳐다보더군요.

그때부터는 꾸지람도 없었습니다. 

사소한 실수나 습관, 자그마한 방종, 큰 실수와 실패를 맞닥뜨릴 때에도 조용히 혀를 찰 뿐이었습니다.

저의 모든 것을 책임져줄 듯 말하던 꿈은 엉거주춤하게 저 멀찍이 서서 머리를 긁적일 뿐입니다.


저는 그것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저의 실패가 그로 인해 비롯된 것만 같았지요.

그의 방식을 꾸짖는 현실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는 그의 태도가 싫었습니다.


혹시, 당신은 아직 견디고 계신지요?


당신도 저와 같다면 애도를 표합니다.

잠깐의 자유가 지나가고 나서야 저도 알았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떤 미래를 그려나갈 지 일러주는 사람이 꿈밖에 없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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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춥습니다. 속 안의, 갈비뼈가 드러나 보일 만큼 말라 비틀어진 제 노구를 숨길 만큼 옷을 켜켜이 껴입었음에도 

바깥의 두터운 코트를 지나, 누빈 조끼를 지나, 스웨터를 지나, 셔츠를 넘어 맞닿은 살갗은 제게 세상 밖이 차갑다고 말해줍니다.


저는 어제 직장을 잃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아니니 그렇게 연민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허나 누군가가 나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직면하는 것은 수십, 수백 번을 겪더라도 씁쓸하고 아픈 법입니다.


저는 그럼에도 오늘 밖으로 나섰습니다.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는 듯한 젊은이들의 힘찬 발걸음을 보는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예전엔 나도 저렇게 당당한 걸음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었을 때도 있었으나 지금은 아닙니다.


저도, 이 공원 벤치마다 한둘 씩 앉아있는 이들 모두 노인들입니다.

국가의 기금을 축내고, 생계 걱정 없이 지내며 가끔 나라의 소일거리나 돕는, 젊은이들에게 멸시와 동정을 한 몸에 받는 노인입니다.

이 공원의 벤치를 지킨지도 60년이 지났지요.

그동안 이 벤치는 나무였다가, 나무처럼 꾸민 플라스틱이었다가, 앉는 느낌이 편하게 움푹 패였다가(저는 이 때가 가장 좋았습니다.) 이제는 다시 나무로 변했습니다.

허나 벤치들이 놓인 자리만은 변하지 않았군요.


저기 분수대 건너편, 위로 벚나무 가지가 길게 뻗어있는 벤치가 보이십니까?

예전에는 금슬좋은 노부부가 앉아있던 자리였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보여도 봄날에 꽃이 피면 늘어진 나뭇가지가 하늘을 드리우고 바람이 불 땐 꽃이 잔뜩 휘날려 아주 낭만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허나 이제 그 자리는 비어있습니다. 노부부가 떠난 이후로 몇 번 주인이 바뀌더니 20년 전부터는 누구도 앉지 않았습니다.


그런 자리가 이 공원에 가득합니다. 이사를 간 이들도 있을테고 공원에 앉아있는 것이 지겨워진 이들도 있겠지요.

모든 이들이 그렇기를 소망합니다. 그렇지 않은 이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인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죽는다는 말은 어느 순간부터 사람에게 붙이기엔 생소한 말이 됐습니다. 늙는다는 말도 똑같습니다.

제 나이가 백이십이니 사십 년 전부터 그랬습니다. 과학이 이루어낸 성과입니다.

물론 죽고 늙는다는 개념이 사라지진 않았습니다. 당장 가축만 해도 늙고, 죽습니다.


그렇기에 늙은 우리는 저기 젊은이들보단 가축에 가깝습니다. 젊음이 돌아올 수 있다는 헛된 믿음에 수십 년을 기다리다 결국은 사라지고 맙니다.

이제는 우리를 위해 연구를 해주는 과학자들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저 일도 않고 세금을 축내는 우리를 향한 멸시와 동정, 그리고 모른척 외면하다 

노년의 사망이 나라의 복지수준을 논하는 척도가 되자 돌변한 국가의 참견 많은 감시자들 뿐입니다.


오늘은 벤치에서 일어나 가만히 공원을 구석구석 돌아다녀 보았습니다.

주인이 바뀐 자리도, 사라진 자리도 많이 보입니다.

예전에는 사라진 이들을 안타까워 하였으나 지금은 그저 부러워 하게 됐습니다.


해가 바뀌며 제가 정한 목표는, 올해 반드시 목숨을 끊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저는 세상에서 사라지기로 결심했습니다.

우스운 말이지만, 성공을 빌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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