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뜬 내게 보이는 건 흰 공간이었다. 그건 항상 그곳에 있고, 그 안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공간에는 문도, 창문도, 의자도, 심지어는 바닥이라는 개념조차도 없어서, 공간이라기보다는 ‘빛’이라는 개념을 구체화한 무언가처럼 느껴지곤 했다. 길고 긴 암흑의 터널을 지나 마침내 빠져나왔을 때의, 망막을 가득 채우는 그 섬광을 상상해 보라. 대략 그런 느낌의 장소다. 오직 그녀만이 무릎을 세우고 앉아 팔로 다리를 감싸 안고서는 벽에 기대어 있었다. 그 쓸쓸한 곳에 있는 것은 그녀뿐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곳에는 바닥도 벽도 없기에 ‘앉다’나 ‘기대다’ 따위의 표현은 적절치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는 빛 위에 앉아 있었고 그 광선들의 집합에 기대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알고 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내 귀빈이었고, 또 불청객이기도 했으며, 한때는 나의 일부였다. 마른 체형, 큼직한 잿빛 티셔츠를 입고 있고, 길고 검은 머리칼이 드러난다. 하의도, 신발도 없다. 그 흐릿한 눈과 가끔 보여주는 옅은 미소, 그리고 예의 티셔츠만이 그녀를 구성하는 전부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그녀에게 가볍게 인사했지만 그녀는 나를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며 그 이상의 반응을 보여 주지 않았다.
 

손님이 왔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 쓸쓸한 공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와 그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형태를 갖춘 관념과 정동의 집합체로서 그 장소에서 마주했을 뿐이다. 그녀와의 해후는 그 아무것도 없는 공간의 서늘한 침묵을 한층 더 견디기 어려운 것으로 만들었고, 나는 그 고요를 깨지 않을 수 없었다.
 

“시스투스에 대해 알아?” 나는 말을 건넸다. 굳이 그런 주제를 꺼낸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해야만 했던 말들이 아주 많았지만 결국 전할 수 있었던 건 단 하나도 없었다. 비틀린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건 대수술이다. 환부를 째고 고름을 빼내고 바늘로 꿰뚫는 일은 내게는 항상 버거운 일이었고, 그렇기에 내 목청에서 나올 수 있었던 건 추상적이고 애매모호한 비유들로 점철된 시시한 꽃 이야기가 전부였다.
 

“응?”
 

“시스투스 알비두스, 꽃 이름이야. 들어본 적 있어?”
 

“아니.” 그녀의 단호하고 명확한 대답만이 빈 방을 채웠다. 그녀는 항상 그랬다. 망설임이 결여된 그 말투는 나를 항상 혼란에 빠트렸다. 그것이 화제에 대한 무관심의 표현인지, 그게 아니라면 그저 단순한 사실 전달일 뿐이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잠깐의 침묵.
 

“…자살하는 꽃으로 알려져 있어. 발화점이 아주 낮아서 온도가 조금만 높아도 타면서 죽어 버려. 그리고는 주변의 모든 걸 재로 만들어 버린대. 꽃말은 임박한 죽음.”
 

“엄청 멋지다.” 그녀의 감상은 비록 짧긴 했지만 순수한 감탄을 담고 있었다.
 

“응, 모든 걸 붉게 물들이며 죽어버린다는 점에서 황혼과도 비슷하다고 생각했어. 다시 돌아온다는 점에서도 황혼과 같지. 오늘의 태양이 죽고 내일 새로이 나타나듯이, 그 식물은 죽기 전 불에 견딜 수 있는 씨앗을 남기고 재를 양분으로 해서 다시 태어나.” 나는 그 때묻지 않은 감탄에 전율하면서도 쓸데없고 장황한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신기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어딘가의 황혼과 그 방화범의 공통성에 대해 그녀 나름대로 느끼는 바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조금 긴 침묵, 숨소리와 심장박동이 고막을 가격한다. 흰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것들을 제외하고는 그 무엇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나에게서 시선을 돌려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산 같은 건 없다. 그녀는 그녀 안의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건 내게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의 내가 그녀와 공유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고독이었다.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었음에도 사과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용서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포옹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으며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통렬한 고요만이 그 두 머저리들 사이에서 흰 공간을 이루는 분자 하나하나를 꿰뚫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기만이야.” 적막을 깨뜨린 건 이번에도 나였다.
 

“무슨 의미야?” 사색을 방해받은 그녀가 내 눈을 마주보며 설명을 요구했다. 그 떨리는 목소리는 호수의 파문을 연상시켰다. 내가 던진 돌은 나를 들여다보는 두 검고 흐린 호수를 물결치게 했고, 나는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야기를 이어 나가야만 했다.
 

“애초에 그건 자살하는 꽃이 아니야. 그야, 씨앗을 남기잖아? 그건 그냥 자신에게 헌신하는 주변 이들을 파멸로 이끄는 비루한 무언가일 뿐이야. 어린 왕자의 노력도 그 꽃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지.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바람막이를 세워 주어도 결국 불타버리고 말아. 그 가엾은 별은 그의 심장과 함께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릴 테고 말이야. 불쌍한 어린 왕자.”


 “…” 그녀는 입을 닫고 다리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한국에서 시스투스의 꽃말이 ‘인기’라는 건 상징성이 있지. 황혼처럼 숭고하게만 보이는 그 꽃의 죽음은 사실 양분을 얻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해. 기만이야.”
 

“…”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세상에는 시스투스가 너무 많다는 거야.”
 

“…”


 시체는 말이 없다.
 

나는 부끄럽게도 그녀에게 화가 나 있었고, 그걸 스스로 깨달았을 때 그녀는 이미 내 마음속에서 죽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