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다. 왼손으로 커터 칼을 들고 오른팔을 그었다.

 오른손 잡이가 오른팔을 긋는 건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왼팔이 아닌 오른팔을 긋는 게 더 이상적이라 생각한다. 

생각해 보아라 오른팔을 그었다는 건 '오른팔을 가리고 다니겠다'라는 뜻이다. 만약 당신이라면 주로 사용하는 팔을 가리는 게 나을까 그게 아닌 게 나을까? 

한여름에도 반팔을 포기한다는 선택지를 고르면 팔을 가리지 않을 땐 자의적인 상황보다는 타의적인 상황이 많을 것이다. 

예를 들어볼까. 그래 만약 당신이 병원에서 주사를 맞는다고 치자. 주사는 주로 사용하는 팔이 아닌 반대 팔에 맞는 게 일반적인 상황 아닌가? 당신이 여기서 굳이 주된 팔에 맞겠다면 왼팔을 그어도 되겠지만, 난 일반적인 사람을 연기하고 싶었다. 

상처를 들키고 싶단 생각은 한 적 없다. 상처를 들킨다면 그 시점부턴 난 일반적인 사람으로 보일 수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평범한 사람 행세를 하는 사람이 어쩌다 팔을 긋고 있는 것일까? 팔에 상처 따위 없다면 오른팔을 그을지 왼팔을 그을지 따위의 생각 따윈 아무래도 좋지 않은가. 


스스로가 미운 적 있나? 아니면 누구에게 위로받고 싶은 적 있나? 그것도 아니라면 스스로를 사랑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싶은 적은? 자해라는 건 스스로 스스로를 상처 입힌다는 뜻이다. 곧 스스로에게 내리는 벌 아니겠는가. 

참 간단한 일 아닌가? 손을 조금 움직인 것만으로 스스로에게 벌을 준다는 것. 아아 사실 벌이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그래그래 중요한 건 여기부터다.

벌을 끝마친다면 자유다. 그래 난 오른팔에 죄를 내리고 자유를 얻은 것이다.

그것이 진실된 죄는 아닐 수 있다. 사회적으로 합의된 죄는 아니라는 걸 안다. 하지만 스스로 그것이 마치 죄같이 느껴진다면 스스로 벌을 받아야지 않겠는가? 

긋는다는 행위로 간단히 자신을 용서할 수 있다. 이건 나의 최선의 선이다.


사실 그것보다도 하고 싶은 것이 있다. 죽고 싶다. 

모두가 살면서 단 한 번은 머릿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실현시켜보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당신은 어쩌다 '죽고 싶다'라는 문장을 꺼냈는가? 

죽음을 가정했을 때 당신은 무엇을 느꼈나?

참 상상만으로도 달콤한 이야기 아닌가. 죽음을 가정했을 때의 감정, 난 그 감정을 쾌락이라 부르고 싶다. 물론 쾌락만을 느낀 건 아니다. 어쩔 때는 끝이나 고통의 두려움, 남은 자에게의 미안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감정이란 순간적인 것 아닌가. 쾌락도 두려움도 미안함도 전부 상상하던 나의 순간적인 감정이다.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하는 법은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 것이다. 난 몇 년간 죽음을 가정하고 느낄 감정을 상상했다. 대부분의 결과는 쾌락이었고, 쾌락을 느끼지 못했을 땐 삶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죽음의 두려움이 삶 그 자체의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을 경험한 나는 두려움을 후회하기로 했다. 쾌락을 선택하고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이것이 내가 죽음을 원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