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신이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 대해 딱히 생각이랄 것을 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이루는 행위가 세상에 대하여 그리 중요하다고는 보기 힘들었으니까. 그저 쉬이 뒤집어댈 수 있는, 그에게는 그런 발걸음이었다.

새벽녘은 아니지만, 흰구름이 짙게 올라 햇빛을 막아 거리는 잠시 어둑하다. 가로등은 아직 켜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동요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에게 동요라면야, 초가을에나 어울릴 법한 옷을 입고선 첫눈이 순풍을 타고 흘러내리는 초겨울에 길거리로 나선 그 자신이지 않을까.그가 그것을 직감할 때즈음, 그러니까 이미 대현관에서 우측으로 백수십 걸음을 걸어나왔을 때 구름더미를 지긋이 올려다보는 그의 콧잔등에 눈송이 하나가 살포시 미끄럼을 탄다. 안광에 비치는 것은 엷은 빛깔을 띠는 꽃꿀이요, 순백으로 반짝이는 설탕이다. 그 반짝임에 매료되어 혀라도 맞대보았으나 감초는 없고, 아스라이 저릿한 오한만이 혓대에 돟게 스민다.

혓대에서 뿌리를 내린 한기는 울대를 타고 폐로 퍼지고서, 산소에 얼겨붙은 냉매가 손발과 사지말단으로 비행한다. 콧속을 연백의 분말이 뒤찍어 그는 겨우내 가벼이 기침하게 된다. 안광 또한 가벼이 떨리운다. 희풀러진 의안에는 같이 희푸른 말투를 더해 옷소매로 살며시 닦아 낸다. 참으로 싸늘한 나날이 아닐 수 없으나, 아직은 탈출하여 걸음한 적이 없다. 첫발에서는 눈이 밟히며 내지르는 소금빛 향이 울린다. 종소리처럼 청명하길 기대해본 적은 없었다. 둘쨋발이고 셋쨋발이고, 무언가 달라질 것도 없었다. 눈길은 흑색 도로를 얕게 분칠해댄다. 아지라이 넓게 지나간 곰보자국들은 언젠가 덮이리라, 백색의 도화지에 점지어 이은 흑색 두 줄의 점선도 언젠가 덮여 스러지리라. 그러나 들리운 것은 차분한 눈밭 소리와 소박한 밑창소리이다.

길거리에는 무늬가 존재했던 적이 있었나- 광장에 갈 때면 원형으로 이어진 줄들을 따라 한 바퀴, 회돌아 한 바퀴 뒤집어 돌거나 했던 적은 있었으나, 작다란 거리거리마다 무슨 무늬와 향취를 지니었는지까지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현재에서 바닥을 내려다봤자 텅스텐빛 카펱이 느긋이 내려앉은 상황에 별다른 무늬를 기대할 수도 없었으니 딱히 상관 말고 멀리 발을 뻗어 거닐기나 하는 것이 나았겠다. 그럼에도 그는 굳이 형태감을 직관하겠답시고는 전후방이 아닌, 좌우로 천천히 발을 끌어대며 쓸레질이나 하고 있었다. 어둑한 시야에 오한이 스미는 시간을 알아차린 때즈음에야 급박히 뒤돌아 쓸린 거리를 바라봤으나, 어느샌가 다시 소복이 덮인 이불이 조소하는 듯하다. 바랏빛을 내뿜는 천정은 차치하고서, 도로 도로를 거닐기 시작할 때쯤 흙에 무심히 걸터앉은 파편에 걸어, 몸체를 갸우뚱대며 우스꽝스러이 밑을 짚었다. 치욕스럽다 느낄 만도 했는데, 그나마 주변에 쥐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꺼진 차체를 되밀어올리는 짓거리를 되짚고 싶지는 않겠으니 조심할 필요성은 다분하다.

잡다한 생각은 뇌속을 흔들어 댄다. 요새의 세계지리라던지, 누군가의 일탈에서 비롯된 수필이라던지, 군중이 일어낸 파랑이라던지 하는 소음들은 어디서 들려오는가?  손바닥 안에서 뒤집기 쉬운 문장들이 쏜아져 흘러내린다. 그럼에도 딱히 주울 필요성은 없어 보인다. 사실성과도 현재성과도 무관한 줄글을 끌어올리는 미련한 짓은 됐고, 그저 한 줌 집어 우물대는 것이 차라리 대략 근사하리라. 다만 이를 씹어삼키고는 자랑인 양 어슬렁어슬렁 떠들어대는 조잡한 무리를 주시할 때면 조소가 턱밑으로 차오르기는 한다. 큰 소리로 웄지는 않았으나, 대부분이 아는 것을 모르는 기분을 도리어 모르겠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족속들은 누군가를 지나쳐 팔자걸음으로 내뺀다.

수천 걸음쯤 걸어야 겨우내 도착한 분기점에는 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다. 은행과 은행과 은행 사이의 찹쌀나무, 방울맺은 가지 끝에서 한 알을 떼내선 데려간다. 자박대는 발걸음 소리가 풍경을 덧칠한다. 차로 너머로 선명하게 비치는 저곳은 무엇인가, 우측으로 뻗은 팔에 맞받아치는 오돌대는 벽면에 그려진 풍경화의 원본은 어디일까, 중요친 않는 자그마한 상상들을 머리에 뿌려두면 싹을 틔울 듯도 하다. 그런 잡다한 내지는 조잡한 씨앗들은 벽면이 끝났다는 사실로 갈아내졌다. 그러나 벽면과 도로가 상호연결된 존재는 아니어서, 얼마간은 발자국을 새기며 걸음하게 되었다. 물론 더할 나위 없이 지루함으로 점철된 연속적 진행이었다.

몽롱한 기분을 깨부순 순간은 보도블럭이 시멘트 밑으로 기어들어간 곳이었다. 차로의 반대 방향으로 안구를 틀자 보이는 것은 백록색 산등성이요, 작다란 나무집 하나였다. 빈방이나 마찬가지라는 듯이, 튀어나온 천장에선 널따란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오늘과 참으로 근사하다. 시멘트를 거슬러 십수 걸음쯤 오르면, 노송의 무리가 홀로 들어온 것을 주시하고 있다. 흙색의 샛길은 그 사이에서 명랑히 손님에게 인사한다. 딱히 초대장은 없었으나 반기는 방향으로는 가보고 싶기도 했다. 뭉쳐진 송은 그리 문제될 것이 없었으나 가파를 경사를 거스르는 등의 무언가 새로운 행위에 도전하기란 여린 심장을 지니고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고, 또한 흑청색의 구름덩이가 가슴에 대고 울어 아파오는 것을 어쩌지는 못하여 일탈의 거리는 이 지점에서 잔향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조금이나마 거슬러 올라왔으나 미끄러지듯이 하향하는 것이 썰매를 타는 듯이 매끄럽다. 거친 질감의 상승과는 또 다른 표현성이 감긴다. 미약히 메아리치는 새소리를 뒤로 하고 다시금 저벅대는 눈밭을 들으며 서서히 뒷걸음질치게 된다. 그럼에도 뒷편에 눈이 달려 있으며, 발목과 관절도 뒤집혀 있으니 다행일까.

다시 돌아가는 길에서 마주친 벽면은 마치 거울상처럼 비슷하지만, 또 거울상처럼 사뭇 차이가 많다. 바깥에 있었던 간판은 어떻지? 거울상인지 아닌지 딱히 중요한 일이지는 아니하였으나 되돌아가는 길에 이런 늦은 상상이라도 꺼지게 된다면 뵐 것이 있었는지가 무긋이 궁금도 하다. 특별할 것 없는 나날들이었던 시간에 한 획을 그어내 건지, 수십 획을 칠해낸 건지, 판을 찢어댄 건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한 가지 다행으로 여길 만한 점은 입가에 묻은 은은한 잔향이 앞으로 그가 거닐 도로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웃으며 떠들어댈 수 있는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리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