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전선에서만 30만 명이 넘게 죽었네. 단 12km에서 말이야. 서기장 동무는 3개월 안에 우리 군이 적의 심장에 깃발을 꽂길 원하시네."

쌀쌀한 1월의 바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간헐적으로 깜빡이는 백열전구는 방을 암흑과 빛으로 계속해서 교차시켰다. 챙 달린 모자에 별이 달린 중년의 남성, 짧은 흠- 기침소리.

"하지만..."

"동무의 심정을 내 모르는 바 아니야. 하지만 '서기장 동무'가 원한다고 했네. 더 말은 안할 테니 가보게."


빛나는 대리석의 국가안보총국 건물은 휘황찬란하게 도시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심정을 모르는 게 아니라니... 단호했던 마지막 말의 일부를 로베르트는 곱씹었다. 특히나 추웠던 -이 동네에서는 이럴 때 늘 '위원회 건립 이후 처음으로'라는 말을 이때 쓴다.- 그 달의 바람이 얼굴을 베는 듯했다. 갈색의 한 줄 코트를 로베르트는 더욱 동여맸다. 코트의 목 부분에 간신히 달려있는 붉은 별과 벼 이삭의 조그마한 훈장이 달그락거리는 것 같았다.

"반갑습니다, 동무. 혹시 안토노프 기념역까지 모셔다 드릴까요?"

추위에 빨갛게 달아있는 코를 슥슥 닦고는 마부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마차를 천천히 멈추었다.

"싼 값에 말입니다, 동무. 이런 시기에는 특히 더 군인 동무들이 우대를 받아야 합죠."

"고맙습니다."

로베르트는 신음소리와도 같은 괴로운 외마디 소리를 내며 다 헤진 시트가 깔린 마차의 의자에 앉았다. 바로 앞에 마부가 보이는 열린 형식의 마차였다. 어렸을 때 본 닫힌 형태의 마차는... 로베르트는 이제는 사라진 닫힌 형태의 마차를 떠올리면서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안보총국 건물로 들어갈 때의 긴장감을 떨쳐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전선에서 오시는가 봅니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늙수그레한 -50대는 이미 족히 넘었을- 마부가 털모자를 더욱 눌러쓰고는 이리야- 소리를 치며 물었다. 바람소리 때문인지 더욱 크게 울리며 퍼졌다.

"예."

"제 아들래미도 군인으로 징병돼서 복무 중입니다. 동부로 갔는데, 요즘은 통 소식이 없어서... 애비, 에미 마음은 아는지... 어렸을 때부터 강인한 녀석이라 잘 해내서 오리라 믿습니다."

로베르트는 코트를 더욱 동여맸다. 마치 쥐구멍으로 파고 들어가는 쥐새끼의 형상처럼, 로베르트의 목은 더욱 짧아졌다. 마부 동무, 만약에 아드님이 전선에서 죽었다면... 지금쯤 군해사 위원회의 동무들이 귀찮은 듯이 휘갈겨 쓴 편지를 당신의 집으로 보냈을 것이오. 대충 귀하의 아들 안토노프, 혹은 바실리, 혹은 루벤토프는 인민을 위해서 장렬히... 에헤이, 어허, 몇 번의 기합 소리와 함께 조금 갑작스러웠던 제동, 로베르트는 뒤통수를 맞은 듯이 앞으로 약간 쏠려 움직였다.

"도착했습니다, 동무. 24 크라운인데... 20크라운만 주십시오."

"받으십시오."

로베르트는 얄팍한 주머니에서 5 크라운 동전 5개를 꺼내 마부의 손에 얹어주었다. 마부는 손사레를 치며 동전 하나를 로베르트에게 계속 밀어댔다.

"1 크라운은 호의에 대한 웃돈입니다. 부디 아들이 몸 성히 오길 바라겠습니다, 동무."


안토노프 기념역은 제9 분기 징병으로 인해 사람들이 북적북적했다. 영화처럼 -'애타는 꺼먹연기'라는 영화처럼- 손수건을 흔들며 눈물을 훔치는 여인들, 근엄한 표정과 걱정스러운 표정이 교차하는 아버지들의 얼굴부터 동네 꼬마 아이들의 군인들을 보는 신기한 눈까지... 동부전선으로 가는 열차는 이미 새까만 연기를 뿜어대며 대기하고 있었다. 로베르트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다. 뇌를 파고드는 옛 기억들, 살을 에는 바람의 동부전선 참호, 포격의 진동으로 흙먼지를 털어내는 야전사령부, 흔들리는 몸뚱아리...

"12시 25분 열차, 타스케스켄행 열차 곧 출발합니다! 질서를 지켜서 들어와주십시오!"

아직은 앳되어 보이는 청년들은 창문에 옹기종기 모여 긴장감과 흥분이 뒤섞인 표정을 한 채 가족들에게 손을 쭉 뻗고는 흔들어 제끼고 있었다. 로베르트는 길지는 않은 대기줄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 역무원에게 중앙노동당 배지를 보여주었다.

"정치장교 동무, 확인 됐습니다. 노동당 번영하라."

"노동당 번영하라."

먼지가 약간 묻은 새까만 제복에 모자를 오른손에 든, 수염이 거뭇거뭇한 역무원은 배지를 대충 확인하고는 빠른 동작으로 경례를 끝마쳤다. 로베르트는 들릴 듯 말 듯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경례를 하고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로베르트는 빛 바랜 시트가 깔린 딱딱한 의자에 피곤한 듯 주저앉았다. 기차는 만석이었고, 청년들과 군 병원에서 복귀하는 병사들은 나무 널빤지를 덧대놓은 것 같은 못 미더운 바닥에 모여 앉아 있었다. 보라색 포격에 날아간 한 청년의 다리, 끔찍한 비명과 더 소름 돋는 고요, 그리고 천지를 뒤덮는 고함소리와 총성...

"장교 동무, 정말 미안합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철조망에 걸려 찢어진 청년의 바지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금발과 푸른 눈의 청년은 나에게 그렇게 나지막이 빌고 또 빌었다. 이런 역할에는 -악역?- 정치장교가 제격이지. 차갑디 차가운 권총, 손은 온 핏줄을 세우고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상급자의 광기 어린 고함소리. 로베르트는 자신의 권총을 꺼내 자기 입에 넣어 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손은 또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날의 전선에서처럼.

"동무, 괜찮으십니까?"

창틀로는 동부 전선과 가장 가까운 도시의 풍경이 비치고 있었다. 도시에서 한 번 정차하고, 좀 더 앞의 전선 간이역까지 장병들이 탄 열차는 달리리라.

"예, 현기증이 좀..."

로베르트는 약간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오른쪽에는 자신이 권총으로 분명히 죽인, 전선에서 이탈했던 젊은 청년이 시퍼런 피부로, 배시시 웃으면서 말을 걸고 있었다. 팔은 어디에다가 놓고 온 건가? 악마와 거래를 했는가? 청년의 오른쪽 팔은 온데간데 없었고, 검붉은 피만이 쏟아지고 있었다.

"동무, 정말로 괜찮으십니까?"

로베르트는 이것이 환상임을, 자신이 정상이 아님을 계속해서 인지하려고 애썼다. 로베르트의 쉴 새 없이 진동하는 오른팔은 자신도 모르게 권총으로 향하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자, 기차 밖 오색의 가을 풍경이 그 날의 동부 전선으로 바뀌어 있었다. 정상이 아니군, 정상이 아니야.

"또 총에 의존하시는군요."

나는, 그 때 안 쏠 수 없었네. 내가 무슨 힘이 있겠나? 미안하네. 로베르트는 한 마디도 소리내어 이야기 할 수 없었다. 로베르트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

정적 속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리,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들...

"동무! 진정하십시오! 동무! 정신차리십시오."

역에서 보았던 그 역무원이 로베르트에게 천천히 다가오며 소리치고 있었다. 아까까지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던 장병들은 모두 로베르트를 경계하며 거리를 두고는 한 쪽에 몰려 있었다. 로베르트는 자신의 입에 양손으로 권총을 쑤셔넣고 있었다.


그 날, 로베르트는 동부 전선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다음 날, 참호에서 갑자기 일어나, 머리를 저격당해 죽었다. 군해사 위원회는 그의 집으로,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 동생 하나가 사는 집으로 편지를 한 장 발송했다. 그 편지는 '로베르트 동무는 당과 인민을 위해 장렬히...'로 시작하는 편지였다. 어머니의 곡소리와 왜인지 모르고 그저 따라서 우는 어린 동생의 목소리가 공허한 집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