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가우가, 상남자, 삽화 안 쓴다.
순챈 대회 출품작.
딱히 원본이랑 달라진 부분은 없음.
단순 백업용도.

*


방학.


휴양을 핑계 삼아 이곳저곳 청춘을 꽃피우는 학생들.


동기들과 달리 한 남자는 일에 치일 운명이었다.



[아버지가 위태로우시다.]



지원을 부른 어머니의 편지였다.



[안 속습니다 이젠.]


[며칠 전에 정말로 쓰러지셨는 걸.

큰 병일지도 모르겠구나.]



남자는 철썩같이 어머니의 말을 믿었으나

"이제 왔냐? 이따 장기라도 한판하자."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그를 반길 뿐이었다.



"감기래도 쓰러진 건 쓰러진 게지."



어머니의 천연덕스러움에 남자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부르신 이유는 역시 '그거' 입니까?"


"잘 아는구나."



'그거' .


남자의 집의 가업이다.


어머니는 남자를 한사코 재촉했다.



"네가 물려받아야 아버지도 안심하지 않겠니."


"안 한다니깐요."


"장군 받아라 아들."



꼭 남의 얘기인 것처럼, 아버지는 남자와의 장기에 더 몰두하였다.


옆에선 어머니와 남자가 실랑이를 벌이는데도.



"매정한 말 말아라. 아버지는 요새 감도 다 떨어지셨는데."


"나는 그릇이 안된다니까요."


"장군 받으라니까."


"너 학과선택도 가업 도우려고 고른 거 아니었니?"


"그렇긴 하지만... 아니 엄마가 내 전공을 어떻게 알아요?"


"아들아 장군!"


"느이 누나가 가르쳐줬다.

처음에야 어찌 사람 부끄럽게 그런 걸 고르나 싶었지."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전 재밌게 수업 듣고 있는데."


"아들아?"


"그래, 지금은 가문의 피가 들끓어 고른 선택이겠거니 한다."



뭇 심각한 이야기에 가장 먼저 지친 이는 아버지였다.


남자의 부친은 토라지며 한숨 쉬었다.



"허어, 장기 두는 사람 어디로 갔나."


"여보도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난 가업보다 장기가 더 중요해."



남자의 어머니는 그 말에 이마를 탁 짚고는 물러가버렸다.


"아이고 이 놈의 영감탱이를 정말." 이라 궁시렁거리면서.



"여전하시네요."


"칭찬이냐?"



남자는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는 아버지와의 장기에 집중하였다.



"판세는 대강 정리된 거 같구나, 네 생각은 어떠냐?"



한창 장기를 두다가 그제서야 아버지가 물었다.



"판세요? 10수 정도 걸리면 외통나겠네요.

제가 이긴 거 같은데."


"에헤이, 그것 말고 이 녀석아. 이겼다고 놀리냐?"



아버지가 악의 없는 농담을 던진 것이었다.


평소 아버지의 짓궃음을 잘 알고 있던 남자는 딱히 놀라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장기를 이어두었다.



"뭘 말씀하시려 했는데요?"


"가업 말이다."


"변덕도 여전하시군요.

방금은 신경 안 쓴다고 하셨잖아요."


"방금은 한창 두던 중이었으니까 그렇지. 지금은 거의 끝나가잖냐."


"아... 예."



남자가 헛웃음을 지었다.



"일단은 느이 엄마 말이 맞다. 내가 요새 감이 안 따라오더라."


"어떤 감이요?"


"녀석두, 알면서.

눈치나... 국면을 읽어들이는 감 말이다."


"'센스' 말이군요"



남자의 가업은, 말하자면 참모이다.


모시는 주군의 마음을 헤아리고 주군이 이끄는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그런 참모에게 있어서 센스가 떨어진다는 건 좋지 않은 징조였다.



"판세도 봐라. 내가 지고 있잖냐."


"그 말씀하려고 져주신 게 아니고요?"


"난 전력으로 뒀다."



남자의 예상보다 아버지는 약해져 있었다.


신체가 병약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참모로서의 능력은 약해져있었다.



"전쟁사 전공이었다면서?"


"그거랑 물 마법이랑. 복수 전공이었죠."


"어쨌건 너도 가업 이을 생각이 있던 게 아니냐?"



부부는 닮는다고, 꼭 제 부인과 같은 말을 하는 남자의 부친.


아버지의 말에 남자는 망설이다 털어놓았다.



"참모란 건 좋습니다.

받들 보람이 있는 이를 모시고 여러가지 일을 추진하고.

싸움이라도 일어나면 더 적은 사상자를 내고자 전략이란 걸 짜고.

저도 한때 홀딱 반해버렸으니까요."


"네 피에도 참모의 피가 있는 게다."


"그럴 지도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평범한 참모가 아니잖습니까."



참모에도 급이 있다.


이곳저곳을 떠돌며 받들 주군을 찾는 건 신출내기들.


남자의 가문은 그보단 고급진 '참모' 가문이었다.



"제가 가업을 잇는다고 하면 영주님 직속으로 들어가게 되잖아요."



권력가들의 곁에 대대손손 붙어 전략을 짜주는 이들.


남자의 가문은 대대로 그런 가문이었다.



"권력에 아첨하는 기분이라 싫더냐?"


"권력에 아첨하는 것보다도 영주님에게 아첨하는 기분이라 싫습니다."


"무슨 의미더냐?"


"영주님, 그 영감탱이 마음에 안 든다고요."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면 안 되지."


"영감님은 성격도 별로지 않습니까."


"... 그야 그렇지만."


"장군 받으세요."



끄응- 하며 남자의 아버지가 고심했다.


묘수를 고민하는 것인지, 아니면 남자를 꼬드길 명분을 고심하는 것인지.


한동안 신음만 하다가 아버지가 입을 뗐다.



"참, 영주님 바뀌었는데."


"예?"


"이제 영감탱이 아니라고."


"그럼 지금 영주가 설마."


"그래."



타악-.


남자의 아버지가 차를 버려 장군을 끊어냈다.


묘수였다.



"전 영주님 딸. 네 첫사랑이다."


"으으음."



*




첫 출근은 기대감과 긴장감이 어울려 놀기 마련이다.


남자의 경우엔 더욱 그러했다.



"왔구나!"



호화로운 저택에서 여성이 튀어나왔다.


연보라색 머리에 160 언저리의 신장.


뒷머리에 묶어둔 큰 리본을 제외한 복장은 무척 서민적이었다.


아름다웠지만 높으신 몸이라곤 믿기 어려운 복식.


남자의 옛 친구였다.


선대의 뒤를 이어 새로 취임한 영주였다.



"오랜만이네! 초등학교 졸업하고 처음인가?"



'서로 가업을 이어받는다면 언젠가는 주군과 신하가 될 게다.'


그럴 싸한 이유를 핑계로 남자는 어릴 적 휴일을 여성과 함께 보내곤 했다.


남자가 착잡한 심정으로 답했다.



"중학교부턴 서로 바빠서 뵙질 못하겠으니까요.

오늘부터 아버지를 대신해 주군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아저씨는 안 오는 거야?"


"오늘부로 은퇴할 거라며 안부만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그래?"



실로 남자의 아버지다운 처사였기에 여자도 그에 대해선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왠 존댓말이야? 편하게 말해."


"괜찮습니다 주군."


"옛날 우리 둘이서 놀 때처럼 편하게 해도 되는데."


"전 경어가 더 편합니다 주군."



남자에게도 속셈이 있어 존대하는 것이었지만 여자가 남자의 속내를 알 터가 있나.


여자는 약이 오를 뿐이었다.


"그렇게 나온단 거지?" 라며 여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알량하고 사소한 전쟁의 효시였다.



"아침입니다 주군."



참모라고 전략만 짜는 게 아니다.


... 사실 맞을 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남자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아. 재정난이라고 메이드를 잘랐다는 데 이런 얘기였구나."



광활한 저택에 시종이 없으니 참모가 시종 노릇도 해야 하는 법이렸다.


여자를 흔들어 깨우며 남자가 투덜거렸다.


잠자는 주군은 측근의 부름에 눈을 살포시 떴다.


남자가 먼저 아침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주군."


"좋은 아침."



여자가 누운 채로 남자를 끌어안았다.


남자는 서 있는 상태였던지라 남자의 허리에 매달린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었다.


남자가 기겁을 했다.



"주군 뭡니까 이게!"


"'뭐' 라니, 주군의 팔이잖아. 무례하게."


"누가 그걸 몰라서 물었습니까? 팔 치우세요!"


"싫은데."



여자가 남자의 허리를 당겼다.


서로의 몸이 밀착되었다.



"일단 침대에서 일어나세요 주군. 제 허리도 좀 놓으시고!"


"이불 밖은 추워. 싫어."


"이제 여름인데 춥기는 뭐가 추워요!"


"나 따뜻하게 업어주면 일어날게."



뻔뻔스런 얼굴로 여자가 주장했다.



"담요라도 두르고 걸으시면 되지 않습니까!"


"얘는, 여름에 누가 담요를 쓰니?"



요지부동.


이 주군 똥고집이 대단했다.


결국 남자는 눈을 질끈 감고 여자를 업어야 했다.



"아유 우리 참모님 등짝 넓기도 해라."


"시승감 평가하지 마세요."



남자가 신음하며 말했다.


여자가 키득거렸다.



"이러니까 우리 어릴 때 생각난다.

예전에 네가 자주 어부바 해줬는데."


"그때-."



'그때나 지금이나 남 골리기엔 선수로군요.'


남자가 말을 입 안으로 씹어삼켰다.



"'그때' 뭐? 왜 말을 하다 말아?"


"그때 일은 기억이 안 난다고요. 어렸을 때라."



여자는 얼마나 섭섭하겠는가.


과거에 흠모하던 남자와 재회한 기쁨도 잠시, 한사코 남자는 과거를 부정하려 드는데.


어릴 적처럼 친근하게 굴면 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게 여자의 심산이었다.


... 물론 단순히 이성으로서 꼬시고 싶은 마음도 존재했지만.


하나 남자도 입장이 난처한 따름이었다.



'아들아 참모란 게 뭐더냐.'


'주군이 가고파하시는 길을 깨끗하게 닦아두는 일이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면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답이다.'


'틀린 것입니까?'


'참모라면 우선은, 주군의 길이 옳은 길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참모는 주군과 가까우면서도 또한 멀어야 한다.'



언젠가 남자가 만취한 아버지에게 들은 말이었다.


여성에 대한 마음이야 남자도 깊었지만서도

주군과 신하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여서야 아니된단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기억 안 난다고? 그렇게 많이 업어줬는데?"


"안 납니다. 팔도 저려오니 슬슬 내려오시죠."



남자의 포커페이스가 붕괴되기 직전에 이르러서야 그녀는 등에서 내려왔다.


남자는 안심했지만 안타깝게도 전쟁은 아직 시작도 안된 터였다.



"앗 뜨거!"



여자가 손을 감싸쥐었다.


남자가 스프를 덜던 중 한방울이 튀어서였다.


직전까지 열정적으로 제 몸을 불태우던 스프였다.


남자가 당황하며 품에서 티슈를 꺼냈다.



"괜찮으십니까 주군?"


"그냥 놀란 거야. 별로 안 다쳤...."



남자의 손을 밀어내다 말고 여자가 말을 멈추었다.


여자가 이리저리 눈을 굴리고 말했다.



"아야야! 아파서 손을 못 쓰겠네."



여자가 스푼을 내려놓았다.


스프 그릇 위에 짤랑 소리가 얹어졌다.



"숟가락질도 못하겠어. 너무 아프다."


"네?"


"누가 먹여주지 않으려나 아야야."



그녀가 연보라빛 장발을 흔들며 남자를 재촉했다.


남자는 속으로 그런 그녀를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런 짓 못합니다."


"왜?"



여자의 질문에 남자가 입을 닫았다.


그 모습을 본 여자가 입을 삐죽이며 달갑잖은 타령을 했다.



"너무 아프네. 아이고 영주 죽는다.

누가 영주 손에 이리 뜨거운 걸 묻혀두었담!"



남자에겐, 여자의 엄살을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매정히 대하는 법에 익숙치 않았다.


독하게 굴고야 싶어도.


받아주는 수 밖에는 없었다.



"아... 하십쇼."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남자가 한스푼 두스푼 여자에게 스프를 떠먹였다.


여자의 의기양양한 얼굴관 대조적이었다.



"맛있다. 네가 떠먹여주니까 더 맛있는 거 같네!"



여자가 해맑게 남자의 속을 긁었다.



"허어... 그러십니까."


"헤헤. 나 어릴 적 앓아누웠던 때 생각나네. 기억 나?"


"기억 안 납니다."


"왜, 닭죽만 일주일인가 먹은 적 있잖아."


"닭죽이 아니라 버섯죽이었겠죠."



남자는 말을 맺고서야 실수를 깨달았다.


여자가 배시시 웃고 있었다.



"역시 기억 안 납니다. 다른 사람이랑 착각한 것 같네요."



남자가 어물쩍 넘어가며 반격의 칼을 갈았다.


반격은 고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거 전부 처리하셔야 합니다."



살인적인 말을, 남자는 고했다.



"오늘 안에요."



두팔로 한아름 안고도 아직 한 덩이가 더 있는 서류.


총알도 막을 두께를 자랑하는 서류 뭉치에 여자는 경악했다.



"이걸 다?"


"네. 전부."


"나한테 한 맺힌 거 아니야? 평소보다 많은 거 같은데?"


"아버지가 제게 인수인계 하신 것도 몇개 있으니까요."



요컨대 평소에 처리 못했던 것도 꺼내왔단 말이었다.


여자는 일감이 많다는 둥 도장만 찍자니 몸이 쑤신다는 둥 칭얼거렸다.



"어찌하길 바라십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응?"


"안 됩니다. 내일은 내일의 서류가 뜨는 법입니다."


"그럼 몸이라도 편하게 있을래."



여자의 요청을 듣고 남자가 궁리하였다.


한번 집무실을 나간 남자는 작은 탁자를 2개 들고 돌아왔다.



"바닥에 앉아서 하시죠. 다리라도 편하게."


"왜 2개야?"


"저도 업무가 있으니까요. 감독만 할 순 없죠."



여자가 그 말에 신나서 눈을 빛냈다.


남자도 바보는 아니다.


일련의 일에서 배운 점이 있으니.


남자는 불안해하며 물었다.



"또 뭔가 하실 생각입니까 영주님?"


"서류 작업 할 건데요."



메롱-.


여자가 혀를 내밀고 시치미를 뗐다.


불안한들 어쩌랴.


모르쇠로 일관하는데.


남자도 한숨 한번 내쉬고 자리에 앉았다.


집중하여 한동안 서류를 건드리다 보니 남자의 등에 묵직한 무게감이 전해졌다.


묵직하고 적당히 따뜻한.


남자가 뒤를 돌아보니 여자의 등이었다.


어느새엔가 등을 맞대고 기대고 있던 것이었다.



"주군. 무겁습니다 주군."



여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넌지시 고개만 돌려 확인하니 여자는 졸고 있었다.


새근새근 숨소리가 소꿉친구의 귀엔 달콤하게 들렸다.


꾸벅꾸벅 조는 여자의 얼굴은 티 없이 맑아, 깨우기엔 거부감이 들 정도였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셨군그래."



허, 참-.


남자가 이마를 짚었다.



"담요라도 가져올까."



남자는 망설였으나 곧바로 포기했다.


옛 일이 떠올라서였다.



"하하, 영주 됐다기에 긴장했더니 하나도 변한 게 없네."



남자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린 시절의 여자는 소꿉친구인 남자의 등에 기대어 낮잠을 자곤 했다.


그럴 때면 남자는 몸놀림에 신중을 기했다.


여자의 잠을 굳이 깨우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남자가 서류 정리를 재개했다.


등은, 그대로 여자를 위한 나무그늘이 된 상태로.



*



"왔구나! 오늘은 뭐하고 놀래?"



연보라빛 머리의 어린 소녀가 제 또래의 소년을 반겼다.


소년은 딱히 생각해둔 것이 없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소녀는 그럼이라며 말을 꺼냈다.



"꽃왕관 만들어보자. 서로 씌워주게."


"그거 여자애들 하는 거잖아."


"그래도 너랑 같이 하고 싶다구."



밤도 안 떴는데 소녀의 눈엔 별이 한가득이었다.


소년이 약간 붉어진 얼굴을 서투르게 돌렸다.



"나, 나는 만드는 방법도 몰라."


"괜찮아! 내가 알려줄게."



꼬물꼬물.


두 아이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서로 몸을 붙이고 만들다가 소녀가 소년에게 완전히 몸을 기대었다.


소녀는 그대로 소년의 등에 의지해 잠에 빠져들었다.



"뭐야, 자잖아."



생애 처음으로 꽃 왕관을 만들어낸 소년은 그제서야 소녀의 상태를 눈치챘다.


소년은 음- 하고 고민하다가 왕관을 소녀에게 씌웠다.


꽃왕관을 얹은 소녀를 보고 걸작이라는 듯, 소년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예쁘다. 엄청 예뻐!"



한 영주와 그녀의 측근의 추억 한 송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