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아침밥을 먹으며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좋아하는 감자채 볶음, 뚝배기 계란찜, 소고기국.

감자채 볶음은 내가 특히 좋아하는 반찬중 하나이다.




친구들은 아는가?

지식의 정의가 바뀌었다.


기존의 지식이라 함은,

대학에 들어가고, 강의를 수강하고, 책을 읽어서 얻는,

일종의 특권이었다.


그러나 어떤가?

우리는 지금 손에 든 기기 하나만 있으면,

전 세계 석학의 지식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런 인스턴트 지식이라 할지라도,

대화에서는 좋은 감미료가 되는 법이다.



나의 인스턴트 지식을 어머니께 뽐내자,

어머니는 재능에 대해 얘기하셨다.


내가 유년 시절에 얼마나 시인이었는지,

한글은 얼마나 빨리 떼었는지 하는 둥의 얘기 말이다.




잠깐 고등학생 시절로 넘어가 보자.


나는 친구가 적었다.

책을 읽었다.

1년에 100권씩 3년 동안.


왓챠피디아에 기록해 둔 정보이니 정확할 것이다.


국어공부 없이 늘 1등급을 받았다.

나는 그것이 책을 읽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어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초등학교 1학년 시절, 

나의 받아쓰기 점수는 30점이었다.


어머니의 애정 덕분이었으리라.



내가 태어나고 침대맡에서,

어머니는 매일 동화책을 2권씩 읽어주셨다.


그리고 ㄱㄴㄷ을 배우기 전에 

나는 문장을 읽기 시작했다.


같은 과정을 겪은 형과는 대조적이었다.


내가 받아쓰기로 30점을 받은 이유이다

그것이 왜 분해되어야 하는지조차 몰랐기 때문에.



그 이야기는 나의 인스턴트 지식 중 하나를 소환하였다.


"자식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행위에,"

"언어적 지식 주입은 크지 않다."

"안전한 환경, 온전한 애정, 함께하는 시간이 중요할 뿐."


나는 감사드렸다.

그것은 분명히 나라는 인간에게 유의미한 시간이었다.


자신에게도 유의미한 시간이었다고, 당신은 말씀하셨다.

내가 이유를 묻자, 어머니의 눈은 물기를 머금었다.



어머니는 동화책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조부모는 가난했고, 가난은 시간과 애정을 좀먹었다.



나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왜 동화책이 아직 버려지지 않았는지.

유용을 잃고 낡았음에도 왜 집의 한켠을 차지하는지.


그것은 나의 동화책이었지만,

동시에 어머니의 동화책이었다.



물기는 전염되고 강이되어 흘렀다.

나는 어머니를, 어린 어머니를 껴안아 주고 싶어졌다.


"엄마는 열심히 살았구나.

"엄마는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구나."

"나는 엄마가 우리 엄마라서 너무 좋아."


어머니의 작은 등을 두드리며,

내가 가진 것과 가지지 않은 것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분명 많이 가진 사람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