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이 물러서니, 기적이 행해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물 위를 걷고있으니. 벼락조차 무시한채 물위를 걷고있다. 


그때 물속에서 무언가가 솟아나왔다. 거대한 해룡이였다. 해저화산의 불꽃을 먹으면서 살아가는 이 고생물은 오늘 마침 피와 살이 고픈 참이였다. 그리고 고생물의 눈앞에는 어떻게 한건지는 몰라도 물위를 걷는 두 사람이 있었다. 먹지 않을 이유 어디 있으랴?. 그리고 그런 괴물이 득실거리는 바다를 걸어서 이동하는 이 둘을 비웃지 않아야하는 이유 어디있으랴?


하지만,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는다는 무모한 선택을 했음에도 사람들이 비웃지 않은 이유가 어디있을까?. 


두가지다. 하나는 성공했기때문에, 그리고 또 하나는 그럴 능력이 있었으니까


"피냄새는..신경쓰지마. 빗물이..대신 씻겨줄테니까.. "


"..굳이 곤죽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요? "


"친구..빈..그였다면 아마.. 이렇게,말했을거야.. "


보라색 머리의 소녀는 금색 눈동자를 보이면서 말했다.


"순리...였다고"


***


흑암장벽. 아리아 대륙 전체를 보호하는 거대한 장벽. 높이로는 구름너머로까지 솟아났고, 땅 한뼘은 커녕 암초조차 밖으로 드러내지 않은 거대한 장벽. 밖에서는 절대로 안쪽을 알수없는 그 장벽을 우린 넘어야했다. 


하지만 정작 보고나니 그렇게 떨리진 않았다. 생긴게 생각보다 멀쩡한 탓인걸까. 마법으로 만들어진 장벽이라길래 난또 벽에서 머리가 솟아난다거나, 눈이 달려있다거나, 사악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거나 하는줄 알았다. 그냥 무식하게 크고 넓고 높은 장벽일뿐이다. 내가 이쪽 관련으로 아는게 많은건 아니지만, 이렇게 폐쇄적이고 거대한 장벽을 만들면서 고작 수문 하나만 입구로 만들어놓은건 분명 지들끼리 자급자족 충분히 가능하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일것이다.


뭐 그렇다. 그냥 장벽이였다. 떨리지도 않는다. 내 옆에있는 기사녀석이 떨고있을뿐.


"프랑. 괜찮은거야?. 니 팔 엄청 떨고있잖아. 무슨 수전증도 아니고"


"..지금부턴 작전시간이니, 본명보단 코드네임으로 불러주세요 감독관..그리고 괜찮습니다. 추워서 떠는것뿐입니다"


"춥다기보단 공포에 질린듯한 얼굴인데. 사람마다 다르긴 한데 그게 추워서 짓는 표정은 아니지 않아? "


"그냥..괜찮아요. 전, 진짜로. 전 진짜로 괜찮습니다. 어서 들어가요"


같은말을 계속 반복하는 인도자 듀란달. 가여움마저 느껴질 지경이다. 그녀는 아리아 대륙 출신이다. 즉 고향일텐데, 고향에 대한 반응이 이러니, 대체 여기서 뭘 하면서 살아온거지?. 뭔짓을 당했길래 이런 반응을 보이는걸까?. 속으로 곱씹으면서 마침내 아리아의 유일한 문. 브로켄의 수문앞에 도착했다. 예리아가 앞으로 나섰다. 오른손의 장갑을 벗으면서


"스톱. 일단 말이라도 걸어본뒤에 부수자"


"전해받은 정보가 거짓이 아니라면, 안쪽상황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로 분류될정도일텐데?. 아저씨 너무 순진해"


"그래도 일단, 말이라도 걸어보자. 안에 사람이 있으면 좀 뻘줌해지잖아"


예리아 아니, 인도자 리독스는 인도자 블루아케인을 바라봤다. 블루아케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예리아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뒷걸음쳤다. 나는 확성기를 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거 들리십니까?. 우린 마법연맹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아리아 대륙 내부 상황을 확인하려고 왔습니다!. 수문좀 열어주시지요!. 이미 사전에 통보를 보냈을겁니다! "


그러자 벽이 크게 진동하더니 흡사 괴물이 내지르는것같은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수문앞의 바다는 이상하리만큼 잔잔한데, 그 너머의 바다는 폭풍이 불고 있었다.


"..브로켄의 악마.. "


프랑이 중얼거린다. 아마 이 한숨소리의 주인인가보다. 대화할 상대가 있다는 사실은 다행이긴 한데 저쪽이 거부할경우또한 상정해야했다. 다행히도 난 이미 우릴 반드시 들여야되는 이유를 만들어놓았다.


"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열지 않을것이다. 우린 통보를 거절했고, 너흰 듣지 않았다. 나는 여제와 쇄국의 맹세를 걸었거늘, 내가 왜 너희를 들여야되는거지? "


"아. 그거야 간단해. 우릴, 그러니까 정확히는 날 안들여보내면 넌 여제의 명을 거역하게 되는거니까"


무겁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맙소사. 이녀석 빡쳤다. 자신이 여제의 명을 거역했다는 사실 자체를 용납못하는 녀석임이 틀림없다. 물론 융통성이 없는 놈하고 대화해봤자 시간낭비라는건 알고있지만, 여기서는 최대한 싸우는 일이 없는게 차라리 낫다.


"무슨 소리를 하는거지? "


"간단해. 내가 아리아 여제 얼굴에다가 상처를 냈거든.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해야해서"


이번에는 진노의 함성소리가 들려온다. 잔잔했던 수문앞 물살이 요동치고 있다. 벽에 붉은빛의 선들이 새겨지고 이내 거대한 마법진을 형성했다. 내가 도서관에서 마법을 좀 배운게 있어서 저 마법진의 문양 배열이 어떤건지는 어느정도 예상할수 있었다. 이 미친 벽새끼는 바로앞에다가 핵을 떨굴 작정인가보다.


"네이-. 잠깐만.... "


겁나 큰 목소리를 내지르려던 장벽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더니 마법진을 지웠다. 물살도 잔잔해지고, 목소리에는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처리할 범위를 넘어섰군. 옥체를 해한 자와 제국의 배신자가 같이 있다니"


벽에 눈이 달린건 아니였지만, 벽이 바라보는 대상이 무엇인진 알것같았다. 나만 느끼는게 아닌건지, 프랑역시 보이지 않는 시선을 느끼며 검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운 숨을 내쉬면서 인도자 듀란달은 언제든 공격할 준비를 마쳤다. 배신자, 그 명칭은 프랑이 어째서 아리아를 떠났는지알려주는 단어였다.


"수문을 열어주마. 하지만 명심하거라. 아리아는 이미 멸망했다. 나조차 등불이 보지 못했다. 아리아는 멸망했다. 난 단지 잔재를 지킬 망령일 뿐이다"


프랑의 동공이 흔들린다. 그리고 나역시 흔들릴수밖에 없었다. 수문이 열리자 보이는건 작은 성 하나와, 그 너머에 보이는 불타는 산맥. 하늘에서 떨어지는중인 거대한 무언가였다. 고요한 바람소리는 커녕 소름끼치는 웃음소리만이 들려왔다.


마경이다. 멸망을 넘어서 마경으로 변했다. 예전의 아리아의 풍경이 어땠는지는 몰라도, 이 풍경은 멀쩡한 나라의 풍경은 아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뭐야.. "


프랑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뭐가..뭐가 바뀐건데. "


"프랑? "


"대체 뭐가 바뀐건데!! "


진짜 처음으로 이녀석이 이렇게나 큰 소리로 고함을 치는걸 봤다. 그렇게 한번 소리치고 나니 바닥만 바라보면서 뭐라 계속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참 웃긴게, 이녀석 말하는걸 보니 여기도 정상은 아닌가 싶었다. 이래서 내가 대려오고 싶지 않았는데.나는 다른 두 인도자를 불렀다.


"인도자 블루아케인, 인도자 리독스. 주변 정찰좀 부탁- "


"이미 다 끝났습니다"


"아니 시발 언제부터? "


"수문 열었을때부터 날아가서 둘러보고 왔는데? "


"그리고 확인결과, 이 땅에서는 소형 위성을 띄울수 없는것같습니다. 위치를 확인할수 없습니다"


역시나, 이 땅을 가리는건 거대한 장벽뿐만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막이 우릴 막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는걸, 위치를 확인하는걸. 도서관에서 몰래 가져온 전송장치가 작동은 커녕 불빛조차 나질 않는다. 녹스 그인간이 삼중으로 쳐놓은 대마법진도 뚫을수 있다고 자랑했던 장치인데도!. 그만큼 이 땅에 펼쳐진 거대한 막은 너무나도 두껍고 강력했다. 우리가 모르는 방식을 썼거나, 아니면 진짜 무식하게 마력을 쏟아부었거나. 어느쪽이든간에 지금 바로 해결할 방법은 없다.


수문을 열자마자 거대한 강줄기가 보였고 그 강줄기 중간에 하중도가 있었다. 우린 지금 그 하중도 위에 있다. 강 건너편의 성은 석조건축인 반면에 하중도의 건물들은 모두 목조였다. 왜 따로 만든건지 의문을 품었지만 강줄기를 따라 세워진 성벽과 포문을 보면서 나는 그렇게나 오싹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 하중도는 유사시 완전히 파괴될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걸 위해 건물까지 목조로 만들었음을.


"프랑. 너 여기가 어딘지 알지? "


나는 고개를 돌려 프랑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참동안 숨을 내쉬던 프랑은 일어섰다. 손은 더이상 떨지 않았다. 잠깐동안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브로켄 공국. 아리아 제국을 섬기는 제후국들중 하나에요. 브로켄 수문을 지키는 의무를 부여받아서 타국의 외교관들을 아리아 내로 들이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


"제후국? "


"알아두는게 좋아요. 아리아 전역을 여제가 통치하는게 아니니까요. 아리아의 백성들은 오랜시간동안 유지된 낙인에 따라 혈족이 나뉘는데 각자의 개성이 너무 뚜렷해서 둘 이상의 혈족이 같은 나라를 이룬적이 단 한번도 없어요. 여제께서는 수도성인 골렘성과 그 주변땅만을 직접적으로 통치하고 그 외의 땅들은 각 혈족들이 알아서 다스리도록 내버려뒀어요. 대신 혈족들로부터 충성을 보장받았죠."


"전제군주제인줄 알았는데, 이거 완전 봉건제잖아. 근데 강대국 노릇이 가능하다고?. 제후국중 하나가 배째라 누우면 아무것도 못하는거 아니야? "


"그야 제후국들은 되도록이면 여제님 말을 들으려고 하기 때문이지"


익숙한 목소리. 들어봤던 목소리다. 전에 어디서 한번 만난적 있는 목소리인데. 뒤돌아보니 딱 알아보겠더라. 검은색 제복, 보라색으로 빛나는 검, 주변에 떨어지는 검은 깃털들.


"오랜만이군 신승우"


"어...이름이 뭐였지? "


"카라스. 카라스 제독이다. 뭐 여기서는 브로켄 대공이지만"


"아 맞다. 당신 아리아 출신이였지?. 지금 여기 상황이 어떤진 알고 있어? "


"알다마다. 개판중의 개판이지. 개판이 선녀처럼 보이는 개판이다만...잠깐만. "


브로켄의 대공, 문지기 카라스가 검을 뽑아들었다. 몸에서 검은색 까마귀의 형상을 한 영혼체들이 튀어나오더니 주변의 자라있는 나무 줄기에 앉았다. 까마귀들과 카라스 모두 한사람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왜 흑암혈족이 브로켄의 영지에 있는거지?. 내 분명히 얼어죽을 니켈 혈족과 정신나간 흑암 혈족은 들이지 말라고 했을텐데. "


"브로켄 혈족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네요. 다른 혈족에게 예의도 없는 족속들"


"예의와 충성심에 목을 매달고 다니는 너희 한심한 기사들보다는 낫지 않나?. "


프랑. 인도자 듀란달이 칼을 뽑아들고 빠른속도로 돌진했다. 카라스는 검을 뽑아 막아내고는 뒷걸음쳤다. 나무에 앉아있던 까마귀들이 총알같이 빠른 속도로 듀란달의 몸을 관통했다. 땅에 피가 번졌다.


"하!. 이게 바로 마법이란거다 이 기사도에 미친-"


그순간 이제서야 나타나는거라는듯이 카라스의 몸에 거대한 상처와 함께 피가 솟구쳐나왔다. 왼팔이 떨어져나갔지만 카라스는 여유로운 표졍이였다. 그것은 복부가 뚫려 창자가 흘러나온 듀란달도 마찬가지였다. 둘이 다시 검을 뽑아든다. 아마 둘중 하나가 죽기전까지는 멈추지 않을것이다.


그리고 그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상황이다. 지들 꼴리는대로 싸움 거는것


"블루아케인, 리독스. 둘다 조져"


그순간 듀란달이 이마를 집으며 무릎을 꿇었다. 카라스의 경우 서있는 땅이 갑자기 액체로 변해 땅속으로 떨어졌다. 나는 무릎을 꿇은 듀란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순간 눈앞의 시야가 마치 지지직거리는 tv화면처럼 변했다. 황급히 손을 때니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런 원리였구나. "


블루아케인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듀란달에게 다가갔다. 손짓하더니 듀란달이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날 보더니 다시 고개를 떨궜다. 뭐하자는거야?.


"왜. 자기가 사소한 이유로 생사결단을 내렸던게 그렇게도 쪽팔려? "


"내가 하고싶은 말이군!. 역시 흑암놈들은- "


"그쪽때문에 벌어졌으니까 아가리좀 닥치지 그래?. 리독스, 저새끼좀 꺼내줘라"


"알아서 빠져나왔는데? "


다시 돌아보자 카라스가 멀쩡히 서있었다. 물론 몸 곳곳에 보라색 균열이 가있긴 하지만 아마 브로켄 혈족의 능력때문일것이다. 난 한숨을 쉬었다. 아직 제대로 진입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싸움이 일어나다니. 심지어 신뢰를 얻었다고 생각하던 프랑이 멋대로 칼을 휘둘렀다. 마틴도 대려올껄 그랬나 생각이 들었다.


"뭐. 이야기를 이어야겠군. 자네 말대로 이 땅의 통치체계는 전제군주제는 커녕 중앙집권조차 되있지 않지만, 실질적으로는 여제의 힘이 매우 막강하네. 따지고보면 외줄타기와 다를게 없어. 골렘성이 마음만 먹으면 아리아내의 모든 제후국들을 찍어누를수 있을정도로 힘이 막강하니까"


"그러니까 통치체계가 이렇게 된건 그냥 순전히 그 여제라는 인간이 방치해놓기 때문이라는거지? "


"맞아. 직접적인 통치를 할 힘은 있지만, 그러질 않는거지. 각 혈족들간의 개성과 의식이 뚜렷하고 서로 이잡듯이 잡아대니 그냥 따로따로 살게 놔둔거야. 하지만 각 제후국들 입장에서도 골렘성과의 교류, 그리고 의견 전달이 필요하기 때문에 각 제후국들이 선제후를 선출해서 골렘성으로 보내지. 근데 지금 골렘성에 접근도 불가능하고 선제후들과 연락도 닿지 않아서 이모양 이꼴이 난거야"


"골렘성에 접근할수 없다고요? "


프랑이 고개를 들면서 말했다. 왜 약간의 안도감이 느껴지는걸까. 골렘성에 가기 싫었던걸까.


"말 그대로다. 거대한 검은안개가 골렘성을 감쌌다. 말 그대로 골렘성만. 아리아 내의 원로격 위치인 얼론 혈족은 현재 아리아에 있는지조차 알수없는 상황이고. 골렘성과 가장 가까운 새력들중 남은건 카스트룸과 흑천사-둔클라 혈족뿐이다. 나머지 혈족들은 목줄을 쥐고 있던 여제가 사라지자마자 각자도생중이고. "


"대체 무슨 각자도생을 하길래 나라가 개판이 된건데? "


"아리아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익숙한 방법이지. 자네라면 잘 알텐데 배신자? "


카라스는 프랑을 가리키며 말했다. 프랑은 다시 검을 집으려고 했으나 날 보고는 한숨을 내쉬면서 칼을 내려놓았다. 물론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혹시나 눈에서 빔이 나오지는 않을까. 그런 어이없는 생각도 해봤다.


"전쟁"


"끝없는 전쟁이지. 아리아가 쇄국하는 이유중 하나이기도 하고. 아리아는 전쟁을 일상처럼 여기고, 아리아의 백성들은 전쟁을 유희처럼 여긴다. 솔직히 나도 딱히 상황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중이고. 아마 여기로 대피를 온 타 혈족의 난민들도 나랑 똑같은 심정일껄?. "


"아니 그럼 지들 땅에서 싸울것이지 왜 피난을 왔는데? "


"저 벽 안쪽에서 무기 챙기는 소리 안들리더냐?. 내 공국을 지들 무기고처럼 여기는거같더만. 뭐 틀린말도 아니긴 하지만"


갑갑하다. 이 대륙이 이렇게까지 막나가는 땅인줄 몰랐다. 아마 여기서 마주하는 일들을 곱게 해결할 경우는 없을것같았다. 설사 그 모든 상황들을 해쳐나가도 여제를 만날수 있을지는 알수 없다. 


갑갑하다


"난 여제를 만나러 여기까지 온건데. 만날수가 없다고? "


"그래. 만날수 없다. 여기 있어봤자 목적을 이룰수 없을거 같은데, 이만 돌아가는게 좋을거야"


"그럼 이건 뭔데? "


난 블루아케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블루아케인은 무엇인지 안다는듯 태블릿에서 종이를 뽑아 나에게 줬다. 난 그 종이를 카라스에게 건내줬고 카라스의 얼굴이 사색이 되는걸 볼수 있었다. 어지간히 충격을 먹은건지 입에 물고있던 시가도 떨어뜨렸다. 


"그런 표정으로 날 보고있다고 해도 난 전혀 알수가 없어. 설명을 해봐. 뭔가 알고있어?"


"어디서 났지? "


"아리아에서 날아오던데?. 전단 뿌리듯이"


"이 종이는 골렘성에서만 생산되는 종이다. 눈썰미 좋은 사람들한테만 겨우겨우 보이는 이 뭣같은 무늬가 그 증거다. 그들은 모든 자원들을 직접 생산하지 절대로 제후국들에게 의존하지 않아. 반대로 제후국들 역시 골렘성의 자원을 얻을수 없고. 이건 골렘성에서 만들어진 전단이 틀림없다. 지옥?, 이계의 침략자?. 골렘성이 아직 남아있지만 현재 침략을 받고 있다고? "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위험한거잖아. 설마 그것때문에 거대한 안개를 퍼트려놓은건가?. 외부침략자가 골렘성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


"그렇게 해야할정도로 그 외부 침략자가 강력한거겠지. 골렘성이 무너진다면 다른 제후국들도 무너질수밖에 없다. 그러니 안개를 돌파해서 골렘성 선에서 막을수밖에 없어. "


카라스가 종이를 내동댕이 쳤다. 그가 칼을 뽑아들자 몸에서 까마귀형상의 영혼체들이 빠져나왔다.


"군웅할거할 시간이 없다!. 날 도와줘라!. 이 사실을 아리아 전역에 알려야 한다!. 난 카스트룸, 둔클라, 니켈쪽을 가겠다. 너희들에게 나머지를 부탁한다"


"걱정마. 우리도 여기서 해야할 일이 있으니까. 우린 지금부터 두 팀으로 나뉜다. 리독스와 블루아케인, 나와 듀란달. 우린 어디로 가지? "


"아리아에는 수많은 혈족들이 존재하지만,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는 대상들은 강대한 혈족들이다. 울르, 흑암, 봉화, 아사, 잔, 사탑, 엘모- "


"사탑 혈족은 불가능합니다. 현재 단돌로 제도는 유령도시화 했습니다"


블루아케인이 화면을 띄웠다. 여전히 보라색 안개로 자욱한 텅빈 도시였다. 사람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카라스는 지겹다는듯 중얼거렸다.


"또 자기들끼리 무언가를 꾸미고 있군.. 그럼 사탑을 뺀 나머지를 부탁하지"


"좋아. 울르, 잔, 엘모는 블루아케인이랑 리독스 맡아. 봉화, 흑암은 우리가 맡을게"


"알겠습니다. 감독관. 가자 리독스. "


"알겠어. 몸조심해 감독관~. 조심하지 않으면 팔을 분질러버릴거야~ "


노이즈가 끼면서 두 사람이 사라졌다. 팔을 분질러 버리겠다니, 참 섬뜩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나. 카라스는 거대한 까마귀 영혼체 위에 올라탔다.


"행운을 빌도록하지. 그리고 도와줘서 고맙다. 이 일이 끝나면 여제께 너의 사면을 부탁해보도록 하지. 그리고 옆의 배신자에 대해서도... "


"잠깐만. 말은 이렇게 하긴 했는데, 난 봉화혈족과 흑암혈족이 어디 사는지 모르는데?. "


"그건 걱정마라. 이스트반은 아리아의 모든것을 아는법. 너의 옆에 서있는 어린 아해가 바로 그리 될 예정이였으니. 애석하게도 배신자의 육신에는 신성이 깃드는 일이 없었지만. 지니고 있는 지식은 쓸만할것이다. "


프랑이 검을 뽑아들고 도약했다. 순식간에 카라스 앞에 서서 검을 목에 겨눴다. 검에는 검은색 불꽃이 붙어있었다.


"역시 죽여야겠어요. 아는게 너무 많아요"


"아는게 많다니. 그 반대지. 자네가 모르는것일뿐. 이미 아리아 전역에 퍼진 이야기를 알려주는것뿐인데 이렇게 검이 겨눠질 일인가?. "


"... "


아무런 반박도 못한채 프랑은 까마귀 위에서 뛰어내렸다. 카라스는 바로 까마귀를 타고 멀리 날아갔다. 단 둘만이 남았다. 나는 그동안 담아왔던 질문을 프랑에게 내뱉기로 했다.


"몸은 괜찮아? "


"네. 괜찮습니다"


"그래서, 이스트반이 뭐야?. 넌 왜 배신자가 된거고? "


꽤 긴 시간동안 정적이 흘렀다. 대답하기 힘든 이야기인걸까 싶어서 포기하고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난 이땅의 입장에서 이방인이고, 프랑의 입장에서는 약간 가까울뿐인 사이다. 어차피 언젠가 알게 될것이니 굳이 캐물을 필요 없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녀석의 생각은 다른거같다.


"전 당신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합니다. 이건 저의 고백입니다. 당신은 절 믿을수 있나요? "


절대적인 충성. 그 단어를 내 목에 검을 겨누면서 내뱉고 있다. 하지만 난 알고있다. 이 녀석은 나에게 검을 휘두를 녀석이 아니라는것을. 절대적인 충성이 아니더라도 나에게 검을 휘두르진 않을거라고 나는 생각하고 내뱉었다.


"설령 너가 절대적인 충성을 품지 않더라도, 난 감독관으로써 널 믿을거야. 너가 한때 따랐던 칼 마렐이라는 사람도 이렇게 행동했겠지. "


"그 사실이 제가 인도자의 길을 벗어나고 싶지 않은 이유이고, 동시에 아리아에 있고싶지 않은 이유에요. 그거 아시나요?. 전 바쳐질 존재였다는걸. "


"바쳐질 존재? "


프랑은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힘없는 팔은 검을 저 멀리 내던졌고 그제서야 프랑의 손은 자유롭다는 움직임을 보였다. 홀가분함 이라고 해야되는걸까. 


"이스트반. 그 이름은 오래된 전설에서 나오는 이름이에요. 현 아리아 제국 이전에 왕국이 있었죠."


프랑은 바닥에 앉고는 골렘성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성은 커녕 안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 눈빛은 처량해보였다. 가기전에 이야기라도 듣는게 낫겠지 싶어서 난 옆에 앉았다.


"낙인도 없었고, 혈족도 없었으며 그저 흑마법에 조금 가까웠을뿐이였던 시기. 빛의 대현자보다 훨씬 전의 시대. 하나로 뭉친 아리아의 왕국이 있었어요. 기사왕 이스트반, 마술여왕 시스트라. 둘은 동시에 즉위하고 같이 통치했지만 얼마 못가고 말았어요. 이스트반이 세운 깃발은 시스트라의 손에 부서졌죠. 하지만 과거의 모습과 한참 동떨어진 존재가 되었음에도, 아리아의 백성들은 처음이자 유일한 하나된 나라를 만들어준 두 지도자를 그리워했죠"


왕관. 프랑의 머리 위에 왕관의 형상이 흐릿하게 보였다. 하지만 이내 사라졌다. 마치 고장나서 지지직 거리는 화면처럼. 그리고 난 깨달았다. 아리아의 백성들은 기다리지 않았다.


"언젠가 이스트반과 시스트라가 돌아와, 다시금 왕국을 일으키리라. 아리아는 다시금 하나되리라"


전설속 성자의 재림은 수많은 국가들의 떡밥이였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재림이 일어나길 간절히 기도한다. 하지만 아리아의 백성들, 낙인찍힌 존재들은 기다리기만 한게 아니였다. 기다리지 못한 이들이 행한 일의 결과가 지금 내 눈앞에 있으니.


"시작을 부른건 흑암 혈족. 제가 속했던 혈족이였어요. 기사들의 혈족이며 광신의 혈족. 여제의 수족을 자처하는 검은 성전의 혈족의 기사단장의 목적은 그저 옛 지도자들을 재현한 존재였어요. 모든 아리아의 낙인은 이스트반과 시스트라에게서 기원했으니, 이스트반의 낙인은 독자성을, 시스트라의 낙인은 보편성을 상징했습니다. 제가 속했던 혈족은 모든 아리아의 낙인중 특별한 부분을 모아서 이스트반의 낙인을, 그리고 보편적인 부분을 모아서 시스트라의 낙인을 만들고자 했고 실제로 성공했어요. "


프랑은 마치 꿈에 빠진것만 같은 표정을 지은채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밝은 하늘에 먹구름이 낀것처럼, 프랑의 얼굴색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충성심의 증명. 제 혈족은 옛 지도자를 재현하여 바침으로써 증명하고자 했죠. 그리하여 바쳐진 둘은 골렘성의 대관식에서 이스트반과 시스트라의 관을 쓰고 그 둘의 위대한 모습을 재현하는 존재가 되는거에요. 근데 그거 아세요?. 제가 그 왕관을 썼더라면 프랑은 사라지고 이스트반이 태어나게 됐을거라는 사실을. "


"죽는게 두려워서 도망친거였구나. "


안쓰러움. 그 감정이 밀려왔다. 거창한 이유따위는 없었다. 죽음이 두려웠기에. 사소하면서도 가장 중한 이유였다. 


"그럼 시스트라는?. 시스트라가 될 아이는... "


프랑은 말하지 않았다. 분명 시스트라로 정해진 녀석이 누군지는 알고 있겠지만 말하지 않았다. 떠올리는것조차 힘든건지 식은땀이 흘렀다.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건, 시스트라의 관을 씌워졌다는 뜻이겠지. 그럼 그 아이는...


"그래. 알고싶은건 다 알았어. 그러니까 넌 아리아에서 만들어진 전설속 지도자를 재현하기 위한 존재고, 왕관만 쓴다면 완성인데 탈주했다는거지?. "


"감독관. 요약을 잘하시네요"


"그런말 많이 들어. 어쨌든, 너가 흑암 혈족에게 찾아가면 그녀석들이 널 적대할수도 있다는거지? "


"거의 확실히 적대할거에요. 그들에게 저는 배신자니까. 비록 본래의 의도처럼 진행되진 않았지만 그 계획에 크게 기여한건 흑암 혈족이였어요. 더군다나 흑암 혈족은 기이할정도로 여제님과 아리아 제국을 광신하는 혈족입니다. 땅을 밟기도 전에 공격받을거에요."


"그럼 뭐 일단 봉화혈족부터 방문하는게 좋겠군"


봉화라는 말을 입에 올리니 프랑이 질색하는 얼굴을 보였다. 진짜 딱봐도 싫어하는 얼굴이였다. 마치 오랫동안 연 끊고 만나지 않은 친구를, 그것도 겁나 마음에 안드는 친구를 만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또 왜. 봉화 혈족은 또 뭐하는놈들인데 싫어하는거야"


"아니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봉화쪽으로 가요. 제가 길을 압니다"


애써 괜찮은 모습을 보이면서 프랑은 앞장서서 걸어갔다. 하나같이 정상적인 혈족이 없으니 진짜 여긴 뭐가 있는건가? 싶었다.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길을 나섰다.


***


왜 프랑이 봉화혈족을 꺼려하는지 이제서야 알것같았다.


이새끼들은 미친놈들중 최고미친놈들이다. 그저 지나가던 나에게 총부터 쏴재끼면서 반갑다고 손짓하는 저 개새끼가 봉화혈족이 맞다면 말이다. 시발 왼손에는 폭탄까지 들고있네?.


"여어 개새끼야!. 밥은 먹고 다니냐?. 내가 밥좀 주마! "


"아니 시발 그거 폭탄이잖아 이 미친놈아! "


"소용없어요. 저 족속들은 자신들이 하고싶은데로만 행동하니까요"


그대로 폭탄을 던지고는 총을 난사하는 봉화혈족의 젊은 사람. 다행히 프랑이 검으로 모두 막아서 상처는...아 이런, 허리에 총알이 스쳤다. 피가 살짝 흘렀다. 스친것만으로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뜨거운 느낌이 온몸으로 퍼졌다. 허리를 스친게 총알은 맞긴 한걸까라는 의문을 품으면서 뒤를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총알은 없고 왠 용암같은게 있었다.


"저게 봉화 혈족의 낙인이야?. "


"정확해요. 저 용암처럼 생긴 폭발적인 에너지가 저녀석들의 마력계통에서 흐르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를 아무런 절제없이 표출하고 있고요"


작은 용암이 어느새 숲을 불태우고 있었다. 고작 한명때문에!. 어쩔수 없이 싸워야 되나 싶은 마음에 얼음검을 뽑아들었는데, 갑자기 그녀석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도망가는 솜씨가 좋은데?. 나중에 사격대회에서 표적역할좀 맡아주면 고맙게 생각하겠어. 여행길인가? "


방금전까지 총을 난사한게 없었던 일이라는것마냥 인사나 하고 자빠졌다. 그리고 그순간 나는 봉화혈족이 왜 미친놈들이라고 불리는지 알수 있었다. 다른 아리아의 백성들은 그래도 자신들이 전쟁이나 파괴라는걸 하고있고 그것에 진지하게 임한다. 하지만 봉화혈족, 이녀석들은 일상과 전쟁의 경계가 아예없다. 방금전까지 죽이려고 했던 적군과 대뜸 만담을 나누고 바로 죽여버리는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존재들이라는거다.


"뭐야. 왜 여기 흑암혈족이 있는건데?. 시발 싸우자는건가? "


"더이상 못참겠네. 감독관, 말리지 말아주세요. 가기전에 이녀석 머리부터 날려야겠어요"


"야 시발 너까지 그러면 어떻해! "


나에겐 감독관의 권위가 쥐뿔도 없는거같다. 내 말을 들은채로 안하면서 두사람은 크게 격돌했다. 물론 그 여파로 내가 기절한건 모른채로 말이다. 강력한 충격이 눈을 감게 만든다.


***


"그래서 내가 왜 또 여기온건데"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신승우. 스틱스 강은 물고기가 헤엄칠수 없는 강. 사람이 헤엄칠수 있을리 없어"


백골색 머리의 소녀가 낚싯대로 날 건지면서 말했다. 죽은자들의 강에 빠져서 그런걸까, 평소보다 오싹한 느낌을 줬다. 물론 저 사신 흉내내는 녀석은 아량곳 하지 않고 강물에 손을 담갔다. 손에 묻은 뼛가루가 강줄기를 타고 흘러갔다. 그럼에도 녀석의 손은 여전히 뼛가루 투성이다.


"좋은 소식, 나쁜소식. 어느쪽부터? "


"좋은소식"


"내 친구가 가고있어. 우리와 같은 부류, 가시박힌 왕홀을 쥔 아이가. 메아리를 좋아하는 스승을 대리고 온데. "


친구. 우리와 같은 부류. 전생자인것같다. 전생자들끼리는 서로 교류하는 경우가 많은걸까?. 그리고 메아리를 좋아하는 스승?. 전에 만난적 있는거같은데. 잘 떠오르질 않는다.


"나쁜소식은? "


"그 둘이 오는 이유는 흥미를 채우기 위한 복수야. 그들은 사신이 한번 죽었음을 느꼈어. 나의 노래가 끊겼음을 느꼈어. 누가 끊었는지 확인하러 오는거야"


"그때 널 죽인 사람을 찾으러 오는거라고?. 복수하려고? "


"그러고보니까. 내 목을 거둔 이가, 그 검을 든 아이였었지?. 하얗게 지른 머릿결과 검게 탁해진 눈을 지닌 아이. "


백골색 소녀는 낫의 날을 쥐며 말했다. 손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새하얀 백색의 피가. 이세상의 것이 아닌 피는 무언가를 강조한다는듯 기괴한 혈관들로 변형되었다.


"잘 지켜봐. 이 땅에는 이미 그 아이의 형을 집행할 이가 많으니까. "


***


눈을 떠보니 난 어느 따뜻한 바닥 위에 누워있었다. 따뜻한것을 넘어서 뜨거울 지경이였기에 일어나자마자 바로 문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들어오는 차디찬 바람때문에 감히 나갈수 없었다. 밖의 경치는 그야말로 장관이였는데, 글로 옳겨보자면 불과 눈이 함께하는 풍경이였다.


프랑은 없었다. 즉 이 방에는 나 혼자뿐이다. 누가 날 끌고온거지?. 그 봉화족 사람이?. 왜 끌고온거지?. 온갖 생각에 잠겼으나 결론은 하나였다. 일단 나가서 상황을 봐야한다는것. 숨을 들이쉬고 문을 열었다. 차디찬 바람이 다시 들어오지만 어비스족에게서 받은 얼음검을 차고다닌 덕분인걸까, 금방 적응했다.


그리고 마당으로 나오자마자 보이는건 불타는 도끼로 장작을 패는 미친놈이였다.


"여어 애미뒤진 새끼!. 니취팔로마? "


"너 시발 그거 무슨뜻인지 알고 말하는거냐? "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아니, 솔직히 말하는게 저따구인데 곱게 말할수 있을리가 없잖아. 하지만 이런 대화방식이 마음에 드는건지, 아니면 일상으로 여기는건지는 몰라도 봉화족 사람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호탕하게 웃으면서 다시 장작을 패기 시작했다.


"그 흑암족 계집애는 지금 방에서 자고있을거다.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편히 잠들고 있을거야 "


"방이 하나뿐이라고?. 아니 그럼 난.. "


"화장터다. 어린 계집이랑 사내자식을 같은 방에서 자게 둘거같았냐?. 쯧쯧"


눈이 수북히 쌓여있었다. 우린 아리아에서 매우 북쪽으로 온것같다. 혹시 여기가 봉화 혈족의 땅인걸까?. 불의 영역이라고 알려진것 치고는 오싹할 정도로 추웠다. 하지만 이 추위속에서도 봉화의 불꽃은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의 추위를 먹어치우고 더욱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추위를 감상할 시간은 없다. 우리에겐 그럴 시간이 없다.


"우리가 지금 급한 상황인데, 여기 윗대가리좀 만날수 있을까? "


"대군주 전하께서는 이미 너희들이 여기 온걸 알고 있다. 그 십새끼가 방금전에 금군을 여기까지 끌고왔었다고. 내가 어찌저찌 설득시켜서 망정이지 아니였으면 니들은 뒤졌다. 알았나? "


"이보게 경등. 말은 제대로 해야지. "


순간 모든게 멈췄고 다시 흘렀다. 동시에 바로 옆에 누군가가 서있는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백립과 백색 두루마기. 금색과 옥색의 자수. 그리고 주변에 떠다니는 시곗바늘 모양의 별자리. 생긴것만 봐도 범상치 않은 자가 나타났다. 그는 경등이라고 불린 봉화 혈족을 향해 말했다.


"이자들이 살아남은건 내 덕분 아니겠는가?. 내가 대군주 전하께 간언한 덕이지. "


"뭐 맞는말이군. 하지만 솔직히 자네같은 귀한 몸이 이런 사사로운 일에 일일이 간섭하는걸 백성들이 안다면 화를 당하는건 아닐까 두렵다고. 조심하는게 좋아 귀중. "


"귀담아 듣겠네. 그래 이방인들이여. 어찌 불과 별의 땅에 온건지 말해줄수 있겠는가? "


백립을 쓴 자는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보니,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림자에 가려진게 아니라 말 그대로 텅 비어있었다. 그 텅빈 공허를 바라보니 무언가가 보였다. 내가 칼에 찔리고 곤죽이 되고 부서지는 모습. 이건 환상인걸까? 아니면 미래?


"미래라네. 자네에게 일어날수 있는 미래를 보여줬다네. 전부는 아니지만 전부가 될수도 있지"


"당신 누구야? "


"난 대답을 듣지 못했네. 그러니 자네가 먼저 답해주게. 허면 나 역시 답해줄테니"


나는 짧게, 최대한 간결하게 말했다.


"골렘성이 위험해"


그러자 백립을 쓴 자는 만족스럽다는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박수를 쳤다.


"내가 미리 본 대답이 맞군!. 골렘성은 외적을 막고 있으니, 다른 제후국들을 규합하여 골렘성을 돕자는게 자네와 브로켄 대공의 생각이겠지? "


아까부터 나한테 있었던 일을 다 불고있다. 마치 내가 뭘 하고 뭘 하려 하는지 미리 본것처럼. 혹시 진짜로 미리 본걸까?. 내가 여기 오는것도 알고 있었나?.


"나 역시 대답을 해야겠군. 내 이름은 귀중. 골렘성의 선제후이자 아사 성국의 찰나대군이다"


"..선제후? "


그순간 거대한 검기가 산을 가르고 스스로를 귀중이라고 소개한 자를 갈랐다. 상황을 파악할 틈도 없이 검이 날아와 귀중의 머리에 꽂혔고 옆에 서있던 경등이라는 자의 몸도 반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눈앞에는 프랑이 서있었다.


"감독관. 괜찮으신가요? "


" 난 괜찮아. 근데 이녀석들 적은 아닌데"


"그래. 적은 아니지. 이스트반"


귀중은 갈라진 몸을 이어붙이고 말을 덧붙였다. 주변에 별들이 더 빛나기 시작했다. 프랑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검을 겨눴다.


"어린 이스트반이여. 정녕 날 못알아 보는게냐?. 내가 바로 찰나대군이다"


"알아보기 때문에 이러고 있는겁니다. 진짜 찰나대군 맞습니까?. 어째서 죽은 상태인거지? "


그 말에 나는 귀중을 자세히 관찰했다. 이제보니 맨살이 드러나는 팔목이 검게 변색된 상태였다.


"아사 혈족은 강제적으로 미래를 보게 되고 반응하게 되는 혈족. 설령 답이 보이지 않는 죽음의 순간조차도 몇백개의 가능성이 보여서 일부러 죽는것조차 쉽지 않은 혈족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한거죠?. 심지어 당신은 아사 혈족 내에서도 가장 강한 낙인을 보유하고 있는 찰나대군인데? "


찰나대군은 침묵했다. 주변의 별들이 모두 꺼지고 나서야 그는 다시 말을 내뱉을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지옥속에서는 내가 살아남는 미래가 보이지 않았으니까"


"골렘성을 말하는거야? "


"브로켄 대공이 말해줬었겠지. 모든 선제후들은 연락이 닿지 않을거라고. 선제후들은 모두 골렘성에 있다네. 그리고 난 유일하게 빠져나왔지. 오로지 죽음만이 날 그 지옥속에서 벗어나게 해줬다네"


찰나대군은 프랑을 바라봤다. 처량한 한숨을 내쉬고는


"봉화와 아사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으나, 흑암의 인내심이 바닥났다네. 니켈 교황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시금 이스트반을 완성하려 한다네"


"그게 무슨소리야. 설마? "


"제가 이 땅에 온걸 알아챈거군요"


그때 거대한 소리가 들려왔다. 성가와 뿔피리 소리가 섞여서 들려오고 이내 땅이 울릴정도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거대한 군대가 보였다. 검은 군단. 불타는 원 모양의 상징을 하늘높이 올린채로 그 거대한 군대는 천지를 울리는 행진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말위에 탄 기사들은 저마다 마력이 흐르는 검과 창을 들고 있었고, 땅위를 걷는 종자들이 들고있는 창 역시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또한 그들이 든 깃발들은 멀리서도 느낄정도로 강력한 오라를 내뿜고 있었다. 그 오라는 식물을 말라비틀어지게 하고 공기를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프랑의 얼굴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검을 집은 손은 눈에 보일정도로 떨고 있었다.


"절...끌고가러 왔어요. 군대를 이끌고"


"괜찮아? "


"어떻게..예나 지금이나 바뀐게 하나도 없는걸까요..?. 대체-"


그순간 프랑의 말문이 막혔다. 무언가를 본건지 나도 프랑이 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내린 산속에서 이번에는 불에 휩싸인 군대가 나타났다. 불꽃을 휘감은 검과 불타는 얼굴 형상이 튀어나오는 방패를 든 팽배수들이 무겁게 전진하고 있었고, 뜨겁게 달궈진 표창을 등에 매단 등패수들이 빠르게 전진하고 있었다.


악마가 깃든것처럼 이리저리 날뛰는 화차들과 불에 타면서 전진하는 해태석상, 그리고 총통을 들면서 전진하는 갑사들이 보였다. 이제보니 우리가 있는 곳의 건너편의 산기슭에는 불화살을 겨눈 사수들이 대기하고 있었으며 산정상의 봉화는 지금이라도 불덩이를 쏟아부을것처럼 요란하게 소리를 내고 있었다. 불타는 군대 한가운데에 가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군대에서도 기를 꺾이지 않겠다는듯 성가를 더욱 소리높여 부르기 시작했다. 군세의 가장 선두에 사슴뿔 달린 투구를 쓴채로 빛을 내뿜는 검을 휘두르는자가 말의 속도를 높였다.


두 군대가 천천히, 하지만 매섭게 전진하고 있었다. 마치 지금이라도 전쟁을 일으키려는것처럼.


그리고 눈을 깜박이니, 난 어느세 양측 군대 사이. 한가운데에 서있었다.


"엥? "


"누구냐. "


검은 갑주를 입은 자가 나에게 물었다.


"고의 앞에 서있는 그대는 누구인가? "


이번에는 가마에 탄 자가 내게 물었다.


상황파악이 안되는 지금 내 머릿속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중의 목소리.


'자네가 중재좀 해보게나. 감독관'


이 씨벌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