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근한 눈이 하남 정주를 뒤덮었다.


방 안은 따뜻했다. 방 안 난로불이 활활 타오르고 그 위에 매달린 주전자에서 김이 올라와 뚜껑이 들썩이며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자리에 누워 있던 어린 여자아이가 어느새 일어나 앉아 동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거울 속에 살짝 창백한 얼굴이 비쳤다.

그러나 눈빛만은 의지가 가득 담겨 아름답고 청수해 보였다.


소녀가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침대 옆에 있는 화장대에는 연지며 수분, 향유 등 온갖 화장품들이 놓여있어 여인의 규방이라는 것이 잘 드러났다.

시현이 낯선 지분 냄새에 살짝 얼굴을 찡그렸을 때였다.


"희아야, 깨어났구나!"


누군지 모를 사내의 목소리를 시현은 또다시 빙의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가족이거나 가까운 사람일 텐데.


그때 주렴이 걷히더니 어떤 사내가 찬바람과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청색 도포를 입고 있는 30대 후반 즈음으로 보이는 사내였다.
곰같이 덩치 큰 사내가 자기 손보다도 작은 그릇을 들고 조심조심 행동하는 게 왠지 우스워 보였다.


"포도는 며칠동안 너를 돌보다가 지금은 잠깐 쉬러 갔단다."


포도라, 아마 여종이나 유모 이름이겠지.


"그렇군요."


시현의 말을 들은 사내가 다행스럽다는 듯 말했다.


"다행이구나. 네 큰삼촌이 보낸 장 의원이, 네 정(精: 만물의 물질적 요소)이 상해서 네가 눈을 뜰 수 있을지 없을지는 하늘에 달렸다고 했거늘, 이리 눈을 뜬 걸 보니 천지신명께서 너를 구해주신 모양이다."


그 말을 듣고 저 사내가 소녀의 아버지일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시현이 반사적으로 말했다.


"이 세상은 불인하니 만물을 풀로 만든 개처럼 내던져버린다지 않습니까……. 이제 제가 깨어났으니 아버님께서는 걱정 마세요."


시현은 꿈이라도 꾸는 듯한 기분에 취해 아무 말이나 뱉어냈고, 그 말을 들은 사내가 자신의 딸을 이상하게 쳐다본다는 것을 깨달은 시현이 헛기침을 했다.


"아버님, 제게 약을 주시러 오신 건가요?"

시현의 말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린 사내가 멋쩍게 웃었다.


대체 몇 번째 아버지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사내가 그릇을 건네주는 것을 바라보던 시현은 약그릇을 후후 불어주는 것을 보고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직 철이 안 든 어린아이에게나 할 법한 행동이었으니까. 더는 두고볼 수 없었던 그녀가 약그릇을 받아들었다.


"제가 마실게요."


깨어난 딸아이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사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하거라."


뜨거운 탕약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시현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자기도 모르게 생각에 빠져 그릇을 들고 마시지 않는 것을 보고, 사내가 딸이 약이 써서 먹기 싫어하는 줄 알고 웃으면서 타일렀다.


"희아야, 약을 먹어야 빨리 낫지."


그제야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시현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약을 마셨다.


"뜨거우니 천천히……."


사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시현이 그릇을 내려놓았다.


"안 뜨거워요."

"그래 보이는구나. 그럼 방에서 잘 쉬고 있으렴. 이 아비는 잠깐 나갔다 오마."

"네. 잘 다녀오세요."


방에는 다시 시현 혼자 남았다. 대관절 몇 번째 아버지인지 모를 사내가 나가자 긴장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그제서야 시현은 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기를 순환시키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전 삶에서 얻은 성취가 사라지지는 않았고, 오히려 몸의 경맥이 더 넓고 튼튼하기까지 했다.

아마도 이 몸의 원래 주인이 유서깊은 무가 소생인 모양이었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 시현이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