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포대 옆에 있는 한 바닷가.


옆의 경포대에 묻혀 사람의 발길이 거의 없는

이 바닷가는 은은한 파도 소리와

갈매기 소리만을 내고 있었다.


"자기야 여기 너무 예쁘다 !"

나와 내 여자친구 서현이, 우리 둘은 고등학교 1학년의 기말고사를 마친 후 200일 기념 여행으로 이곳에 왔다.


나나 서현이나 둘 다 사람 많은 건 딱 질색하는 성격. 자연스럽게 우리의 여행은 강릉 하면 떠오르는 경포대가 아닌, 그 옆에 있는 이름도 모를 이곳으로 정해졌다.


아무도 없는 모래사장에 서서

둘이 멍하니 겨울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차,

서현이가 내 손을 잡았다.


따뜻하다.


서현이는 그 따뜻한 손으로 내 거친 손을 잡으며

"추워…. 그래도 너랑 있으니깐 행복해"

라는 그 손보다 더 따뜻한 말을 건네주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우리의 처음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인연은 축젯날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 동아리는 전통적으로 축제 때 귀신의 집 부스를 운영했다.

귀신의 집에서 내 역할은 피에로.

자의로 맡게 된 역할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역할을 수행하던 와중, 일이 터졌다.


내 바로 앞에서 사람이 쓰러진 것이다.


'그렇게 심하게 놀라게 하진 않았는데...?'

와 같은 당황이 몰려왔지만 그것도 잠시.

맥박을 확인하기 위해 손목에 손을 대본 후,

그 사람을 업고 보건실로 달렸다.


다행히 그 사람은 단순히 기절한 것.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 사람의 얼굴을 흘깃 보았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예쁜 얼굴은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그 얼굴에 눈을 떼지 못했다. 예쁘진 않지만 끌리는 묘한 매력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사로잡힌 내 눈은 한동안 그녀의 얼굴에 고정되어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런 시간이 지난 후 수 분 뒤 그녀가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나는 그녀에게 연신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긴장되었다.

머릿속에는 그녀가 나에게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불만을 표출할지'에 대한 걱정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내 걱정과는 다르게 그녀는,

"여기까지 업고 오셨다고요?……? 감사합니다" 라는 따뜻한 말만 나에게 건넸을 뿐이었다.


난 그날부터 그 여자, 아니 서현이를 마음에 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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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을 그렇게 실실거리면서 하고 계실까?"

생각을 멈추게 한 것은 다름 아닌 그 생각의

여주인공, 서현이었다.


"아, 아무것도 아냐 ㅋㅋㅋㅋ


이 말을 들은 서현이는 잠시 혼자서 생각하더니,

"아무것도 아니면 됐어!" 라고 말한 후 나를 꽉 껴안았다.


"춥네……. 서로 안고 있자!"


마음이 따뜻했다.

나는 순간 이 정적이 끝나지 않고

영원히, 내 삶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으면 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계속 생각해왔던 우리에게는 조금 이른 고백으로 이 정적을 깨기로 했다


"서현아, 우리 수능 끝나고 결혼하자."

정말 멋도, 감동도 아무것도 없는, 정말 단출한 프러포즈였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그 국화 같은 말이 다른 장미들보다 훨씬 더 멋지다고 생각했다.


이 말을 들은 서현이는 피식 웃으며

"ㅋㅋㅋㅋ조금 이른 프러포즈네? 그럼 우리 이거도 조금 일러도 되겠지?'

라고 말하며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그렇게 우리는 석양빛이 이룬 붉은 바다를 배경으로 조금 이른 어른의 사랑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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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대 옆에 있는 한 바닷가.


옆의 경포대에 묻혀 사람의 발길이 거의 없었던 이 바다는 최근 모 방송에서 숨겨진 데이트 명소로 선정되어 찾은 사람이 부쩍 늘게 되었다.


더는 그 은은한 바닷소리는 못 듣겠지라는 아쉬운 감정에 젖을 때쯤,


"여기도 많이 변했네"

서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그때 그 일렀던 어른의 사랑을 잠깐 떠올렸다.


그리고 "변하지 않은 건 우리 뿐인가 봐"

라고 그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대답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