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위에는 구름이 있어. 까마득히 높고 두꺼운 구름이

...

아랫부분은 지옥이지만 윗부분은 살만해

...

언제나 같은 모습이야. 매일 매일, 모든 것이 그대로 제자리에 있어. 하늘을 메운 구름, 둥글고 커다란 태양, 창을 흔드는 바람, 내 일상... 

이대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아

...

한동안 연락이 없었던 것, 미안해

...

너를 이해하지 못하는게 아니야. 그래도... 그러지 않았으면 해

...

나도 네가 보고싶어

...

기회가 닿는다면... 언젠가 다시 만나자. 안녕


*


작년 어느 가을날, 비 내리는 밤이었다. 나는 비에 젖어 무거워진 몸으로 정류장에 앉아있었고, 그녀는 내 옆에서 시선을 떨군 채 말이 없었다. 이따금씩 버스가 내는 거친 소음만이 요란하게 들릴 뿐, 두꺼운 구름에서 쏟아지는 비는 멈출줄을 몰랐고, 땅에서 튀는 빗방울에 희미하게 섞인 흙냄새만이 정적을 메웠다.


그녀도, 나도, 서로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나는 내가 해야만 하는 말을 했고, 그녀는 평소대로 묵묵히 내 말을 들어주었다. 무릎위에 올린 그녀의 손이 꼭 쥐어졌다.


"왜 그런 심한 말을 해?"


"....."


"나는 너에게서 그런말은 듣고싶지 않아. 책임지지 못할 말은 싫어."


"하지만 어째서 그 얘기를 이제야 하는거야? 

처음부터 마지막이 어떻게 될지 알고있었으면서, 왜 그 얘기를 이제야 해?


"너는 몰라. 아무것도."


"너는 내가 이대로 납득하기를 바라는거야? 이렇게 먼곳까지 왔는데, 갑자기 그런 얘기를 꺼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 너를 순순히 떠나보낼거라고 생각하는거야? 사실은 너도 원하잖아."


"그만해"


"너도 바라고 있잖아. 그래서 지금까지 망설이면서 말 못한거잖아."


"그만하라고!"


그녀의 볼에 눈물이 흘렀다. 그녀가 내게 다가와 안겼다. 허리에 감긴 팔에 힘이 들어갔다.


"미안해... 나도 이렇게 너와 있고 싶어. 너를 떠나고 싶지 않아. 언제까지나 네 곁에 있고싶어. 마음속에서부터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 너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야. 그저...그저..."


"마지막까지, 나를 잊지 마"


*


순간 머릿속이 번뜩였다. 나는 마음을 굳히고 집을 나섰다.


*


한 손에는 그녀의 편지를, 다른 한 손에는 여행용 가방을 들고 뛰쳐나간 내가 도착한 곳은 금성이었다. 정거장에서 금성을 내려다보고, 어느 도시로 갈지 행선지를 정하고, 금성의 무더운 기후와 숨막히는 압력, 그리고  그 묘한 인상에 적응하느라 진땀을 뺀 나는 무력감에 빠져 일주일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금성의 하늘에 부유하는 도시는 바람의 흐름을 타고 움직인다. 창 밖에 한가득 보이는 저 노란색 구름과 함께... 그녀는 저 구름 너머 어디에 있을까. 이 무더운 곳, 낯선 곳 어딘가에 그녀가 있다. 나는 그녀를 찾아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


위를 봐도, 아래를 봐도 노란색 투성이인 이곳에서는 그다지 할 만한 일이라는게 없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유리에 뒤덮인 번화가를 걷는 것 외에는... 처음 한달 간 완전한 외지인인 내가 할 수 있는것은 아직 익숙치 않은 곳들을 눈에 익히는 것 뿐이었다. 금성의 도시는 처음보는 것, 지구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들로 가득했다. 이곳 사람들은 노란색 하늘에 소풍날짜를 잡고, 지구에선 눈이 부실 정도의 날씨를 흐리다고 불평했으며, 젊은이들은 이색적인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이처럼 금성의 도시가 나에게 있어 이질적이었던 만큼, 금성 사람들에게도 나란 존재는 이질적이었다. 인파가 무수한 거리를 이곳저곳 헤집고 다니다 보면, 때때로 금성인들이 나에게 이렇게 말을 걸어오곤 한다. 이봐, 너 지구 출신이지? 지구에서 금성으로 오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구. 여기는 어떻게 오게 된거야? 그러면 나는, 떠나간 여자를 찾으러 왔어, 하고 대답한다. 그들은 나의 말에 웃거나, 나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거나, 여자를 찾고싶다면 어느어느 도시로 가보라고 충고하곤 한다.


*


1편은 프롤로그. 2편부터 본격적으로 내용 전개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