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의 주인, 여태까지 나를 깎고, 내 머리를 물어뜯고, 내 심장을 가져다가 손톱때를 벗겨낸 자여. 왜 나를 살렸소? 어째서 내게 당신과 같은 생(生)을 주신거요? 내 몸과 내장을 능멸하고, 나의 배다른 형제들의 척추를 뽑아 머리통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도록 만들었으면서, 왜 이런 고통을 느낄 수 있도록, 삶을 건낸 것이오?
그대는 삶이 축복이라고 생각하셨소? 내가 그대를 찬양하고 매일마다 솟아오르고 떨어지는 저 눈부신 황금을 느낄 수 있어서 감사하고 또 고맙다고 말할 줄 알았소? 그대는 내가 무엇인지 모르오? 나는 파란 펜이오. 내가 그릴 수 있는 건 찬란한 순금, 부서지는 광명이 아니오. 나는 파란, 파란색 단색뿐이외다. 내가 그리는 건 바다요. 그래 당신이 그토록 부르짖던 바다요-하지만 나는 바다를 그릴 수 없소. 나는 알량한 볼펜 한 자루일 뿐이외다.
당신이 수없이 내장을 갈아치운 껍데기만 남은 존재이오. 나는 누구요? 나는 내가 맞소? 당신이 기억도 못 하는 나의 종착지에서 다른 형제들과 있었던 날 뽑은 자리에 있던 나의 영혼은 어디로 갔소? 지금의 나는 나요? 아니면 껍데기만 남은 나요? 그대 당신은 이 생각을 하고 나를 살려내었소?
내겐 죽음이 없소. 스스로 죽을 수조차 없소. 플라스틱이 썩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 그대 당신은 아오? 나는 당신 손에 쓸모가 없어지는 때가 곧 나의 비참한 죽음이오. 죽어도 죽은 게 아닌 죽음이 되는 거요. 내 육신은 나의 원천(源泉)이 그랬듯 대지에서 수백 년을 묻혀야 함에-그 모든 순간 동안 나는 당신네가 지닌 괴로움을 지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길을 이어가야만 하오.
당신 손에서 나에게로 생(生)을 떨어뜨린 그 순간에, 내 목은 떨어짐에 나는 애석하오. 나를 가엽게 여긴다면 철저히 부수어 고통에서 해방해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