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과 전 세계, 한 쪽을 희생시켜야 한다면 어느 쪽인가. 서브컬쳐 매체에서 자주 다루는 주제다.



해답이 없을 수록 수명이 연장되는 것이 딜레마다. 고로 트롤리 딜레마엔 정답이 없다. 정답을 내려 고민하는 과정이 즐겁긴 하나 어쨌든 결론은 났다. 5명을 살리기 위해서 1명을 희생시킬 것인가? 그것이 윤리적으로 옳은가? 라는 물음엔, 애초에 옳다 그르다 따질 수 없다 판단하는 것이 맞다.



세상은 가끔 개인에게 잔혹한 선택을 강요한다. 물에 빠졌을 때 아빠와 엄마, 둘 중 누굴 먼저 구할래? 물음받으면 '둘 다!' 혹은 '애초에 그런 상황이 오지 않게끔 하는 게 중요해' 등의 발언으로 대강 넘어가곤 하는데, 문제는 정말 그런 상황이 오면 어쩌냐는 거다.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 선택으로 초래될 결과에 대한 책임은 감당 가능한가? 상상할 수가 없다.



본론으로 들어가면, <날씨의 아이> 에서는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하는 것이 마땅하다 여기는 사상을 비판한다. 이를 반전체주의라 부르는 듯 하다. 그 근거로서 소녀의 목숨을 구하며 도쿄 전체를 수몰시키는 이야기가 주제인 것이 제시된다. 사실 이것이 옳은가? 한 생명을 희생시키지 않았단 점에선 옳으나, 수많은 생명들의 목숨과 터전을 앗아갔단 점에선 치명적이다. 씁쓸한 의문만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으며, 여기까지가 감독의 의도였을 것이다. 무엇을 교훈으로 삼을지는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소수를 위해 사는 사람들을 여럿 본다. 인권변호사나 시민단체, 특정 성적 지향 및 인종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그에 해당할 것이다. 그들의 논리는 정의롭다. 하지만 정의 이외에 사회가 그들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면, 실리일 것이다. 소수를 향한 차별과 폭력이 거리낌없이 용인되는 사회가 된다면 언젠가 자신 역시 소수에 속하게 되어 박해받을 것이다. 일말의 불안감인 것이다.



철학은 자기위로용이 아니다. 철학은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위한 연속적인 사고 과정의 집합이다. 그리고 상황에 맞는 올바른 결정을 찾아야만 하는 이유는 자신이 아닌 타인의 생명과 가치를 보전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사회 전체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감독의 메시지가 <한 소녀의 희생 위에 서야만 하는 세상이라면 그대로 망해버리는 것이 맞다> 라면, 사실 세상은 이미 희생 위에 서 있다. 무고한 사람의 목숨이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대체 몇이나 죽었을련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세상이 망해버려야 할 이유는 이미 수없이 있다. 반면, 세상이 더 존속해야만 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밖에 없다.



아마 더 나은 미래가 올 수도 있어서, 그것 하나뿐이다. 그걸 위해, 아직 태동하지도 않은 낙원을 위해 사람들은 목숨을 끊는다. 아무도 희생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올 것인가. 전쟁도 광차도 사라지고, 아무도 선로에 묶이지 않아도 되는, 하나를 위해 하나를 버리지 않아도 되는, 그러한 세상이 현재 우리가 살아있을 때엔 오지 않을지도 모르나... 먼 미래에, 어쩌면 노력한다면 자기 자식 대에. 원 없이 노는 아이들이 이 푸른 행성에 뛰놀길 소망하기 때문에, 우리는 후손으로부터 세상을 빌렸다는 문장에 동의하는 바이다.


https://m.blog.naver.com/stormright/2231835650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