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호은 눈을 떴다. 눈이 떠진 것이 감지되자 검은색으로 암전되었던 창은 바로 투명화되더니 이내 눈부신 아침 햇살을 빨아들었다. 철호는 지나치게 눈부신 햇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창의 투명도는 조금 낮아졌다. 

철호는 머릿속으로 컴퓨터 화면의 영상을 떠올리게 하였다. 화면의 아랫쪽에는 메시지가 반짝거린다. 밤새 누군가 자신에게 메시지를 전달했고, 그 메시지가 중대한 것이며 동시에 비밀 등급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잠시 손가락을 까닥였고, 그와 동시에 메시지의 발신자 명이 그의 뇌신경을 자극한다. 

김소미 박사로부터 온 메일이었다. 그는 시각 모드로 메일을 확인한다. 귀 옆에 붙여진 뇌접속 시스템은 컴퓨터에 저장된 메시지의 내용으로 그 시신경 세포를 자극한다.  

- 김소미! 촉망 받는 여성 뇌과학자. 그가 지난 수년간 중대한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법학자일 뿐 뇌과학 연구 내용에 대해 관심이 없었는데,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연락을 하는 걸까? 

메일은 내용은 간단했다. 오늘 낮에 점심을 함께 하자는 것이었다. 심리학적인 주제에 관해 상담하고 싶다는 것이다

철호는 잠시 김박사의 모습을 떠올린다. 다소곳하지만 왠지 고집이 있어 보이는 눈매와 다부진 입술이 인상적이었다. 더구나 지금 시대에 안경을 쓰고 있는 여성이라니..  아마도 돗수가 없는 안경일 것이다. 몇 분밖에 안 걸리는 아주 간단한 시술만으로도 시력을 자신이 원하는 적정한 수준으로 조정할 수 있으니까. 이 정도의 시술이라면 국가의료보장에 포함되므로 무료이다. 그는 최근 복고풍 바람을 타고 일부 여성이 안경을 끼는 경우가 있다는 기사를 검색한 적이 있었다. 

김박사와는 몇 달 전  "인간의 자유의지와 법적 책임"에 관한 학술 세미나에서 만난 적이 있다. 철호는 과연 인간의 자유의지가 존재하느냐에 대한 철학적이고 법률적인 주제에 대해 기조연설을 하였다. 토론이 끝난 후 연단에서 내려오는 계단 옆에서 김박사는 바로 눈 앞에 자신의 직책을 소개하는 홀로그램을 보여주며 명랑한 목소리로 인사해왔다.  그 후 몇 번 만나 간단하게 대화를 나누었을 뿐 길게 토론한 적은 없다. 당시 김박사에 대해서는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수수한 옷차림에 앳된 미소가 끌린다고 잠시 생각했을 뿐, 그 뒤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철호는 김박사의 메일에 간단히 답변을 했다. 점심 식사에 찬성하며 12시에 자신의 사무실로 와달라는 것이다. 자신의 정치활동에 심리학 박사를 만나는 것이 방해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