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의 대화 끝에 빅토르는 SGPTU-61에 목공 전공으로 입학했다. 그나마 예술에 가까웠던 목공은 빅토르의 적성에 꽤 잘 맞았다. 그는 또한, “자동으로 만족하는 자들”의 베이시스트로 활동하며 자신만의 곡을 작곡했다. 사샤와의 만남도 순조로웠다. 목공을 배우고 며칠 지나지 않아, 빅토르와 사샤는 자그마한 반지를 맞추었다. 빅토르가 입학한 기념으로 직접 깎은 반지였다. 비록 보잘것없는 나무 반지였지만, 사샤는 꽤 행복해했다.


시간이 흘러 한창 여름인 8월, 빅토르는 고민에 빠졌다. 사샤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무를 깎아서 주는 선물은 저번에 주어서 뻔하기도 해서, 어떤 선물을 주어야 할지 고민이 들었다. 그래서 학교가 끝난 뒤 굼(ГУМ)에서 이것저것을 둘러보기도 했지만, 마땅한 선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결국, 빅토르는 고민 끝에 자신이 줄 수 있는 선물은 노래뿐이라고 결론을 내린 후, 기타를 잡고 곡을 쓰기 시작했다.


노래를 짓고 가사를 쓰기 전에, 빅토르는 노래의 제목을 고민하고 있었다. 한참을 생각하다 빅토르는 “8학년 소녀(Восьмиклассница)”라는 제목을 지었다. “8학년 소녀”는 사샤의 별명이었다. 사샤는 빅토르보다 두 살 어렸지만, 마치 8학년과 같이 어리고 순수한 그의 모습을 보고 빅토르가 지어준 별명이었다.


빅토르와 사샤는 세로프 예술학교에서 가수와 팬으로 만났다. 빅토르가 소속해 있던 밴드 “제6병동”의 팬이었던 사샤는 그 중 베이시스트였던 빅토르에게 관심이 있었다. 특히 가끔 빅토르가 자신의 곡을 직접 부를 때마다 사샤는 맨 앞자리에서 빅토르를 바라보았고, 그런 사샤에게 빅토르도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내에서 공연을 마치고 나가던 빅토르의 어깨를 사샤가 가볍게 두드렸다.


“오늘 공연도 멋졌어.”


“고마워. 이름이 뭐야?”


“사샤. 오늘 우리 집 안 놀러 올래?”


사실 그 둘은 공연 중엔 자주 봐왔지만,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말을 섞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사샤는 당돌하게 빅토르를 집으로 초대했고, 빅토르는 그런 사샤에게 알 수 없는 신비한 이끌림을 느껴서 이를 수락했다.


“그래, 갈게.”


빅토르와 사샤는 하굣길에 만나서 함께 집까지 걸어갔다. 그동안 둘은 음악 얘기에 열중했다. 락 음악에 빠져서 꽤 많은 밴드의 음악을 들었던 빅토르였지만, 사샤의 지식은 따라잡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샤는 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하굣길부터 집, 그리고 사샤의 방으로 갈 때까지 대화를 끊임없이 나누었다.


“빅토르, 생각해보니까 이름이 뭐야?”


사샤가 대뜸 물었다. 생각해보니 둘은 서로 “빅토르”, “사샤”라고 밖에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얘기를 하며 마치 몇 년은 만난 친구처럼 친해졌지만, 정작 서로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사실에 빅토르는 싱긋 웃으면서 답했다.


“빅토르 로베르토비치 초이. 너는? 사샤라고 밖에 안 알려줬잖아.”


“알렉산드라 니콜라예브나 베셀로프스키. 생각해보니까, 우리 이렇게나 많이 얘기했는데 이름도 몰랐네.”


“그러게나 말이야.”


사샤와 빅토르의 첫 만남 이후 둘은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었다. 딱히 누가 사귀어달라고 얘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첫 만남 이후 빅토르는 자연스럽게 사샤의 반을 찾아가기 시작했고, 둘은 매번 술집, 영화관, 굼 등을 전전하며 데이트를 이어나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2년을 만나며 연인이 되었다.


빅토르는 지난 2년을 회상하며 “8학년 소녀”의 가사를 써내려갔다. 사샤와 함께했던 추억을 새록새록 떠올리며, 사샤가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빅토르의 입가에는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 8월 15일, 사샤의 생일에 빅토르와 사샤는 평범히 밤거리를 걷고 있었다. 공원의 벤치에 앉은 후 빅토르는 기타를 꺼내고 말했다.


“생일 축하해, 사샤. 선물로 노래를 준비해봤어.”


“그래? 제목이 뭔데?”


“8학년 소녀.”


빅토르는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거리를 둘이서 떠돌아다니네. 난 담배를 피우고, 넌 사탕을 먹지. 가로등이 켜졌고, 너는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지만, 나는 어김없이 너를 술집으로 부르지. 음~ 8학년 소녀.”


“흔한 데이트 이야기네.”


사샤가 웃으면서 말했다. 빅토르는 줄곧 사샤를 술집으로 불렀다. 아무래도 맥주 마시는 걸 빅토르가 즐기기도 했고, 돈이 없어 갈 곳 없는 빅토르에게 술집은 생각보다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사샤는 빅토르와 함께했던 추억이 담겨있던 노래가 퍽 마음에 들었다. 한편 빅토르는 2절을 부르기 시작했다.


“넌 지리학에서 C를 받았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아. 넌 네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줬다고 하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리는 걸어가.”


“뭐야? 너, 내 허락도 없이 그 얘기 쓰는 거야? 당장 빼! 당장 빼!”


사샤는 조금은 부끄러워하면서 빅토르에게 말했다. 그러자 빅토르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사샤가 빅토르에게 “8학년 소녀”라고 불리게 되는 계기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세로프 예술학교의 기말고사가 있던 날, 사샤는 울면서 빅토르에게 안겼다.


“빅토르, 나 시험 망했어.”


“무슨 일이야?”


“지리학 시험 망했어. C 나왔어.”


“에이, 그 정도야. 나는 D였나 그럴 텐데 뭐.”


“그리고, 율리야랑도 싸웠어. 내가 한 말이 상처가 되었나 봐.”


빅토르는 말없이 손을 잡으며 밤거리를 걸었다. 사샤가 울음을 그칠 때쯤, 빅토르는 사샤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사샤, 너는 8학년 같아.”


“8학년?”


“어리고 순수하잖아.”


“뭐래, 얘는.”


사샤는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 사샤의 뺨에 빅토르는 입을 맞췄다. 그러자 사샤는 까무러치면서 빅토르의 어깨를 툭툭 쳤다. 빅토르는 웃으면서 사샤에게 말했다.


“8학년. 8학년 소녀.”


물론 사샤는 이 날의 기억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으나, 공개적으로 알려질지도 모르는 노래에 자기의 일화가 삽입된 것에 대해 약간의 부끄러움은 느꼈다. 그러나 그런 요소 하나하나가 자신만을 위한 노래를 쓴 빅토르의 진심이 느껴져서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한편 빅토르는 기타 솔로를 연주하고 3절을 부르기 시작했다.


“엄마의 립스틱, 언니의 부츠. 너와 함께 하는 건 어렵지 않고 넌 나를 자랑스러워 하지. 넌 풍선과 인형을 좋아하지만, 엄마는 네가 10시까지는 집에 오길 바라지. 음~ 8학년 소녀. 음~ 8학년 소녀. 아! 8학년 소녀.”


사샤가 “8학년 소녀”라고 불리는 또 다른 이유는 사샤의 묘하게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었던 태도였다. 빅토르와 데이트를 할 때마다 엄마의 립스틱을 몰래 바르고 언니의 부츠를 빌려신고 오는 사샤의 모습을 본 빅토르는 그런 메이크업 속의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학생의 미숙함이 마치 어른이 되었다고 우쭐대는 어린 소녀의 모습과도 같아서 귀여웠다.


사샤는 노래를 다 듣고 생각했다. 아마, 이 곡이 세상에 발표되었다 해도 이 곡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녀와 빅토르 외엔 없을 것이다. 사샤는 빅토르가 자신만을 위한 곡을 써줬다는 것에 행복했다. 그녀는 빅토르에게 감사인사와 곡에 대한 찬사 대신 입을 맞췄다. 빅토르는 웃으면서 물었다.


“만약에, 나중에 내가 밴드를 만들면 이 곡 발표해도 될까?”


“얼마든지. 이 곡이 알려져야 나중에라도 내가 빅토르의 여자친구라고 말하고 다닐 거 아냐.”


“지리학에서 C 맞은 거 알려져도 괜찮은 거야?”


“너 진짜.”


두 사람은 한참을 웃었다. 그런 사샤의 모습을 보면서 빅토르는 생각했다. 사샤를 처음 봤을 때 빅토르가 느꼈던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단테에겐 베아트리체, 매카트니에겐 린다, 레논에겐 요코가 있는 것처럼, 빅토르에겐 사샤가 있었다. 가끔 곡이 잘 안 써질 때도 사샤를 만나고 오면 모든 피로가 풀리고 곡이 술술 써졌다. 그런 빅토르에게 “8학년 소녀”는 자신의 뮤즈에게 바치는 헌정 시나 다름없었다. 빅토르는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사샤에게 말했다.


“사샤, 고마워. 내가 음악을 할 수 있었던 게 다 네 덕분이야.”


“아니야, 내가 다 고맙지. 이런 멋진 곡을 나한테 줬는데.”


“오랜만에 너희 집 놀러 가도 돼?”


“그래. 얼마든지.”


빅토르는 사샤의 손을 잡고 그녀의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밤거리를 걸으며 사샤는 “8학년 소녀”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음~ 8학년 소녀.”


빅토르는 그런 사샤를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며 길을 걸어나갔다. 8학년 소녀와 빅토르는 또 한 번 그들만의 추억을 만들러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