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

 소녀가 꼭 9살이 되던 해였다.
 사람들은 3년에 한 번 오는 축제 준비로 분주해졌다. 사람들은 더 추워지기 전에 창고에 쌓아둔 땔감을 확인했으며, '강인한 자들'이 오기 전 그들에게 전해줄 물건과 지어놓은 옷, 필요 없는 물건을 정리했다. 나무 바로 앞 넓은 터에 사람들이 자신의 몫을 조금씩 떼어온 장작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그 더미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서로 잡기 놀이를 하였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앞으로 다가올 1개월간의 추위를 미뤄놓은 채 축제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것이 만개할 때 즈음, 추위는 매서워지고 눈송이는 전보다 커졌다.
 폭신폭신한 눈을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면서 밟을 때, '강인한 자들'이 왔다.
 마을 입구, 누구나 열 수 있는 나무문이 삐걱 소리가 났다. 털도 발라내지 않은 짐승을 한 손에 들고 온 사람들을 보며 옷차림이 화려해진 '눈과 얼음이 녹은 땅' 사람들이 말했다.
 "잘 오셨어요."
 "수고했습니다."
 고기와 옷을 바꾼다.
 서로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만큼 흥정을 하기도 하고, 서로에게 필요한 만큼 더 얹어주기도 하면서, 중앙으로 안내했다.
 빨간 불이 불티를 튀며 높다란 장작을 태웠다. 밤하늘 속에 연기가 피어올랐다. 사람들의 얼굴이 불꽃으로 일렁였다.
 눈과 얼음이 녹는 땅의 지도자로 추대받는 소녀의 아버지와 강인한 자들의 늙은 족장이 의논하러 중앙에서 벗어나 몇몇 사람들과 함께 사라졌다.
 그 근처에서 놀던 소녀는 고개를 빼꼼히 들어 커다란 한 그루의 나무 주위를 둥그렇게 둘러싼 집들에서 벗어나 어디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소녀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벌떡 일어섰다.
 아이들의 눈이 이데인을 따라 올라갔고 소녀는 소리쳤다.
 "우리도 가보자!"
 아이들은 저 먼저 뛰어가는 소녀를 얼결에 따라 뛰었다.
 입김이 뽀얗게 나왔다.
 장갑에, 모자까지 푹 눌러 쓴 아이들의 볼이 발갛게 상기 되어 종종걸음쳤다. 나무 기둥 5개를 가장자리에 세우고 가운데에 큰 기둥을 놓고 천을 뒤집어쓴 천막이 보이자 아이들은 뛰어갔다. 돌돌 말려 천이 올라간 곳은 입구로 보였는데 어른들이 허리를 숙여야만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입구가 작았다.
 그 입구에 아이들의 얼굴만 옹기종기 모여 족장과 지도자가 하는 회의를 들었다. 가운데 호롱불을 놓고 탁상 앞에 앉은 검은색의 머리가 굽슬굽슬한 소녀의 아버지와 황색 피부인 족장의 주름 가득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커다란 짐승은 우리 손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소."
 "그럼 우리 마을 사람들을 몇 보내서 처리하면은……."
 "그보다 많이……."
 아이들이 그 이야기가 무엇일까 고민을 하고 있을 즈음, 아이들의 머리에 딱밤이 차례차례 놓였다.
 "요놈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족장과 지도자의 얼굴이 돌아갔다. 어떤 아이는 울음을 터트렸다. 딱밤을 먹인 어른을 도리어 억울하다는 듯 머리 부여잡고 보고 있는 소녀를 알아보고 아버지가 다가왔다.
 "이데인, 왜 여기 있어."
 "이놈들이 여기서 족장님과 지도자님이 하시는 얘기를 몰래 엿듣고 있지 뭡니까."
 귀를 덮는 모자를 쓰고 콧수염을 기른 남자 어른이 화살집을 짊어진 채로 말했다. 소녀의 아버지는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소녀의 조그맣고 까만 머리통이 보였다. 삐죽 나온 코도 보였다. 콧수염 남자는 지도자의 딸이라는 것을 알고 말했지만 역시나
 "지도자님 따님은 따로─."
 "아니요."
 지도자는 앞에 선 남자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똑같이 혼내 주십시오."
 까만 머리통이 위를 보았다.
 눈망울이 그렁그렁했다.
 이윽고 눈물이 하얀 눈 위로 투둑 떨어져 얼어붙었다. 소녀의 아버지는 그것을 보았지만, 휙 돌아서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콧수염 아저씨는 "역시."라는 감탄 섞인 말을 내뱉었다. 콧수염 아저씨는 뒤돌아 아이들을 세워두고 말했다.
 “너희들의 잘못을 생각해봐라.”
 시간을 주었고, 일렬로 아이들이 섰다.
 “자, 너부터!”
 시간이 지나자, 맨 앞에 있던 아이부터 잘못한 것을 묻자 아이들은 차례차례 억지로 입을 웅얼거렸지만, 소녀는 불퉁한 얼굴로 한참을 있다가 재촉하는 소리에 겨우 옆에 아이 것을 비틀어 말하였다.
 콧수염 아저씨는 그것을 알았고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이상 혼낼 필요는 없다고 느꼈고 그 정도로 충분했다고 생각해서 아이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아이들은 흩어졌고 소녀는 심술이 나서 얼굴을 찡그리고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 머리를 하나로 땋은 아이 하나가 소녀를 돌아보더니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너 때문에 나까지 혼났잖아!"
 그리곤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소녀는 아까 울었으면서 지금은 따지고 있는 아이를 보았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서운했던 감정이 몰려왔다. 그리고 화가 났다.
 “네가 따라온 거잖아, 왜 나한테 그래?”
 그래서 당당하게 쏘아붙였고 “야!!”하던 아이는 검은 머리를 잡아챘고 소녀도 질 수 없다는 듯이 땋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울음이 터졌다.
 어떤 아이는 말리다가 얻어터져서 엉엉 울고, 어떤 아이는 응원하고, 어떤 아이는 멀뚱멀뚱 서 있고 난장판이 벌어졌다.
 눈을 쓸고 있던 한 아주머니가 웬 아이들이 모여있는 것을 멀찍이서 보다가 "싸움 났대!"라고 아이들이 소리치며 뛰어가는 것을 보았다. 아주머니는 그 말에 빗자루를 놓고 아이들에게 다가갔고 할퀸 얼굴과 손, 옷이 조금 찢어진 채로 일방적으로 주먹질하는 지도자의 딸을 보았다.
 깔린 아이는 누워서 울면서 발길질을 하고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아주머니는 두 아이를 떼어놓으면서 한 아이에게 약초사와 아이들의 부모를 데려오라고 지시했고 아이는 뛰어갔다.
 소녀의 아버지는 아이의 말을 듣고 곧장 뛰어왔다. 상대편 아이의 엄마도 조금 있다가 뛰어왔다. 얻어터진 땋은 머리 아이를 보고 아무리 싸워도 그렇지, 이렇게 쥐어패면 어떡하냐면서 거의 따지듯 소리 질렀다.
 "지도자님 애 똑바로 키우세요! 그래서야 우리 마을 제대로 책임질 수 있겠어요?"
 소녀의 아버지는 친구의 얼굴이 피투성이로 부어있는 것을 보며 친구와 자신의 딸을 화해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먼저 고개를 숙이며 소녀에게 사과하라고 했다. 그러나 소녀는 아까부터 아버지에게 서운했던 것을 분출해 버렸다.
 "쟤가 먼저 나 때문에 혼났다고 시비 걸었단 말이야!"
 "이데인!"
 아빠를 올려다보는 통통한 볼이 씰룩이더니, 금빛 눈동자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내 편도 안 들어주고.'
 "아빠 미워!"
 소녀는 뒤돌아서 그대로 뛰어갔다.
 “뭐 저런 싸가지 없는 애가 다 있어!”
 소녀의 아버지는 아이를 잡으려다 말고 뒤를 돌아 화난 사람을 보았으며 결국 용서할 때까지 허리를 펴지 못했다. 그리고 소녀는 따라오지 않는 아버지를 보다가 엉엉 울며 밤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

 집 앞에서 볏짚에 등지고 쪼그려 앉아 눈더미를 나뭇가지 하나로 팠다. 코에서는 훌쩍 콧물을 삼켰다. 굽슬굽슬한 소녀의 검은색 머리가 다소 두꺼운 옷 위에 얹혔다. 조그마한 돌이 나왔다. 얼어붙은 바닥이 나왔다. 돌을 집어 뾰로통한 얼굴로 저 멀리 던졌고 돌은 눈 속에 콕 박혔다.
퉁퉁 부은 시선을 옮겼다.
 타버린 나뭇더미 뒤에 별을 빼곡히 수놓은 나무가 서 있었다. 그 주위의 집은 잠들어 있었다.
 훌쩍이며 주린 배를 움켜쥐고 등 뒤에 집을 바라보았다. 불을 밝히고 있었다.
 하지만 끝내 돌아보지 않던 등.
 “흥!”
 소녀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고개를 휙 고집스럽게 돌렸다. 그리고 돌멩이가 저기 박혀 있는 것을 보았다. 돌멩이를 주우러 뛰어갔다.
 하얀 눈 속에 돌이 콕 박혀 있었고 그것을 주워들어 마을 중앙의 커다란 나무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축제하던 흔적도 있는 것이 보였다.
 앞으로 나가기 위한 발걸음이 하나 찍히고
 '나무까지 달리자.'
 신발이 벗겨졌다.
 맨발로 눈 위를 밟았다.
 주변 집들이 휙휙 지나쳤다. 새하얀 눈에 발이 점점 얼어붙기 시작했다.
거대한 숨소리와 고개를 높게 들어 커다란 나무를 바라보았다. 검은색 나뭇가지가 활짝 벌리고 있었고 그 끝에 조그마한 별이 장식하고 있었다. 나무가 흔들리며 소리를 냈다.
 그리고 폭삭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소녀는 무언가 툭 떨어지는 것을 보고 사냥감을 탐색하는 듯이 바라보았다. 너무나 배고파 잡아서 먹기라도 하려고 했지만, 상상과는 달리 한 번도 본 적 없던 황금빛 열매였다.
 분명 투명한데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동그란 그 열매를 보자 소녀는 입안에 침이 고였다. 종일 굶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배고파.'
 열매를 주워 자세히 보았다. 딱딱한 열매에서 하늘 위 별보다 찬란한 황금빛이 떠돌았다. 녹은 물이 햇빛을 받는 것처럼 일렁였다. 이데인의 얼굴에 은은한 빛이 아른거렸다. 소녀의 입이 벌어졌고, 그대로 그 열매를 깨물었다.
 '맛있어.'
 정신없이 그 열매 하나를 다 먹은 소녀는 발걸음을 떼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몇 걸음도 떼기 전에 쓰러졌다. 눈 위로 검은색 기다란 머리카락이 선명했다. 배를 움켜쥐었다. 몸이 급속도로 뜨거워졌다.
 너무 아파서 움직일 수도 없었다.

***

 "딸이 너무 늦는 것 같아.”
 오늘 있었던 일을 알고 타이르듯 말하자, 소녀의 아버지는 책을 쌓아둔 곳에서 하던 일을 멈추고 창밖을 내다 보았다. 그림자처럼 집과 나무가 서 있었다. 밤하늘에 별이 하늘을 메우고 있었다. 일에 집중하느라 저렇게 늦은 줄 몰랐다.
 원래 혼나도 곧잘 이 시간 전에는 돌아오던 아이였는데.
 귓가에 엉엉 울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소녀의 아버지는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것을 모으며 나갈 준비를 하는 아내를 향해 말했다.
 "…밖에는 추우니 내가 다녀오겠소."
 차분히 말한 것과 다르게 두꺼운 옷을 집어 든 남자는 빠르게 집 밖으로 사라졌다.

***

 아이를 찾아 뛰어다니면서 바로 보이는 사람한테 물어보았다.
 "이데인 봤습니까?"
 "아니요, 못 봤는데……애가 사라졌어요?"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뛰어다녔다. 그리고 이리저리 뛰다가 소녀가 그 나무로 잘 간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떠올리자마자 뛰어서 나무로 가는 길에 손바닥에 놓일만한 작은 신발 한 켤레가 나무 쪽으로 향해 있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는 그것을 주워들며 바로 뛰어갔다. 주변 비슷비슷한 집이 바람과 함께 삼켜지고 아이가 나무 앞, 별빛을 받은 하아얗고 차가운 눈 위에 쓰러져서 색색거리고 있었다.
 밤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아이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아버지는 무릎을 꿇고 다급하게 아이를 들어 올려 새까만 머리를 걷고 눈을 감고 있는 아이의 이마에 손을 대 보았다.
 이상하리만큼 뜨거웠다.
 무서웠다.
 아이가 흐릿한 시선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보더니 가냘픈 숨소리로 뱉었다. 그리고 파고들었다.
 "아빠 미워……."
 아버지는 끌어안았다.
 조그만 아이가 품속에서 숨을 내뱉었다, 들이마시기를 반복했다.
 "……미안하다."
 약초사의 집으로 뛰어갔다. 볏짚 가운데 있는 문을 쾅쾅쾅 두드리며 "약초사님, 아이가 아파요, 제발 나와주십시오!" 외쳤다.
 잠에서 덜 깬 약초사가 잔뜩 헝클어진 얼굴로 나와 지도자를 보았다.
 아이를 보았다.
 다시 다급한 아버지를 보았다.
 거친 숨이었다.
 "잠시 기다리세요!"
 불이 켜지고 약초 냄새가 훅 밀려왔다. 아이에게 손을 대 보았을 때 너무 뜨거운 아이의 몸에 약초사는 화들짝 놀랐다.
 "왜 이렇게 뜨거워?"
 아이가 열에 들떠 품 안에서 뒤척였고, 약초사는 열을 내리는 약초 빻은 가루를 바구니에 담아 내주었다.
 풀 냄새가 떠밀려왔다. 약초사는 끓이는 온도, 섞을 것과 따로 먹일 것 등을 적어준 쪽지를 그 위에 올려놓으며 아이에게 지금 먹이라고 말했다.
 "사례는 따로 하겠습니다."
 "아유, 괜찮습니다. 지도자님."
 허리를 숙이고 한 손에는 아이를, 한 손에는 바구니를 집은 아버지의 등이 멀어졌다.
 아버지는 밤새 간호했다.
***

 소녀는 축제 기간 내내 열에 들떠 누군가 먹여주는 것만 받아먹었다. 더웠다, 춥기를 반복하면서 헛소리를 내뱉었다.
 "으으응……."
 딸이 어리광 피우듯 내뱉는 신음에 부모의 시름은 깊어졌다. 낮에는 소녀의 엄마가 돌보고 아버지는 밤을 지새웠다. 차가운 천을 소녀의 머리에 올려놓았다.
 축제가 중간쯤 되어서야 정상인보다 조금 높은 열로 눈을 뜰 수 있었다. 소녀의 엄마가 보였다. 정신을 차리니 자신이 집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집에 안 들어왔던 것과 제멋대로 굴었던 것이 생각났다.
 "엄마……."
 말을 꺼내려던 순간, 엄마의 품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사경을 해맬 때 안겼던 조금 다르고 익숙한 냄새라는 것을 알았다.
 "나아서 다행이야."
 소녀는 가슴이 먹먹했다.
 그리고 밤바람이 매섭게 집에 들어왔다. 소녀가 눈만 굴려 엄마 품에 안긴 채로 아버지를 보았다. 소녀의 금빛 물결을 품은 눈을 보는 아버지의 얼굴이 핼쑥했다.
 한숨을 쉬는 것 같더니, 얼굴을 쓸어내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의 품에서 놓여난 소녀는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눈 아래 다크서클이 짙었다. 엄마는 얼핏 웃으면서 말했다.
 "아가, 내가 차를 내릴 테니 아빠한테 차를 가져다주겠니?"
 소녀의 말을 듣지도 않고 차를 가지러 갔다. 소녀는 싫다고 하려던 입술을 삐죽였다. 그리고 차를 가져온 엄마를 보고 소녀는 팔을 쭉 뻗어 받았다.
 그것을 들고 뛰어가려다가 "엎어질라!" 엄마가 깜짝 놀라는 소리에 괜히 발을 쿵쿵대며 머리로 문을 밀었다. 삐걱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아버지가 소녀와 똑같은 색의 눈으로 들어오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들어올 때는 들어가도 괜찮냐고 물어봐야 한다."
 엄격하게 말했다. 소녀는 입술을 내밀며 "들어갈게요."라고 조그마한 오리처럼 말했다.
 문에서 머리를 떼고 팔을 올려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뒤돌아서 가려던 소녀의 발걸음을 아버지가 붙잡았다.
 "몸은 괜찮니."
 소녀의 고개가 돌아가고 몸이 돌아갔다.
 "괜찮아요."
 소녀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버지가 드디어 걱정해줬다는 사실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빨리 도망치려고 하다가 고개를 들어 아버지가 하는 옆모습을 보았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런데 어색했다.
 까치발을 들고 종이를 보던 소녀가 고뇌에 차서 주름진 아버지의 얼굴을 한참 보다가 결국 궁금증에 못 이겨 물었다.
 "무슨 일을 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눈동자에 일을 꺼내고 소녀를 넣은 채로 한참 보더니 말했다.
 "……사람들이 더 행복해지도록 하는 일을 한단다."
 '그렇구나.'
 소녀는 자신의 아버지는 대단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며 "저도 볼래요!" 소리 질렀다. 그리고 팔을 벌렸다. 활짝, 아주 활짝 벌린 팔을 보던 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그렇게 아무 때나 소리 지르면 안 된다."라고 일렀다. 소녀는 잠시 시무룩해졌다. 그런 소녀를 보던 아버지는 겨드랑이 밑을 들었다. 아버지와 눈높이가 같아졌다가, 아버지의 배가 등에 닿는 것을 느끼며 까르르 웃었다.
 소녀는 의자에 발딱 서서 종이를 샅샅이 보았지만, 소녀의 눈에는 그저 기다랗고 까만 줄로만 보였다. 신기해하며 그것을 들쑤시자, 종이가 흩어졌다.
 아버지는 소녀의 손을 막으면서 말했다.
 "그러면 안 돼."
 딱딱하게 말하는 것에 소녀는 "알았어요." 시무룩 고개를 떨궜다. 털썩 아버지 앞에 앉았다. 땅바닥을 쳐다보다가 또 발장난을 치는 자신의 딸을 보던 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진짜 괜찮아졌나 보구나……."
 그리고 소녀의 머리에 차가운 손을 올리며 말했다.
 "다행이다."
 소녀는 어색하게 올렸다가 뗀 그 손에서 익숙한 느낌이 났다고 생각했다.

***

 소녀는 그 후로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면 자주 방에 같이 있었다. 소녀의 엄마가 "아빠 방해되잖니!"라고 말했지만, 소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들어갈게요!"라고 외치며 들어갔다.
 "아무 때나 소리 지르는 거 아니라고 했지."
 점잖고 엄하게 말하는 아버지 앞에서 찔끔하다가 화난 표정이 아니라는 것을 안 소녀는 금세 해맑게 웃으면서 책상 앞 벽에 붙어있는 기다란 의자에 앉아 밖에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떠들었다.
 칭찬도 들었다고 자랑하며 다리를 앞뒤로 흔들흔들했다. 그러던 중 책상 위에서 계속 일을 하고 계신 아버지를 바라보았고,
 '내 얘기 안 들어주나?"
 소녀는 한창 말하다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말이 없자 소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신난 소녀는 또다시 자신이 칭찬받은 것을 읊었다.
 얘기하다 보면 괜히 심심해서 책상 주위에서 아버지가 오늘은 또 무슨 일을 하나 까치발을 들고 들여다보았다. 그럴 때면 책상에 올려주었다. 소녀는 그 팔이 올려주는 것이 기분 좋아서 웃다가 뭔지도 모르는 글자를 들여다보았다.
 아버지와 똑같이.
 가끔은 관심 달라면서 훼방도 놓았다.
 아버지는 그럴 때면 꾸짖었지만, 소녀는 매일 아버지를 쫄래쫄래 쫓아다녔다. 아버지가 장작을 팰 때도, 묵묵히 소녀의 엄마 일을 도와 빗자루로 눈을 치울 때도 흉내 냈다.
 물론 그러다가 푹 넘어지면 조심하라고 혼나기도 했다.
 소녀가 아버지 무릎 위에서 등을 기대고 잠들고, 소녀의 엄마는 그 옆에 앉아 바라보았다.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소녀를 안은 아버지는 소녀의 방에 살포시 놓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연재하러 아주 드문드문 올릴 것 같습니다. (초반 프롤로그 부분 제외하고 아주 느린 텀의 자유연재) 다른 것도 준비하고 있고 병행하는 일도 있기 때문에... ㅜㅜ 이곳에는 처음 글 올리네요. 반가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