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의 세월이 흘렀다.
 ‘눈과 얼음이 녹는 땅’ 사람들과 ‘강인한 자들’은 ‘아버지’가 식량을 주는 것에 익숙해져 갔다. 소녀의 고향 사람들은 그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괴수를 처치할 도구를 만들고
“쏴라!”
 전략을 짜며 점점 성장해갔다.
 소녀는 그동안 나무를 통해 세상을 뒤집어 가며 옮겨 다녔다. ‘눈과 얼음이 녹는 땅’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찬란한 나무의 땅’과 ‘푸른 나무의 땅’에 가기도 하였으며 그곳에 반한 사람들도 꽤 있었다. 물론 지도자도 다녀왔고 족장도 다녀와 그곳을 탐방하며 앞으로 이곳을 어떻게 발전시켜야 할지 의논하고 연구했다.
화살이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데인, 뒤를 부탁해.”
 그리고 지휘관은 사람들이 위험하다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딸을 데리고 다녔다.
 한편에서는 그런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미친 여자, 자신과 딸의 목숨을 내놓은 여자.
 그리고 괴수 토벌을 최단 시간, 최대로 하는 길이 남을 용맹한 전사.
지휘관은 옆에서 같이 늑대를 타는 소녀에게 한 번 시선을 주고 괴수를 향해 눈을 돌렸다.
흰털이 뒤덮인 괴수는 난동을 부렸고 거대한 두 손으로 바닥을 내려치자 두꺼운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늑대는 그 사이사이를 피하며 달렸고 주위 작은 괴물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멈추지 마라!”
괴수들의 비명과 커다란 발소리가 들릴 때 다시 단단한 밧줄이 달린 창과 돌이 날아갔다. 돌이 달린 밧줄이 괴수의 팔에 감겼다. 사람들은 창과 화살에 피를 쏟아내고 있는 괴수들을 향해서 달려갔다.
괴성이 귀를 찢는 듯했다.
괴수는 거대하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많은 사람의 힘이 담긴 줄을 끌었고 사람들은 끌려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지휘관은 투석기로 돌을 날리라고 지시했고, 내내 눈을 노리고 있던 소녀는 달리는 늑대 위에서 화살을 쏴 눈을 명중하였다.
 괴수가 비명을 터트리며 손을 휘저었다.
 커다란 돌이 날아와 일제히 괴수를 맞췄다.
 지휘관이 외쳤다.
 “잡아당겨!”
 레오미가 커다랗게 외치자 사람들은 있는 힘을 쥐어짜서 잡아당겼다. 늑대는 각자 방향으로 다른 방향으로 달렸다. 결국, 괴수의 움직임이 느려졌고 그 타이밍에 맞춰 힘을 가득 실은 창이 관통하였다.
 지휘관한테로 피가 한가득 튀겼다.
 쿵.
 드디어 괴수의 머리가 뚫린 채 앞으로 넘어지고 지휘관이 관통한 창을 잡으며 피로 얼룩진 머리를 밟았다 .
 피 가득한 창을 뽑아 들고 사람들의 중심에서 말하였다.
“오늘은 축제다.”
 씩 웃으며 피를 손으로 닦아냈다.
 함성이 터졌다.


“하얀색의 노래를!”
 “노래를!”
불꽃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밤하늘 위로 타올랐다.
 ‘강인한 자들’이 큰 피해 없이 괴수를 잡은 것을 기념하며 아주 가끔만 꺼내는 포도주를 꺼내 서로 잔을 부딪쳤다.
 “오오, 지휘관! 우리 자랑스러운 족장님께서 오셨다!”
 사람들은 깔깔 웃음을 터트리며 휘파람을 불었고, 그곳에서 괴수와 다른 위험한 종족이 없는지 딸과 함께 돌아본 지휘관이 서 있었다.
 옆에서는 소녀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자랑스러워했다.
 “당연한 말씀.”
 그 말에 아저씨는 호탕하게 웃었고, 입에다가 제일 커다란 잔에 담긴 포도주를 콸콸 들이부었다. 옆에 늘 함께 다니는 아내는 “술 좀 그만 마셔.”라고 나무랐다.
 “왜 이런 날 마시면 어때. 오늘 큰 부상자도 없이 잘 싸웠는데 이런 날 아니면 언제 마신다고!”
 “당신, 슬프다고 술 마시고 기쁘다고 술 마시고. 내가 모를 줄 알아?!”
 “싸워라, 싸워라!”
 “악, 이것들까지!!!”
 두 사람이 투닥투닥 싸우고 옆에 사람들이 한쪽씩 편을 들어 눈사태 일어난 집에 얼음을 던졌다. 본래부터 투쟁을 몸소 겪었던 이들은 이 정도 싸움이야 본인들이 잘 해결할 일이고 심지어는 즐길 거리라고 생각했다. 이를 걸고 내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소녀도 익숙하게 팔까지 휘두르며 소리쳤다.
 “와! 아줌마 엄청나게 세다! 아줌마 파이팅!!”
 마침 아저씨의 목을 드센 팔로 휘감고 있었고 아저씨는 술에 취한 채 “살려줘!!”하며 비명을 지르며 꽥꽥하고 있었다.
 “이놈! 술 잔뜩 취하고 괴수라도 마주치면 어쩌려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터졌다.
 소녀도 따라 웃고 있었다.
 레오미는 그저 씁쓸하게 불꽃이 일렁이는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정도 결판이 난 것 같아 보이자 지휘관은 얼굴을 갈무리하며 외쳤다.
 “그만! 내일을 위해 무기 점검하고 식량들 챙겨요. ‘눈과 얼음의 땅’은 내일 곧바로 들어갈 겁니다!”
“끝장을 봐야지, 내일 축제인데 지휘관 좀 봐주면 안 되겠소?”
그러나 단호한 지휘관의 얼굴은 단호했다. 사람들은 결국 투덜투덜하며 정리했다. 소녀도 엄마가 다음에 할 말을 알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이데인, 넌 날 따라오도록.”
역시나였다.


“이데인, 집중해!”
여전히 소녀의 입술은 삐죽 나온 채였다. 명백히 오늘은 하기 싫은 얼굴이었지만, 지휘관은 어쩔 수 없이 다그쳤다.
 “맨날 나한테만 그래.”
 늘 이 시간과 괴수와 싸울 때면 엄격해지는 엄마 때문에 크게 말할 수 없는 소녀는 중얼거렸다. 뛰어가기도 싫은지 눈만 퍽퍽 차는 딸에게 어미가 말하였다.
 “빨리해!”
 “알았어요.”
 소녀는 눈 속에 파묻었던 단도를 발로 차서 올리고 재빠르게 손으로 잡았다. 귀찮은지 크게 휘두르며 뛰어왔고 아까 엄마가 했던 것처럼 위로 뛰어올랐지만,
 어미는 묶여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지휘관은 단순하게 두 손으로 아이의 팔을 잡아 멈춰 세웠다.
 엄마는 아이가 대롱대롱 매달려 그 유연한 다리를 올려 발로 팔을 밀치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 안간힘을 쓰는 것이 빤히 보였지만 레오미는 아직 무르익지 않은 힘에 놓을 만큼 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아!!! 엄마아, 너무 빨리 잡지 말라니까.”
 내내 밀치려던 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소녀가 뾰로통 말하였다.
 그 말이 들리자마자 무슨 나무에서 그네가 휙 뒤집히듯 지휘관이 자신의 오른팔을 소녀의 오른팔 뒤에 가져가 슬쩍 꺾는 척을 했다..
“실전에서는 느리게 없단다, 아가.”
 엄마가 인제야 즐겨 쓰는 호칭을 부르자 소녀는 약간 부루퉁했던 것이 풀리는 것을 알았고 투정을 부렸다.
“아야, 아야!! 엄마 아프다고!”
“소용없어, 안 아픈 거 다 알아.”
아픈 척하면서 빠지고 놀 궁리만 가득하던 소녀는 이미 엄마가 속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음을 알았고
“다시!”
 다시 지옥에 빠져야 했다.


 “으아, 나 힘들어.”
소녀는 눈 위에 발라당 누워버렸다. 엄마는 오늘도 저 괴수를 처치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놀지도 않고 술을 마시지도 않으며 자신을 이렇게 몰아붙였다.
 “맨날 이런 것만 알려주고. 나도 다른 애들이랑 놀면 안 돼?”
 어찌나 촘촘하게 연습을 하는 건지 이제는 진도를 복습까지 하며 달달 외울 정도였다. 심지어 하늘이 까맣게 타들어 갈 때까지 혹사당해야 했기에 소녀는 진이 빠져 누워있었다. 그 모습을 마냥 보던 엄마가 말하였다.
 “아가.”
“응”
소녀는 별을 담은 눈으로 엄마를 쳐다보았다. 진지하게 부른 모습에 뭔가 답을 해줄까 싶었지만
“우리 아가는 동작이 크단다. 눈에 너무 빤히 보여.”
 결국 맨날 지적받던 그거였다.
 그 말에 나왔던 입이 더 나왔고 소녀는 “숨기는 게 잘 안 되는데 어떡해.” 삐죽삐죽 말했다.
 엄마는 크게 웃으며 그러다가 입이 안 들어갈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소녀는 말했다.
 “나 이제 그런 말 안 믿거든!”
 “우리 딸, 다 컸네.”
더 크게 웃으면서 잠시 ‘찬란한 나무’에 가기 전을 떠올렸다. 레오미는 다시 어두워지려던 표정을 감추고 딸을 위해 말하였다.
“그래도 연습하렴. 강한 사람들 만날수록 네가 가지고 있는 칼을 숨길 줄 알아야 한단다.”
 “알았어.”
 소녀는 정말 삐진 듯 시무룩했다. 그 모습에 어미는 귀여웠지만, 지적할 때는 조금이라도 단호해야 한다고 자신을 스스로 다독였다. 그리고 소녀가 내내 투덜거렸던 얘기를 꺼냈다.
 “이곳 생활 싫니?”
엄마는 진지하게 묻는 것 같았다. 소녀는 내내 자신이 투덜거렸던 주제였지만 진심은 아니었는지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조금 있다가 입을 열었다.
 “으응, 힘든 것도 있지만 가끔은 재밌는 것도 있어서 막 나쁘진 않아.”
 곧바로 늘 소녀 스스로 생각하던 걸 덧붙였다.
 “하지만 나 아빠랑 친구들이 보고 싶어.”
 무슨 뜻인지 알았다.
딸이 견딘 시간은 자그마치 3년이었다. 원래라면 또래 아이들과 사냥을 배우며 괴수를 처치하는 연습을 하는 나이였다. 아무리 딸의 재능이 좋다고 하더라도 신체 능력은 아직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찬란한 나무’에서 오면 곧바로 이곳으로 왔기 때문에 아빠와 또래같이 뛰어놀만한 친구들을 못 봐서인지 얼굴에는 점점 그늘이 지는 것 같았다.
그 사실이 미안했다.
어른들의 욕심 때문에 아이를 떠미는 건 아닌지 늘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커지는 불안감 속에서 레오미가 말하였다.
 “이번에 축제가 시작되면 아빠랑 할아버지까지 모두 같이 놀자.”
 “정말?”
 딸은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며 다시금 물었고 엄마는 대답했다.
 “응 정말.”
 탄성을 터뜨리며 좋아하는 딸은 엄마를 껴안았고 엄마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저 멀리 병사들이 보였다. 자기도 모르게 꼭 껴안았던 레오미는 숨 막힌다며 까르르 웃는 소녀를 놔줬고, 병사들은 경례했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같이 갈 고향의 사람들이 똑같았다.
 “오늘도 아저씨 가는 거야?”
 소녀가 묻자 ‘눈과 얼음의 땅’ 사람들 몇몇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손을 잡았고 뒤에 있는 엄마를 향해 손을 흔들며 해맑게 말하였다.

“다녀올게!”
 딸은 신나서 뛰어갔다.


“이번에는 제대로 작동하는 거겠지요?”
 소녀가 저 멀리서 화려한 황금빛과 함께 나타났다.
 ‘아버지’는 가지에 닿을 듯 높게 뻗어있는 철창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철창에는 갈라지는 사이사이마다 붉은 열매가 박혀 있었다.
 옆에 선 붉은 머리 하녀와 앞에 서서 자신 있게 자신을 바라보는 파란 눈의 금발 머리 소년.
 그 소년이 자신 있게 말하였다.
 “확실해요. 실험도 다 마쳤죠.”
 졸릴 텐데도 불구하고 신나게 뛰어다니며 하인과 하녀를 골탕 먹이고 있을 때, 소녀는 ‘아버지’가 보여 저 멀리에서 뛰어왔다.
드넓은 ‘찬란한 나무의 땅’ 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일제히 날리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선 소녀가 물었다.
 “이게 뭐예요?”
 붉은 열매가 일제히 박힌 칠흑같이 검은 철창에 손을 갖다 대려는 순간 ‘아버지’가 그 손을 낚아채며 말하였다.
“다치십니다.”
 “왜 다쳐요?”
 소녀는 멀뚱멀뚱 보았다. 그 말에 ‘아버지’는 옆에서 설명해주려는 소년을 손으로 슬며시 막으며 말했다.
 “이번에 새로 개발된 기술입니다. 조심해서 나쁜 것 없죠. 그리고 아가씨의 손은 누구보다도 귀한 손 아닙니까.”
알지 못한 것을 아쉬운 눈으로 보았다. ‘아버지’는 무슨 눈빛인지 안다는 듯이 바라보았고 그런 소녀를 막기 위해 말하였다.
 “아가씨, 많이 피곤하실 텐데 주무시지요.”
 평소 같았으면 고집이라도 부릴 텐데 소녀는 오늘만큼은 기분이 좋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쫓아와 죄송하다고 ‘아버지’께 사죄하는 하인, 하녀들을 등지고 하녀장을 따라갔다. 뒤에서는 소리가 쫓아왔다.
 “아주 잘하셨군요. 역시…….”
소녀는 칭찬받는 사람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보다가 휙 돌아보았다. 잘 지어진 ‘찬란한 나무’의 집이 소녀를 바라보았고 하녀장의 손에 이끌렸다.
 하품이 나왔다.


“아가씨, 이제는 씻으셔야죠.”
 소녀는 밤의 일이 피곤하였는지 어느새 잠들어버렸다. ‘아버지’는 오늘은 집에 돌아가지 않고 주변을 돌았으며 바로 소녀와 함께 간다고 말하였기에 ‘찬란한 나무’에 있던 사람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청소를 했다.
 “다 잔 후에 깨워서 씻기십시오.”
 규칙과 계획이 철저하기로 유명한 ‘아버지’의 말에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해가 잠드는 시간, ‘찬란한 나무’를 통해 갈 시간이 되자 하녀장이 들어와 소녀를 깨우고 씻겼다.
 소녀는 오늘 빨리 가야 한다면서 그 과정에서 건네주는 옷만 입었다. 하녀들은 말괄량이 소녀 탓에 긴 머리만 겨우 물기 안 떨어지게 털 수 있었다.
 사람들은 물 때문에 눌어붙은 옷에 체념하며 문을 열었다.
 시원한 밤공기가 쏴 들어왔다.
 때마침 거대한 나무의 잔가지에 얽힌 나뭇잎도 흔들렸고 아련한 별빛에 나무 그늘이 소녀의 얼굴에 그림을 그려놓았다.
 쭉 그것을 보던 소녀가 앞을 보자 푸르스름한 빛 사이로, 날리는 잔디 위에 ‘아버지’가 서서 이곳을 지켜보는 것이 보였다.
 수많은 병사가 갑옷을 입고 줄지어 서 있는 것도 함께.
 발을 뗐다.
 제대로 털지 않은 것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던 하인들도, 하녀들도 뒤에서 허리를 숙였다.
 한 걸음, 한 걸음 작은 발이 잔디 위를 지나칠 때마다 고향 사람들도 있는 것이 보였고 소녀는 생각했다.
 ‘오늘은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날이 될 거야.’
 신난 마음에 한 발 한 발 내딛던 발은 점차 나는 것처럼 가벼웠다. 다리에 달린 날개는 그만큼 기쁨으로 변해가며 미소가 얼굴 한가득 피어올랐다. 고향 사람과, 아니 어쩌면 이분들까지도 축제를 즐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모두 함께 즐기면 그만큼 더 재밌을 거라고 생각했다.
 바람은 귓가를 휙휙 지나쳐가고 은퇴해서 못 본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엄마, 모두와 재미있는 축제를 벌일 생각으로 힘차게 뛰어가던
그때.
 “뭐 하는…….?”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와 별빛에 은은하게 번지는 나무 그림자. 그리고 사람들.
 사람들이 일렁였다.
 수십 명의 병사와 그들이 숨기고 있던 무기.
 사람들이 일제히 ‘찬란한 나무’에 있던 눈을 옮겨 소녀를 향했다. 그들의 손은 재갈과 줄이 있었으며 소녀를 잡으려고 하였다. 소녀는 고향에 같이 갈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왜 갑자기 사람들이 돌변한 것인지 겁에 질렸고
비명을 질렀다.
 그 뒤에 선 아저씨가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소녀는 그때서야 무언가 깨달았다.
 그 순간.
 자신을 가리키며 한 번도 듣지 못한 총성이 귓가를 스치고, 볼에서 질척한 피가 후드득 떨어진 것을 보았다.
 “아, 아저씨…?”
 다시 한 발.
 소녀는 비명을 질렀고 사람들에게서 벗어나려고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다리를 뒷걸음질 쳤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서늘한 감정.
 “도와줘!!”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사람들이 잡으려고 하자 소녀는 몸을 피하며 늘 가지고 다니라고 했던 단검을 손에 쥐었다.
 ‘엄마가 말했던 걸 떠올려, 제발, 제발…!’
 이곳에서 도망쳐야 했다.
 “잡아!!!”
 팔을 긋고 비명이 터지는 가운데, 수많은 사람 가운데에서.
 눈물로 얼룩지려고 한다.
 다시 총성.
 ‘고향은 안 돼.’
 사람들이 팔을 붙잡으며 땅에 소녀를 처박아버리고 악몽 같은 비명이 하늘을 가로지를 때
‘고향은 안 돼!!!’
비명은 재갈이 물리고
 ‘안 돼…….’
 눈물 사이로 일그러진 황금빛이 보였다.


 파동이 번졌다.
수많은 병사가 눈 덮인 고향에 왔다. 사람들은 축제 준비에 한창이었고 무슨 소리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병사들은 사람들을 향해 총을 겨냥했다. 쿠구궁 소리와 함께 대포가 거대한 몸집을 돌렸다.
지휘관과 지도자는 그 중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지휘관의 눈동자가 딸에게로 향하였다.
사태를 짐작했음을.
 “……이데인.”
 딸은 아빠가 읊조리는 자신의 이름을 들었다.
 “무기를 꺼내와!!”
일방적인 학살을 알리는 총은 사냥을 시작하기 전 틈을 주지 않았다.
평화롭던 마을이 수많은 사람에 의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음식과 옷을 준비하던 사람들은 그대로 총알을 맞았고 상황을 깨닫기도 전에 비명을 질렀다. 눈 위로 새빨간 피가 물들었다.
“그만둬!!!”
중심에서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엄마와 다친 사람들에게 뛰어가는 아버지까지.
제일 앞에 있는 지휘관과 주변에 있던 ‘강인한 자들’은 자신들의 무기로 병사들 몇몇을 죽일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럴 능력이 되지 않았다.
거대한 돌이 날아오든 말든 병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일방적인 학살을 자행했다.
곧이어 하늘에는 수많은 불꽃이 뒤덮고 마을은 불바다가 되었다.
매캐한 냄새가 진동했다.
소리 없는 비명 사이로 눈물이 새어 나왔다.
생전 처음 보는 상황, 그렇게 괴수를 물리쳤던 사람들도 앞서나간 기술에는 죽어 나갔다.
“방어를!”
 엄마는 전멸하는 피해를 막으려고 고군분투했다.
 주변은 눈이 덮여 있어 덜했지만, 뒤에서는 불길이 치솟고 이쪽으로는 수없이 많은 화살이 날아왔다. 엄마는 이곳으로 오기 위해 총알도 맞아가며 병사들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병사들 사이로 본 엄마의 눈과
 “이데인!!!!”
총을 맞아 무릎을 꿇으며 뻗어 나가는 손.
죽어가는 짐승의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제발……..’
 소녀는 쏟아지지 않는 신음을 내었으며 묶인 팔과 다리는 요동만 칠 뿐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하얀 눈에 새빨간 피가 물들었다.
 ‘엄마…….’
눈물처럼 신음이 흘러내렸다.
이미 힘을 잃은 발길질은 누구한테도 먹히지 않았다. 소녀는 볼 수도 없는 세상을 향해 눈물만을 흘렸다.
 ‘아버지’는 서서히 잦아드는 총소리 가운데 잡힌 소녀를 데리고 나무로 다가갔고,
소녀는 손에서 피어나는 얼룩진 황금빛 색을 보았다.


 소녀의 목에는 지워지지 않는 방울이 달렸다.
눈을 감는데 자꾸만 보였다.
“도대체, 도대체 왜……?”
사지가 잡힌 채 재갈을 뱉고 처음으로 무엇을 물어보는지도 모르는 말.
배신자와 일그러진 황금색만 가득한 세상.
 "그거 아십니까?”
 그 세상에 이질적인 새하얀 매만 하늘을 난다.
 "당신이 고개를 들어 올려 바라본 이는 단지,”
 그리고 이곳,
“무언가를 밟고 올라선 이일 뿐이지요. 안 그럽니까?”
세상의 정점에
 "아가씨."
 이데인이 있었다.


그날 이후 몇 날 며칠을 계속 열에 시달렸다.
식음을 전폐했지만, 사람들은 억지로 먹였다.
 토해도 소용없고 위협을 하고 도망을 쳐도 소용없었다.
 죽지 못해 깨어나 버린 자신을 원망하며 침대를 다 적실 때까지 울었다. 겨우겨우 정신이 들어 창밖으로 차가운 밤, 창백한 달이 비추는 병사들의 수많은 갑옷과 ‘찬란한 나무’를 보았다.
 창문은 열리고 유리는 깨져 별처럼 쏟아진다.
 “하얀 꽃잎이 만발하는 꽃씨를 가져와 줘. 소피아.”
 뒤에는 밤 그림자가 거대하게 드리우고 유리를 쥔 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
황금빛 찬란한 색에 새하얀 꽃잎이 물들었다. 바람은 불어 긴 머리는 뒤엉키고
‘이곳이 하얀 꽃잎에 휘날리는 것을 볼 수 있도록.’
 꽃잎은 하늘에서 내리듯 흩날린다. 더 떨어지지 못할 눈물은 피와 얼룩졌다.
 소문이 있었다.
 그곳에는 이곳을 누구보다 따뜻하게 만드는 소녀가 있다. 그 소녀가 매일 두 번 자신의 손으로 이 거대한 황금빛을 만들어 이곳을 따뜻하게 해준다. 그 소녀는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의 구원자이며 그곳이 늘 하얀 꽃이 만발하게 만들어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만든 사람이다. 그리고 그 소녀로 인해 우리의 삶이 더 나아진 것이다. 사람들은 그 소녀를 존경하였으며 그 소녀가 오게 된 것은
“아가씨, 살아남아야 해요.”
 우리에게 ‘기적’이다.




 소녀가 드디어 철이 들었군요! 제가 좀 책 속 살인마 기질이 있습니다.ㅋㅋㅋㅋ 긴 프롤로그를 따라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분량 조절 실패로 오늘은 더욱 글이 길군요 ㅠ 초반에 다소 루즈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봐 주셔서 감사했답니다.(WBN이 되는 건 언젠가 되겠지...라고 생각만 했는데 ) 다음 연재는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들고 올게요. 혹시 궁금한 것이 있다면 마음껏 질문해주세요. 스포 아닌 선에서 답해드릴게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