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린다.



이번 겨울에도,


저 위에선 어김없이 하얀 눈이 내린다.


나는 김이서린 베란다의 창문 너머에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회색빛.

신기하게도 하얀 눈을 내리는 하늘의 색은 회색이었다.

이미 하늘을 뒤덮을 정도의 구름에, 태양은 보이질 않았다.


어두운 거실과 식어버린 코코아.

나는 한숨을 쉬는 소파에 걸터앉아 꺼진 TV의 화면을 응시했다.


허전하다.

흐릿하게 우리를 비추고 있는 화면 속의 실루엣은 어째선지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원래 이 소파가 이렇게나 넓었던가.


나는 오늘도 무심코 중앙이 아닌 오른쪽 구석자리에 몸을 밀어넣고 있었다.


차갑다.


나는 괜히 반대편의 눌린 자리를 한 번 쓸어보았다.

쓸리고 눌려 헤진 가죽의 촉감이 느껴졌다.


이번엔 리모컨을 들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내려놓았다.

거실의 차가운 공기만큼이나 미끈거리는 리모컨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어째선지 이 침묵을 깨고 싶진 않았다.

단지 밖에서 조용히 모든 것을 토로하고 있는 눈의 말을 듣고 싶었다.


..배가 고프다.


나는 굳어서 딱딱해진 러그를 밟고 주방으로 향했다.

그릇과 식기를 2개씩 준비했다.

딱 두 명 분의 우유와 2가지 종류의 시리얼.


여기엔 내가 먹을 오트밀을, 저기엔 그녀가 먹을..

손이 멈췄다.


나는 시리얼을 들고 다시 소파로 돌아왔다.

늘 아침으로 먹던 익숙한 오트밀과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던 별모양의 초코 시리얼.


왠지 오늘은 초콜렛이 먹고 싶다.

나는 크기가 조금 작은 숟가락을 들어 초코 시리얼을 떠먹어보았다.


이런 맛이었구나.


달다. 

좀전의 식은 코코아보다도 훨씬.


심지어는 쓸 지경이었다.

이런걸 매일 먹는다는건 상상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과연 오트밀을 힘들어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배가 불렀다.

오트밀은 이미 불어 먹을 수 없는 상태였다.


나는 그릇을 치우고 다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이 점점 뒤덮여가고 있었다.

회색빛으로 뒤덮인 하늘에서 내려온 하얀색으로.

회색빛 세상을 반사하던 회색에서 하얀색이 내려오고 있었다.


집 앞에선 아이들이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털모자와 목도리.

두꺼운 장갑을 끼고 화단 위의 눈들을 쓸어모았다.


'윌슨씨.'

'윌슨?'

'이제부터 이 눈사람의 이름은 윌슨이야!'

'참나.. 유치하게.'


..다시 생각해보면 나름 고급진 이름이었던 것 같다.


나는 계속해서 밖을 내다보았다.

크리스마스 당일에 거리를 다니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우산을 함께 쓰고 걸어가는 커플이나 가족.

조용하던 옆집 노부부의 집에서도 어린 가족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은 그 모든 것을 지워가고 있었다.

천천히, 그리고 매우 천천히.


12월의 저녁은 아주 빠르게 찾아왔다.

나는 더이상 어두워질 수 없을 것 같던 회색이 검게 물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적게나마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이제 김이서린 베란다의 너머로는 가로등과 한창의 저녁식사로 열기를 띄고있는 등만이 비춰지고 있었다.


나는 담요를 걸친채 간단하게 저녁을 해치웠다.

따듯한 코코아와 식빵 몇 조각.


TV는 아직도 검은 화면이었다.

나는 째깍거리며 흘러가는 거실의 시계와 말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몸에 열기가 돌자 책을 나는 몇 번 집었다가 놓았다.

한 페이지.

대부분은 한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 채 덮어버렸다.

분명 같이 읽을 땐 재밌었는데.


왠지 모를 불쾌함이 느껴져서 나는 옷을 챙겨입었다.

바깥 공기를 쐬고 싶어졌다.


하늘의 구름이 모두 떠나가고 텅 비어버린 탓일까,

아파트의 옥상에는 바람이 꽤나 불어왔다.

나는 난간에 붙어 주변을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 번화가에는 듬성듬성 남은 눈과 LED조명, 사람들이 따듯한 온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 외엔 모든 것이 하얬다.

나무도, 주택가의 지붕도, 알록달록한 놀이터의 기구들도.


내가 내뿜는 입김까지도.


나는 흩어져가는 입김을 바라보다가 무심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별들이 조금 떠있었다.


저건 북두칠성.

그 옆에 저건 카시오페이아자리.

조금 희미한 저건 오리온자리..


나는 별자리나 별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새 별자리를 찾고 있었다.


'잘 보이진 않지만 오리온자리 아래에는 토끼자리도 있대.'

아마 잘 보이지 않는 토끼자리를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러고보면 작년의 크리스마스에도 이런 식으로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단 둘이서, 목도리 하나를 같이 두르고서는.


'어 별똥별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별똥별이랑 그게 무슨 상관..'

'메리 크리스마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옥상에서 별똥별을 보며 크리스마스를 보냈었다.


하지만 이제 목도리는 충분했다.

작년보다 날씨가 따듯해져 애써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을 필요도 없어졌다.


그러나 시렵다.

어째선지 손이나 귀보다도 몸 깊숙한 곳이 먼저 시려온다.


책을 덮었을 때보다 밀어내기 힘든 거부감이 밀려왔다.

너무나도 갑갑해서, 두르고 있는 목도리를 뜯어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누군가가 필요했다.


초코 시리얼을 맛있게 먹던 누군가가.

함께 책을 읽으면 페이지를 조금 늦게 넘겨달라던 누군가가.

눈사람을 만들면 이름을 붙여주고 다정하게 대해주던 누군가가.

이 차갑고 시린 겨울의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면, 옆에서 별자리를 조용히 읆어주던 누군가가.


'휘이잉'


나는 그렇게 한참을 몸을 움츠렸으나, 문득 세게 불어온 바람의 덕에 다시 고개를 일으키게 되었다.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리며 입에선 입김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고함을 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하지만 나는 그런 감정들을 부여잡고 겨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시금 불어오는 거센 바람이, 내가 그렇게 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별똥별?"

그곳엔 때마침 별똥별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언젠가에도 보았던 별똥별이 지나갔던 자리에,

작년에는 없었던 한 밝은 별의 옆으로 내리고 있었다.


게다가 한 번이 아니었다.


유성우.

그렇게 불러도 될만큼, 계속해서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목도리를 풀어헤쳤다.

거센 바람에 목도리는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휘날렸다.


나는 그것을, 바람이 가장 세게 불어온 순간에 손에서 떠나보내었다.


그러자 다홍색의 목도리가 하늘로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별똥별이 내리고 있는 하늘로.

이름없는 밝은 별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곳으로.


아마 주인을 향해 날아가고 있을 목도리와 별똥별들을 향해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것은 내가 그녀와 함께한 마지막 크리스마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