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信託統治絶対反対> (신탁통치 절대반대)




도쿄에서 시위가 발생했다.


오사카에서도, 삿포로에서도, 후쿠오카에서도 그렇다고 한다.




일본은 일본인의 것이라 외치며 일본인 주체의 정부의 대략 40년만의 재수립을 강력하게 원하고 있다.




.


.


.



선조 28년 가을 (1595년), 조선은 더 이상의 진격은 어렵다고 생각하여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철수했다. 

지문덕과 하늘은 히로시마에 정착했다.


"支文德さん, おはようございます。" (지문덕씨 좋은 아침이네요.)


"おはようございます。" (좋은 아침이에요.)


지문덕은 대마도에서, 하늘은 나가사키에서 전쟁을 피해 도망왔다고 이야기했다. 지문덕은 한자를 그대로 쓰고(사소우 몬토쿠), 하늘은 一海(일해, 이치카)로 개명해서 살고 있다.  히로시마 성이 싸그리 불타는 바람에 영주도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고, 땅의 주인도 모호해져서 그 참에 땅을 잡고 살게 되었다. 나중에 동래 왜관이 다시 제대로 기능하기 시작한다면 거기로 가서 가족들을 데려오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전하, 왜 정벌에서 얻은게 없사옵니다! 백성들의 민심이 들끓어오르고 있습니다!"


"호조 판서는 어찌 대마도와 장기도(나가사키)를 얻고 구주도(큐슈)의 왜인들을 복속했는데, 얻은게 없다고 할 수 있단 말이오!"


"병조 판서는 그 자그마한 땅덩어리가 십만 백성들의 목숨값을 한다고 생각하시오?"


"왜구들의 본거지 소탕의 의의가 있지 않소?"


"경들은 조용히 하시오!"


산만하던 조정이 가라앉았다. 호조와 병조판서는 얼굴이 시뻘개져 있다. 병조판서는 이 정벌의 책임을 모두 뒤집어쓸 사람 중 한명이기 때문이다.


"성난 백성들을 달랠 방법이 있소?"


"전하,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왜를 넘어가면 큰 바다가 있는데, 이 바다 너머를 탐사할 선단을 조직하여 개척하는 것이 좋을 듯 하옵니다."


병조판서가 잘리지 않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탐사 선단이 돌아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사이에 다른 탈출구가 생겨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는 왜 정벌때 왜의 선박들을 깔끔하게 정리해버린 그 장수를 기억해냈다.


"수군 절도사 이순신을 보내는 것이 가장 좋을듯 하옵니다."


선조는 이순신이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이순신을 완전히 견제할 수 있을까 하면서. 이참에 병조판서가 이순신을 저 바다 너머로 보내버리자고 하자 선조는 크게 동의했다. 이 태평양 너머로 보내면 적어도 몇년, 어쩌면 평생을 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좋소! 당장 준비를 하시오!"



장기도와 대마도로 이주한 왜 정벌에 참여했던 조선인들은 도저히 농사로 먹고 살 수 없자 반란을 모의했다. 물론 왜인들이 더 많은 상황에서 반란을 성공할 수도, 일으킬 수도 없었기에 어업이나 왜와의 교역으로 먹고살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천석꾼, 만석꾼 부럽지 않은 부자가 된 사람도 있었다. 


구주도는 왜인들을 통한 간접적 통치 상태에 놓였다. 나머지 지역은 완전히 포기했지만, 구주도까지도 포기한다면 왜 정벌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주도는 점점 조선 조정의 손을 떠나고 있었다. 구주도 주변의 섬들도 직접 통치 지역에 넣었지만, 아무래도 작은 섬이라 대마도로 이주한 사람들과 다를게 없었다.



그러는 중에 동래에서는 이순신의 바다 넘어 탐사 계획이 준비되어가고 있었다.




"돛을 올려라!"


선조 30년 (1597년) 봄, 항해 선단이 출발했다.



.

.

.



일본 전체가 끓어올랐다. 35년간의 식민지배 이후에 또 식민지배라는 생각에 모두가 반대하고 나섰다.


대한은 조용했다. 패전국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만주가 떨어져 나가고 반도 부분만 남았다. 만주는 다시 연해주와 만주로 분리되어 중국과 소련에게로 반환되고 분배되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일본 공산당이 불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