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봇대처럼 큰 너.

이런 비유를 들었다고 가정해봅시다. 키가 크기 때문에 전봇대를 가져왔겠지요.

그런데 키가 큰 것은 세상에 너무 많습니다.

기린처럼 큰 너
거인처럼 큰 너
63빌딩처럼 큰 너
에펠탑처럼 큰 너

대체 가능한 언어가 많지요.

이런 경우는 비유를 하지 않는 것이 더 탁월합니다.

비유는 시에서 너무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신중하게 사용해야 하는데요.

비유할 수 있는 언어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여야 합니다.

그저 넓기만 해서 내 마음이 호수인 것은 아니거든요. 호수와 마음의 유사성을 주목했을 겁니다.

이러한 시어 사용에서 제가 지침으로 삼는 시가 하나 있는데요.

김영승 시인의 '봄, 희망"입니다. 읽어봅시다.


일곱달째 신문대가 밀려
신문도 끊겼다
저녁이면 친구인 양 받아보던 신문도
이젠 오질 않는다
며칠 있으면 수도두 전기도 끊길 것이다.
며칠 있으면
이 생명도 이 몸에서 흘리던 핏줄기도
끊길 것이다

은행의 독촉장과 법원의 최고장
최후통첩장
수많은 통고장들이 수북히 쌓여 있다.

아내가 보낸 절교장도
그 위에 놓여 있다.

진달래가 피었노라고
아내에게 쓰던 편지 위에
핏방울이 떨어진다.
가장 빛나는 것을
나는 한 장 집어 들었다.


주목할 것은 마지막 연의 '아내에게 쓰던 편지'입니다.

아내에게 쓰던 편지가 뭘까요?

잠깐 생각해봅시다. 이것은 편지면서 편지가 아닌 것입니다. 저는 이 기교가 시어의 본질이자 시가 추구하는 언어의 정수라고 생각이 드네요.

시인이 쓰던 편지의 내용은 진달래가 피었노라는 풍경입니다. 핏방울이 떨어질 만큼 몰두해서 쓰고 있고, 가장 빛나는 것도 있습니다.

시인이 핏방울을 흘려가며 쓸 편지는 뭘까요? 시가 이미지의 예술이라는 것을 안다면 편지가 바로 시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아내를 위해 쓴 시라면 이것은 시이자 편지겠지요. 다른 언어로 대체할 수 없을 겁니다.

시인은 편지 아닌 편지를 씁니다. 그것이 빛나기에 수도도 끊기고, 아내도 떠난 상황에서 '봄, 희망'이라 말할 수 있는 거겠지요.

이처럼 비유 사용은 탁월해야 합니다. 대체 가능한 언어를 들고 오면 재미없거든요. 속성이 일치하고, 대체할 다른 언어가 없을 때 비로소 탁월한 시어가 됩니다. 어려운 일이지요. 그렇기에 가치가 있나 봅니다.

시어의 맛이 시의 맛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의 수준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시어라 봐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들 시에 사용할 언어를 고민하여 언어의 정수에 도전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