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언을 듣지 않는 폭군 탓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사람을 너무도 쉽게 믿는 조부의 천성이 문제였을까. 그 무엇이었던 간에 우리 가문의 선조분들은 전장을 떠나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고 자부한다. 표리일체의 육체와 정신은 결코 자신의 진의를 숨기지 못했으니. 명분과 명예를 들먹이면서도 그 속은 욕망에 썩어 암투를 이어나가는 이들에게 우리 가문은 좋은 하수인이었으며, 또한 농익은 사냥감이었다.


 평화의 시기, 번영을 누리는 이들 사이에서 살을 찌우지 못함은 곧 쇠락과 같으니. 우리는 그렇게 도태되었다.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는 가문의 명성은 내 대에서 끝이 나리라. 적의 목을 베는 것보다 간사한 혀를 놀리는 것이 더 큰 공으로 인정받는 사교의 장에서 재주를 지니지 못한 여인에게 주어지는 건 명예를 모르는 자의 애첩이되거나 베틀을 돌리는 아녀자가 되는 말로 뿐이니.


 그렇기에 나는 늘 그렇듯 일방적인 무시를 당하고 있다. 없는 사람처럼, 차라리 그런 취급이라면 오히려 좋았다. 권리도 누리지 못한 채 의무로 찾아온 회장. 동정조차 받지 않는다면 적어도 자존심은 꺾이지 않으니. 이런 시간조차 지나가리라, 오늘도 이렇게 흘러가리라. 하지만 그런 기대를 비웃는 것처럼, 어느 귀부인 내게로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한다. 부인의 진홍빛 드레스에 자수놓아진 문장이 지체높은 명망을 말해주고 있었다.


“즐거운 날, 홀로 무엇을 생각하고 계신가요?”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인. 지금 어느 시인이 노래한 풍요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 풍요는 분명 저 노을진 들판의 이야기겠지요. 그 또한 강대하신 분의 더없는 노력을 찬미하는 구절일테니. 언젠가 그 시인을 만나다면 큰 선물을 안겨줘야 겠군요.”


 진실로 고귀한 이가 이런 같잖은 질문을 위해 손수 나를 찾아왔는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 의심대로 부인은 나를 유혹했다.


“당신에게 공작과의 만남을 주선해 수 있어요.”


 말이라도 붙일 수 없는 이와의 만남. 안면이라도 튼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사교의 장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거리가 늘어난다. 그것은 어떤 공적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영예이지만.


“황송하지만 갑자기 그런 제안을 하시는 이유를 여쭐 수 있을까요?”


“언젠가 당신의 선친께서 그이에게 이런 말을 했었죠. ‘고결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난봉꾼과 할 이야기는 없다.’ 후후, 아무리 그래도 상관한테 하는 말 치고는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용서를 구해야 할 지...”


“오해가 있었네요. 당신에게 사과를 들으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저는 당신의 가문을 돕고 싶을 뿐이에요. 단 하나의 조건만 수용해주신다면 전적으로 당신의 편이 되어줄 수 있어요.”


 머리 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런 모욕을 듣고도 내게 허울 좋은 제안을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단 하나의 조건, 그것이 일전의 모욕조차 덮을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큰 것일까.


“그 하나의 조건을 제가 충족할 수 있을 지 자신이 없네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아요. 단순한 일이에요, 아주 단순한…자리를 옮기죠.”


 그렇게 말하는 부인의 미소에는 비릿함이 있었다.


 실크로 덮인 회랑을 지나 당도한 곳은 거대한 서재였다. 중앙의 넓은 홀에 서서, 부인은 익숙하다는 듯이 한 권의 책을 꺼냈다. 그것은 전쟁의 기록, 언젠가 우리 가문의 사람이 공적을 세웠다는 그 평원의 전투를 써넣은 책이었다.


“충절, 그 진실된 마음 속에서 발현된 것이야말로 진정한 명예라는 교훈을 안겨주고 있네요. 그런 영예로운 사람에게 있어 우리는 그저 욕망을 채우는 짐승과 다를 게 없겠죠.”


“아버지의 무례는 분명…”


“괜찮아요, 선친의 말처럼 그이는 천박한 사람이었니까요. 예, 어디에서 굴러들어 온 지 모를 여식들을 한데 안아 올려 스스로를 욕보이고. 그러면서 몇 명이고 몇 명이고 애첩을 들이고. 어쩔 수 없는 분노가 끓어 올랐어요. 참을 수 없는 충동이 있었죠. ...그래도 그이는 도리를 아는 사람이었어요. 제게 큰 선물을 안겨주었죠. 끝내 질린 애첩을 이것과 함께 제 처소에 보내주었죠.”


 그 선물의 정체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야 했겠지만, 품 속에서 꺼낸 채찍에서 대강의 전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고통으로 차오른 눈물에는 그 어느 것과도 비할 수 없는 은총이 있어요.”


 떨리는 눈동자, 그것은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욕망을 애써 담고 있었다.


“제게 몸을 맡겨요. 찰나의 순간, 당신이 발하는 몸부림. 그것이 유일한 계약 조건이에요.”


 그러면서 부인은 내게 손을 내밀어주었다. 손등에 입을 맞춘다면 계약은 성사될 것이다. 이것이 조건을 대등한 계약, 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내 몸을 탐닉하는 그 시선은 이미 모든 준비를 끝마친 채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 대답은 이미 정해져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추락하는 것에 손을 내미는 성자는 없으니, 제안을 거절한다면 다시는 영광을 쟁취할 수 없으리라. 고통은 순간이다. 굴욕 또한 열락의 시간 사이에서 차차 잊혀질 것이다. 나는 서서히 무릎을 꿇어 입을 맞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자신을 다그치면서, 부인의 손에 내 몸을 맡기려 하고 있었지만.


 순간 나를 붙잡아 올리는 손길이 있었다.


“굴종은 영원한 속박이 되어 당신을 괴롭게만 할 거에요.”


 그 손의 주인은 닳아빠져 유행이 지난 드레스를 입고 있었지만, 그래도 단호히 말을 이어갔다. 명예를 입에 올리며, 또한 추잡한 욕망에 대한 경계를 들먹이며. 문양이 품고 있는 장미가 등에 비쳐 붉은 색을 발하는 것과 같이, 부인의 얼굴이 점차 굳어갔다. 하지만 그런 것은 그녀와는 아무 상관 없는 듯 말을 이어간다.


“안주인으로서의 체면을 잊지 말아주시기를, 이 연회장의 모두는 단 한 명의 강대한 분을 모시는 신하임을 기억하세요.”


“...책임질 수 있으신지요.”


 그녀와는 정반대로 나는 두려워 떨고만 있었다. 부인의 화가 나를 덮치리라는 상상이 참을 수 없는 공포를 가져다주었다. 이는 성사된 계약을 깨버리는 것과 같으니. 앞으로는, 몰락해 떨어질 때 까지 고통만을 겪으리라.


 상상은 예견된 미래를 눈에 그려주었다. 그런 광경을 목격한 내 숨은 턱 끝까지 차올라, 어느새 몸은 회랑의 한 구석으로 내달렸다. 그림자 사이에 몸을 가린채로, 다른 누구에게 들키지 않도록 입은 팔로 틀어막은 채로. 입으로 비린 것이 흘러 들어왔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태연한 채 있을 수 있도록 긴 시간을 그저 고통으로 억누르기만 했다.


“슬퍼하지 말아요.”


 그런 내 귀로 들려오는 미성은 분명 부인의 뜻에 반기를 들었던 이의 목소리.


“당신은 그 누구보다도 존귀한 존재라는 걸 항상 가슴 속에 새겨둔 채로, 당당하게 살아나가요.”


 ...어느 누가 내게 그런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스러져가는 가문, 어떻게 막을 수 없는 흐름에 휩쓸려 떠내려가기만 내가 그토록 소중한 존재라는 걸 어느 누가 증명해줄까. 그런 치졸한 의심 사이로 벅차오르는 가슴 또한 있었다. 지금 이 나날 사이에서 그 어떤 찬사보다도 듣고 싶었던 말.


“어떻게 그런 걸 알 수 있나요. 당신은...어떻게…”


“그 손에 곧장 입을 맞추지 않았어요. 망설이고, 또 고민하면서. 그 몸은 분명 끝까지 저항하고 있었죠. 저 평원에서 야만인들을 막아선 기사가 그랬듯이, 그대 역시도 긍지 높은 사람이에요.”


 그렇게 내밀어진 손은 창 밖을 통해 비치는 햇빛과 겹쳐, 어쩌면 똑바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죄악과도 같다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팔을 뻗어 그것을 쥐었다.


“결코 잃어서 안 될 것이 있는 거에요. 그릇된 욕망에 몸을 던지지 말아요.”


 똑똑히 바라본 두 눈동자에는 분명 구원의 헤일로가 겹쳐 있었다.


 여전히 나의 가문에는 암운이 뒤덮인 채로, 쇠락은 필연이 되어 가문의 직책은 변방으로 향하기만 했다. 그래도 그런 나날 사이에서 고개 숙이는 일은 없이. 이 또한 운명이라면 받아들이리라, 긍지를 가지고 이겨내리라. 고귀한 여식의 가르침은 이정표가 되어 나를 이끌었다.


“비굴한 여인은 아니었군요. 어쩌면 저희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할 기개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너무 늦어버린 거겠죠. 저는 이 연회장의 불청객에 지나지 않네요.”


“그 말대로에요. 부인의 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는 법이니까요.”


 안녕히, 그렇게 인사를 고한 나는 홀로 남아 기다리기만 했다. 이 덧없는 시간이 지나, 몸을 누일 수 있기를. 그런 내 눈에 언젠가의 고귀한 여식이 비쳤다. 뭇사람들 사이에서 빛나는 모습은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나는 그 날의 감사를 전하기 위해 뒤를 쫓았다. 춤을 추는 이들 사이로 파고들어 실크로 덮인 회랑을 지나 당도한 문. 내 발걸음 그 앞에 문득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이 문 너머의 서재는 부인의 추잡한 욕망이 들끓었던 장소이자 고귀한 여식을 만난 곳. 지금 그녀는 어째서 이곳으로 향했을까. 그 순간에 내 머릿 속을 스치는 것은 불길한 예언이며 불경한 상상. 마침 열려있는 문 틈 사이는 그 예정을 확인하라는 듯이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이 유혹을 이겨내 다시 회장으로 돌아간다면, 애써 이 장소를 피한다면 분명 나는 그녀에 대한 존경심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마음 한 켠으로, 그녀를 믿고 싶었다. 결코 그런 욕망에 몸을 던지는 것이 아니리라, 설령 아귀가 그 몸을 집어삼키려 하더라도 끝내 서서 긍지를 지키리라. 그런 믿음은 내 몸을 문으로 이끌었다. 틈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소리를 듣도록, 그 기묘한 자신감의 말로를 확인하도록…


 가학적인 웃음소리, 귀를 찢는 바람 소리.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나를 유혹하는 악마가 자아내는 신기루에 불과할까. 하지만 끝까지 고통을 참는 얼굴은 나를 존귀하다고 해준 그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결코 잃어선 안 될 것을 알려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이 모든 건 끔찍한 악몽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를 다독이고 싶었지만 끝내 고통스러운 현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홀로 남은 서재에서, 무너져버린 자신의 몸을 끌어안은 채 울부짖는 여인은 여전히 고결해보였기 때문에.


 오히려 잃어버린 것은 내 쪽이었다. 나는… 나는 그 가혹한 채찍질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나약한 나는 끝내 비참한 울음을 내뱉으며 추잡한 욕망의 비료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진실은 모든 고난을 이겨내겠다는 다짐조차 사라지게 만들어, 텅 비어버린 마음 속은 도저히 채울 수 없었다.


 애초에 내겐 미래도 없었다. 이 가문은 이내 몰락할테니. 그나마의 긍지는 나약한 자신을 조소하는 거울이 되어 돌아와. 내가 끝내 손에 쥐는 것은 명예도 모르는 자가 던져주는 반지, 아녀자의 베틀이라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으면서도 가당치 않은 자존심을 바란 것일까. 비루한 내게 내밀어진 구원은 그저 환상에 불과해.


 ...악마는 비참한 내 영혼을 비집고 들어와, 나를 부른다. 나를 유혹한다. 여인을 차지하라. 그 속에 있는 긍지를 손에 넣어라.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구원일테니. 악마는 나와 같은 목소리로 내게 메아리친다. 차지하라, 손에 넣어라....빼앗아라, 손에 넣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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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경 어린 시선은 언젠가 그 눈이 가려져 맹목적인 신앙으로 변해. 작위를 팔아 돈을 마련하고, 그러면서도 남아있는 명성을 이용해 아이들을 착취해 부를 쌓고서야 간단한 이치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이 여인에게 긍지가 남아있다고 믿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의 몸을 살찌우는 부에 취해, 각인된 고통을 쾌감으로 받아들이는 몸에는 그 날 목격했던 구원의 광휘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신기루에 불과했던 동경, 그걸 알았음에도 내가 여인에 앞에 서는 것은 후원자의 권리를 다하기 위해. 내 모든 것을 팔아 쌓아올린 금은 오롯이 여인이 주최하는 연회를 위해, 오롯이 여인의 몸을 호화롭게 치장하기 위해. 그에 맞춰 여인은 내게 몸을 맡겼다.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조건일테니.


“고통으로 차오른 눈길에는, 정말 어느 것과도 비할 수 없는 은총이 있어요.”


 내 손짓을 따라 장미의 문양이 점차 붉게 물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