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단어 조각글 연성 챌린지 - 00. 단어 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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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어 : 가스, 쌀알, 계산기


얼마전,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되었다.


절차는 빠르고 무미건조하게 진행되었다.

몇 장의 서류와 몇 번의 사인을 거치고 난 뒤,

나는 스스로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자유를 얻었다.


퍽 훌륭한 기분은 아니었다.

시간이 없는 게 돈이 없는 것 보다야 마음이 편하니까.


지금 잠들면 얼마나 잘 수 있는지 셈이나 하던 머릿속이

이제 조금 더 냉혹한 수식을 마주하게 되었다.


겨울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가을의 끝자락에서

다람쥐는 자신의 곳간이 그다지 가득 차 있지는 않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낮이 점점 짧아지고 밤이 길게 드리운다.

내일로 미루곤 했던 하찮은 고민들 사이사이로 냉기가 스며든다.


난방을 틀어야 할까.

보일러를 켜기 위해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문득 그것이 불러올 지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스스로가 왜인지 처량했다.


행복은 계산하는 것이 아닌데도, 계산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었다.


모두가 바삐 일하고 있을 시각, 집에서 식사를 준비하며 쌀을 씻었다.

오래동안 제대로 쓰일 일이 없던 주방이 꽤나 어색했다.


밥물이 적으면 된밥이 되고, 많으면 진밥이 된다.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이상점은 어디에 있을까.

시간과 돈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멍청한 자식아, 밥통에 눈금이 새겨져 있잖아.


쌀 씻은 손의 물기를 털었다.

손에 남은 쌀알 몇이 싱크대에 부딪혀 맥빠지는 마찰음을 냈다.

나는 방금 얼마를 털어낸걸까.


사실, 삶은 달걀이 아니라 지출일지도 몰라.

헛소리가 나오는 걸 보니 배가 고프긴 한 것 같다.


쓴웃음.

머릿속 계산기를 무의식의 저편으로 밀어 넣고

전기밥솥을 작동시킨 뒤 가스밸브를 돌려서 열었다.


우선 먹고 나서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