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한 점 없는 깊은 잠에서 깨었다. 시계를 슬쩍 보니 7시 40분이 조금 넘었다. 엄마와 아빠는 다음 주부터 1년 동안 출장을 가셔서 짐을 싸고 계셨다. 나는 시리얼에 우유를 부어 먹고 옷을 찾아 입었다. 패딩을 집었다가 폰으로 오늘의 최고기온을 확인한 후 다시 걸어놓고 조끼를 꺼내 입었다.


 8시 30분. 만나고 한 시간보다 2시간 30분 일찍 나왔다. 민수 집에 일찍 가기 위함도 있지만 그 전에 펌프를 먼저 뛰려고 함이 첫째 이유다. 중간 정도 단계로 매일 30분씩만 뛰어도 운동이 꽤 된다. 걷다 보니 5분도 채 안 되어 바로 도착했다. 돈을 넣고 뛰고 있었는데 누가 대기를 넣고 옆 의자에 앉았다. 보통 주말 아침 시간에는 아무도 없어서 이 시간에 하는데 오늘은 의외였다고 생각했다. 옆을 슬쩍 보니 앉은 키임에도 불구하고 덩치 자체가 크고 일단 잘생겼다. 얼핏보면 약간 민수와 닮기도 하고, — 왜냐하면 민수도 비슷하게 잘생겼으니까, — TV 같은 곳에서 본 것 같긴 한데, 그냥 내가 잘못 본 것이겠지 하고 넘겼다. 내 생각이 맞을 리는 만무하다고 생각했다. 남은 라이프가 끝나자 미리 대기 걸어놓고 그 사람이 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이 남자는 틀림 없이 고인물이다.' 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폰으로 시간이 9시 20분이 된 것을 확인하고 민수 집으로 올라가려고 문을 열고 나와 건물을 따라 돌아가서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뒤에 인기척이 느껴져서 불길한 느낌에 계단을 두 칸씩 빨리 올라갔다. 시험 기간도 아닌 주말 아침 9시라서 단 하나의 학원 밖에 열지 않았기 때문에 2층부터 5층까지 올라가는데 힘들기도 하지만 두려움 같은 것이 점점 엄습해온다. 5층에 발을 딛자, 뒤에서 누가 어깨에 손을 탁 올려놓으면서

 "야!"

 라고 소리치길래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근데 아까 게임장의 그 사람이었다. 나도 당황했지만 그 남자도 당황했다. 좁은 공간에서 보니까 덩치가 더 커 보여서 겁을 먹었다.

 "너 대체 누군데 우리 집에 오는 거냐?"

 "아, 저 민수 친구여..."

 "민수 친구? 진짜?"

 "네...."

 그 남자는 날 못 믿는 눈치로 살짝 중얼거리더니 내 팔목을 잡고 6층 민수 집까지 끌고 갔다. 문을 탕탕 치며 말했다.

 "기민수! 잠깐 나와봐!"

 조금 있으니까 문이 열리고 민수가 나왔다.

 "어, 형, 왜? 옆엔 누구야..? 강민현?"

 "어라, 아는 애야?"

 "내 친구인데..?"

 "아...."

 그 남자, 아니 민수의 형은 굉장히 무안해진 표정으로 절대 팔을 뿌리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이 세게 꽉 잡고 있던 내 팔목을 놓았다.

 "나 민수 형 민우. 초면인데 미안.... 팔목 아팠지...?"

 "뭐... 괜찮아요."

 우선 집에 들어가서 겉옷을 벗고 나하고 민수 형이 전후 사정을 민수에게 전부 빠짐없이 얘기했다. 형 말로는 내가 도둑이라거나 그런 줄 알았다고 한다. 듣다보니 기분이 살짝 나쁘긴 했지만 일단은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기도 하고 사과를 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민우라고 했나? 그 형이 지금 덩치와 안 어울리게 굉장히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어서 딱히 뭐라 화를 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형도 참 의심은 많아서.... 근데 너 11시 반에 온다고 하지 않았어?"

 "그냥 일찍 왔어."

 "근데 2시간씩이나 일찍 오네.. 나 아침만 먹고 올게. 방금 일어나서."

 "민현이라고 했나? 진짜 미안해. 한 번도 못 본 사람이 이 시간에 5층까지 올라오길래 오해했어."

 "아.. 뭐 괜찮아요. 근데 TV에서 본 것 같은데 무슨 일 하세요?"

 "U5 미누라고 하면 알려나? 지금 몇 명 군대가서 나머지는 노는 중인데."

 "아..! 아이돌이었구나! 기억이 날까말까했는데. 사인해주실 수 있어요?"

 "그래, 그 쯤이야 얼마든지. 그리고 말 놓으면 안 돼? 내가 불편해서."

 "어.... 음... 그러면.. 알았어, 형. 형이라고 불러도 되지?"

 "그래, 내 속이 다 편하네."

 "근데 아까 보니까 펌프 되게 잘 하던데, 형?"

 "매일 이렇게 2번씩 하고 있어. 시간 되면 나중에 같이 하자. 옆에서 보던 애가 내 동생 친구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

 "근데 민수도 잘 해?"

 "너랑 비슷할 걸?"

 밥 다 먹은 그릇와 수저를 그새 다 씻고 민수가 말했다.

 "나 왜?"

 "어, 너 펌프 잘한다고."

 "응? 나 못하는데?"

 "오늘 아침에 얘 하는 거 봤는데 너만 하더라?"

 "그러면 지금 가자!"

 폰하면서 듣던 나는 눈이 동그래져서 민수를 쳐다봤다. 그 때 민우 형도 거들었다.

 "그러지 뭐."

 그 표정 그대로 둘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결국 1층까지 끌려왔다.


 게임장에는 아까보다 사람이 더 있지는 않았다. 민수가 2000원을 넣었고, 민현이는 등 떠밀려서 하게 되었다. 그래서 민현이는 불과 몇 시간 전에도 20분이나 해서 체력이 조금 빠져있는 상태인데 30분이나 더 하게 되었다. 의자에 앉아 가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이고 힘들어라.."

 "당연히 나보다 더 잘 할 줄 알았는데 비슷하네.. 이제 형 해 봐."

 민수가 민우에게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민우는 민수를 보자마자 시선을 회피하고 누가 들어도 부자연스러운 연기 투로

 "아, 나는 손펌프나 하러 가야겠다. 민수 너 해."

 라고 하고 자리를 떠났다. 물론 손펌프도 펌프만큼, 아니면 오히려 더 잘 하는 민우였다. 민수는 돈을 넣고 주위를 한 번 둘러봤다. 여전히 10시도 안 된 이른 시간이라 더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민수는 그렇게 30분 내내 더 뛰었다. 민우도 폰을 하다가 힐끔힐끔 쳐다봤다. 민수는 그 긴 시간을 더 뛰고나서야 마침내 지쳐서는 옆의 긴 의자에 털썩 앉았다. 민우는 민수가 끝나는 걸 보고 2000원을 넣고 민현이를 잡아 끌고 강제로 같이 했다.


아무래도 이거 망한거 가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