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광반조 6장 보러가기


"대원이 너! 장난을 쳐도 그렇게 어마무시하게 치냐! 너 사주를 봤드니 손에 살이 꼈다고 엄마가 손 조심하라고 얼마나 얘기했어? 응?"


대원이가 또 사고를 쳤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장난을 치다가 기물파손을 했다고 연락이 왔고, 없는 형편에 꼼짝없이 물어주게 되었다. 사실, 얼마 물어주느냐도 문제였지만 어려서부터 말괄량이 기질인 아들의 버릇을 고치기 힘들어 여간 애를 먹는 것이 아니었다.


"너 설마 웃냐?"


혼을 내고 있는 마당에 고개를 숙이고도 쿡쿡 웃고 있다니. 기가 막혀 명자마저도 혼을 내는 와중에 웃음이 나오려 한다. 이 아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명자는 내 배에서 어떻게 이런 애가 나왔을까 싶다. 내가 어렸을 때 이랬나? 조금 그랬던 것 같기도.


대원이가 웃는 바람에 혼낼 전의를 상실해버렸다. 결국 앞으로 그러지 말라는 말로 훈계를 끝내야 했다.






"기호 1번! 성동구를 바꿉니다!"


명자의 부업은 선거운동이다. 선거철이 되면 명자는 선거운동을 뛰기 때문에 이 때만큼은 쌀가게에서 나오는 수입과 합쳐서 살림이 좀 여유로워진다.




왕십리역 앞에서 유세가 끝나고 다들 봉투를 받아간다. 보통은 담당자가 나눠주지만, 평소 성동구 국회의원과 일면식이 있는 명자는 따로 불러 의원이 직접 봉투를 건넨다.


"추운데 수고하셨어요. 이번에 사근동 쪽 표는 세민상회만 믿어요. 도와주실 거죠?"

"아이고, 그럼요~ 근데 봉투가 좀 두껍네요?"

"인센티브요, 인센티브. 허허허."

"아이, 뭐 이런 걸 다~ 호호호호."


동네소식이 빠른 지역 정치원들은 명자가 사근동에서 마당발이라는 것을 알고 인맥을 쌓으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명자한테만 그런 건 아니고 사근동에서 유세할 때 동네 터줏대감인 서울상회를 들르던가 하는 경우가 많다.


덕분에 다른 사람들보다 급여를 더 받아 좀 더 두꺼운 봉투를 들고 시장에 간다. 평소라면 채소랑 두부나 사서 된장찌개나 해먹을 일이지만, 오늘은 고로케나 고기를 사간다. 저녁상을 보고 웃을 아이들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다. 오늘따라 시장을 보고 넘어가는 고갯길 옆으로 핀 개나리는 노란빛이 더 진하다.


"연희야!"

"어머, 여기서 마주치네?"

"어여 한대병원으로 가봐!"

"왜? 무슨 일이야?"

"대원이 그 놈이 크게 다쳤어! 집에 자네 없길래 서울상회 형님이 급하게 데리고 올라갔어!"

"아니! 어쩌다가!"

"밖에서 애들이랑 놀다가 뭘 건드렸는지 큰 나무판자 같은 것이 덮쳤는데 대원이만 못 피했다나봐. 대원이가 빨리 병원에를 가야 되는데, 자네가 없으니까 자네 찾는다고 동네가 뒤집히질 않았겠어!"


가게 운영하랴, 부업 뛰랴, 부부는 아이들 곁에서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아이들과는 떨어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주의하라고 당부했건만 다친 아들이 원망스럽다가도, 이 모든 것이 아이들을 내팽겨쳐놓고 밖으로 돌게 되는 상황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깟 돈이 뭐라고... 돈이 뭐라고...


"대원아! 대원아!"


응급실 안쪽으로 만신창이가 된 작은 남자아이가 보인다. 아침에 내가 서랍에서 꺼내서 입힌 옷이다. 내가 저번 주에 손수 다듬어준 머리모양이다.


"엄마!"

"이 놈아! 내가 그렇게 조심해서 놀라고 말하지 않았니! 이 놈아... 아이고, 이 놈아..."


"최대원 군 보호자 되십니까?"

"아, 네. 제가 엄만데요."

"아유, 이거 좀만 잘못 맞았어도 다리 아예 못 쓸 뻔했어요. 다리가 부러지고 만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아주 작게 다친 건 아니라서 몇 주 입원은 해야 합니다. 퇴원하고도 아마 한동안은 일상생활이 불편할 텐데, 그건 통원치료로 하시구요."

"네, 감사합니다."

"울지 마세요. 사내 놈들 이런 일 한 번씩은 다 있어요. 이번 달만 사근국민학교 머슴아들 몇 명을 받았는지 몰라요. 하하하."


뒤이어 애들 아버지가 응급실 안으로 들어온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원망의 화살은 항상 애들 아버지를 향한다.


"많이 다쳤어?"

"아, 보면 몰라? 당신은 동네에 있었으면서 왜 이제 와? 대원이 사고 날 때 당신 뭐 했어?"


배달 갔다 온 사이 벌어진 일이라 애들 아버지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정은 있었지만, 애들 아버지도 아이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명자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다.


차라리 내가 다쳤으면 좋았을걸, 하는 마음이었다. 갈비뼈 하나가 부러진 느낌이다.








"또 다쳤어?"

"내가 언제 다쳤다고 또 다쳤대."

"너는 어째 그 나이를 먹고도 그 모양이야! 칠렐레 팔렐레. 어휴. 왜 맨날 정신줄 놓고 다녀!"


이번에는 연희가 다쳤다는 소식이다. 어깨가 부서졌다나.


"무슨 전환데?"

"연희. 다쳤대."

"어디가?"

"어깨뼈가 부서졌다고. 하여튼간에 이 기집애는."

"아이구... 쯧쯧쯧. 연희가 올해 몇이야?"

"이제 오십 됐지."

"어이구, 걔가 벌써 오십이야?"


2018년, 연희 나이가 벌써 오십이다. 연희네 큰 아들은 올해로 스물, 둘째 아들은 열 다섯. 연희도 장성할대로 장성한 자식을 둘이나 둔 어머니지만 명자에게는 그저 아직도 철 들지 않은 아이로 보일 뿐이다.


"할머니 오셨어요?"


병상에 누워서 큰 아들 시중을 받고 있는 연희의 모습을 보니 답답하면서도 큰 외손자가 벌써 이렇게 장성해서 엄마 병간호를 한다고 나름 대견하다.


"우리 경현이가 벌써 이렇게 커서 엄마 간호를 다 하네. 야, 아들 낳기를 잘 했지?"




"어려서는 대원이가 그렇게 말썽이더니 너는 예전에는 얌전하다가도 어떻게 늙어서 이렇게 사고를 치냐."

"뭘 사고를 쳐. 엄마도 하여간."

"대원이 사고 났을 때는 그냥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병상에서 그러더니 나한테는 전화하자 마자 소리를 치냐."

"똥 싸네. 어디 봐. 어깨가 얼마나 다쳤어?"


"아, 아ー"

"에휴. 진짜. 너도 자식 키워봐서 알잖아. 어디 계란 다루듯이 놔두면 깨질까 손에 쥐면 부서질까 키웠는데 이러고 다쳤다고 하면 화도 나고, 불쌍하기도 하고..."


입원한 후로 염색도 안 해서 흰 머리가 난 늙은 딸이 초췌한 모습을 보이니 또 눈물이 난다.


"엄마 또 운다. 하이고, 참."

"흐흑, 흑. 다 늙어서 칠십 여섯 먹은 엄마한테 병문안이나 오라고 한다."


병원 밥이 나오자 연희는 아침도 먹지 않고 병원으로 달려왔을 큰 아들을 생각해서 밥을 덜어준다. 젊은 날의 자신을 보는 듯 했다. 명자의 눈에는 아직도 철 없는 딸이지만 적어도 제 새끼에게만큼은 어미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언제나 미덥지 않은 딸이었기에 커서 아이를 낳고 어미 노릇은 잘 할까 싶었다. 이제 스물이 된 아들을 둔 연희도 같은 생각일 것이다. 이 아이가 결혼해서 아비 노릇은 잘 할까.


내 아이가 태어나면서 사람은 새로 태어난다. 비로소 진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 부모가 되지 않으면 알 수 없나보다.


팔십을 눈 앞에 둔 엄마는 두 아이에게 커다란 나무가 되어준 딸과 언젠가 아비가 되어 나의 피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손자를 보며 미소 짓는다.


"대원이 그 때 다쳤을 때 죽었는 줄 알았다니까?"

"걔는 어디 다치기도 참 잘 다쳤어. 나는 그 때 선거 그거 하고 오는 길이었는데, 그 때도 너희 아버지는 사람이 어쩜 그렇게 태평하냐."

"무슨 소리야. 아빠도 그 때 엄청 놀라긴 놀랐어. 엄마는 꼭 소리 지르고 울어야 놀란 줄 안다니까."


거진 40년이 다 된 일을 회상한다. 개나리가 피는 계절은 수십 번 지나가고 또 왔다. 창문 밖을 보니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큰 외손자가 자판기에서 뽑아다준 율무차는 코코아보다도 달다.


"엄마 이제 가. 좀 있으면 한 서방 올 거야."

"한 서방 집에 가라고 그래."

"그럼 엄마가 여기 있게?"

"응."

"아빠 밥은?"

"아빠가 애냐? 알아서 먹던가, 아니면 경로당 사람들하고 먹던가 하겠지."


딸이 가라고 몇 번을 말해도 그냥 버티고 있다가 기어코 병원에 온 사위를 집으로 돌려보낸다. 딸이 누운 침대 아래 간이침대에서 쪼그려 잠을 잔다. 10년 전부터 허리가 아파 매트리스 아니면 잠도 못 자지만, 오늘은 꼭 딸 옆에서 밤을 지내고 싶었다.


이제는 모두 자기 둥지를 떠나 새 둥지를 차리고, 그 안에서 자기 자식들을 건사하느라 옛 둥지는 돌아보지도 않는구나 싶다. 그렇지만 이제 딸 옆에서 병간호하는 것도, 같이 자는 것도 이제 자기 인생에서 몇 번 남지 않은 것 같다. 아니, 명절에도 자기 자식들 옆에서 자는 딸을 보면 이렇게 가까이서 같이 자는 건 살면서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



2019년이 가고 이제는 새로운 10년의 시작, 2020년 경자년이 밝았습니다. 저도 연말이라 거의 연재를 못 하다가, 이제서야 올리네요. 2020년 창소챈의 많은 훌륭한 작가분들도 모두 복 많이 받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외할아버지께서 오랫동안 경영해 오신 쌀집 문 닫는 일을 기념해서 처음에는 기분으로 썼는데, 40년에 달하는 기간에 우리 가족에게 일어났던 많은 일들을 에피소드화 하다보니, 생각보다 분량이 많아지네요. 현재 타임라인은 1981년 3월입니다. 앞으로 2020년까지 39년에 달하는 분량이 남아 있고, 현재 써둔 분량은 1988년 2월까지입니다. 이걸 언제 다 연재해서 완결을 볼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일단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즐겁게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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