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레벨 원스타트(NLOS) 28화. Je ne regrette rien> 다음으로 이어지는 글입니다. 혹시나 앞 글을 읽지 않으신 분들은 먼저 보고오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요정이 품고있는 ‘씨앗’으로 하여금 생식하며 수장이 이를 관리한다. 방식은 다음과 같다.


• ———— 빼앗아온 씨앗들의 일부분을 수장을 포함한 특정 나간들만이 섭취하며, 나머지는 땅에다 심는다. → 생기(生氣)가 침체된 폐광이나 던전에다 싹을 틔우기에 종자들이 상대적으로 생기가 적은 쪽으로 흡수되는 성질로 인해 온전히 땅으로만 전달된다. → 원기 회복이 평균치 미만 상태로 장기간 지속될수록 자라난 식물은 더욱 성장을 가하는데, 결과적으로 이 성질로 인하여 커다란 콩나무 한 그루가 형성된다. → 이후 자세한 원리는 서술할 수 없으나 치료 주체 없이 땅으로 전해지기만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이상이 생겨 콩나무 근치 땅에서 나간들이 생성되어 나온다.

이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나간들의 생식법이다.


※ 그래서 일부러 숲에서 식량을 과다조달해가서 동굴 깊숙히 생활하는 이유도 생식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이 방식대로 하면 체력을 다소 소모하기 때문. 그러나 자세한 건 확인불과.


※ 혹시 던전등에서 호브나간과 마주치게 될 경우 반드시 콩나무가 있을테니 만일 제거할 시, 주의를 요한다. 나간들이 전력으로 막아설 것이다.


※ 간혹 요정 자체를 납치해 가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요정의 생기가 생산을 증대시키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 그러나 잡히기 전에 은폐하거나 잡혀도 도망치는게 다반사이므로 활용되는 경우는 극히 적다.




그 당시는 정말로 아무것도 할수없었어. 분위기에 압도당해서, 새파랗게 질려서 방아쇠를 당기지도 못하고, 한 손은 요정님을 품에 안기고, 한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나 다급하게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어. 사랑하는 그녀를, 등지고서. 무서워서,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어. 마갑(馬甲) 『류거흘』은 진정으로 빨라서 기이하게도, 빠져나오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 밖은 아직도 맑아서, 어둠속에서 그들은 눈만 부릅뜬 채 노려보기만 했지. 해냈어. 무사히 탈출하는데 성공하고야


— 그래서, 그녀를 버린 거야?


아니. 서둘러서 적들이 닿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나아가니 또다른 동굴 입구 앞에 도착했어. 거긴 나무가 무성하게 나있었지. 난 품에 안았던 요정님을 내려놓고 상태를 확인했어. 상반신 전체가 검붉게 흐려져 있었고, 날개도 일그러져 있었어.


— 그래서, 그녀를 버린 거야?


아니야. 또렷했던 눈동자는 방향을 잃고 허공을 방황하니 이어서 눈을 감으려 하셔, 난 감겨가는 눈 대신 입술을 벌려 씨앗을 반으로 쪼개어 나 하나, 요정님 하나 드렸어. 요정님은 삼킬 힘이 남아있으셨는지 꿀꺽, 간신히 넘기셨어. 그렇게 둘에게 새싹이 피어나고 줄기를 이루니 곧장, 두 줄기를 연결시켰고 회복이 원활히 진행되는지 편하게 눈을 감으셨어.


— 그래서, 그녀를 버린 거야?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내가 할수있는 일과 약속을, 지켰잖아? 요정님과의 약속을 지켰어. 집에서 뛰쳐나온 일생동안, 단 한번도 살생을 범하지 않았어. 이땜에 고기도 입에 대지 못하고 열매를 먹으며, 주위의 어려운 난민과 굶주린 아이들에게 식량과 시가를 아낌없이 나눠줬어. 그래서 발굽은 가벼웠으며 어디든 구조를 청하면 달려가 왕께 전언하며 맡은 바를 수행하면서, 단 한순간도 속죄를 게을리 하지 않았어. 물론 몬스터들은 처치했어. 이건 살해가 아니잖아? 저지한 거야. 만일 쏘지 않았다면 요정님도 나도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여기계신 요정님도 그러셨잖아. 도망쳐 라고. 이번 약속도 목숨을 다해 지켰어. 난 약속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기로 다짐했어. 작은 것 하나도. 왜냐면, 이 모든게 전부.


— 그래서, 그녀를 버렸어.


····전부, 누구를 위해서 했지? 어릴때 트라우마로 암살 자체가 두려워 나 자신을 가두고 살았어. 왠지 내가 건드는 모든 건 피의 선혈로 그려질까 봐. 도움을 줄 때도 일부러 멀리서 돌려서 나눠주고, 그리고 곧바로 떠나지 않았나. 곁에 있으면 감당 못해. 속죄를 숙명으로 여기고 하찮은 몸 따위 아끼지 않아. 쉴새없이 뛰어다녔어. 다 닳아서 없어져도 상관없어. 생명을 아껴주려면 전직 암살자 따윈 게을리 해도 되지 않을까?.... 밤이 되었어. 어쩐지 요정님의 미간이 찌푸리시곤 필 기미를 보이시지 않았어. 가까이선 땀이 송골송골 맺히셨어. 난 밤이 될 동안 주변 열매를 따먹었지. 내가 건강하지 않으면 요정님은 회복되지 않아. 하지만 그대로야. 난 달을 바라보며 갑옷을 풀고, 꼿꼿이 서있던 무릎을 꿇고 앉아 슬며시 미소를 지었어. 고요하니 웃음이 나더군. 지금 누구에게 얘기하는 걸까. 현재 그녀는
















아아아악—!!!
















그래서 나는 그녀를 버렸어! 머저리! 그녀를 버리고 온 거라고! 평생을 받쳐 그녀를 그리워하며 속죄라는 안이한 단어에 몸을 파묻고 몇날몇일을 지세웠다고! 그런데 정작 엉망진창, 망가져 있었어! 그래서 넌 버린 거야? 예전과 달라진 모습에 넌 외면한 거야!! 넌 도대체 누구야!! 나무에 매달린 그녀를 뿌리치고 온 너는 대체!!!

나야.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았어. 그때의 나는, 밤이 너무나도 고요했고, 요정님이 어느새 곤히 주무시기에 안에서 나마 홀로 끊임없이 절규하며 울부짖었지. 아비규환. 그런데 마음만큼은 슬픔에 젖어 좌절하는데 숲은 달밤에 젖어 고요하였던 것 때문에, 실성한 걸까? 아무튼, 그래, 자리에서 일어나 어린 눈물로 다시 달려왔던 쪽으로 가 초원 너머를 바라봤던 걸로 기억해. 그리고 가득 고인 어리석은 물기에 비쳐 헛것이 보이는 줄만 알고, 손등으로 눈꼬리를 살며시 눈꼬리를 훔칠 때, 허상이 아니었던 거야.



나간과 작고 검은 형체들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던 것을.





“피이이이! 시끄러워! 이 소리 정체가 뭐야!? 으···· 에엥? 저 인간은 뭐야??”


“바로 저 인간이에요! 낮마다 요정 숲에 신출귀몰 한다는! 어서 알려야 해····.”


“앗! 인간 도망친다! 거기 서!”





그러부터 몇년이 흘러갔고 어느정도 숲에 정착해갔다. 요정님들로 둘러싸인 하루하루가. 

그런 사치에 따른 이중생활도.



- 하아··· 오늘도 무사히 넘어갔군요. 이것으로 이 요정이 끝이겠군요. 마지막은 저쪽 나무 밑에 묻어주는 게 좋을까요? 【LV.37/음유시인】


- ····


- 알겠습니다. 소인이 괜한 질문을 하였군요. 그럼 여기다 묻도록 하겠습니다. 



“편하게 쉬십시오, 치이님.”



- 치이ㅇ···· 치이····. (글썽)


- 언젠간 꼭 완치되실 겁니다. 그때까지만 부디 버텨주시길. 항상 죄송할 따름입니다.



요정님은 매일 밤만 되시면 작지만 애달프게 우셨어. 꼭 누군가를 애타게 불렀던 당시처럼. 이때에 요정님의 존칭을 ‘치이님’이라 하였지. 항상 입으로 울먹이며 흘려보낸 것이 무언가의 명칭 같았기에 정말 요정님의 성함이신지, 아님 다른 뜻이었는지 아무튼 간에 그렇게 불러왔었어. 그런 치이님과의 이어진 줄기가 날이 갈수록 길어지더니 신기하게도 치이님 몸 주위를 둘러씌워 하나의 구체를 형성하여 공중으로 둥실 떠올랐어. 요정님들은 무엇인가 남달랐지. 덕분에 적과 대치할 때도 떠올라있어 움직임의 여파도 확실히 줄었지. 단단한 줄기로 둘러싸였기에 싸울 때도 문제없고, 이어졌기에 양손으로 총을 집는데 지장없고, 줄기가 얼굴도 감싸줬기에 소리도 들리지 않으실테니 전투를 멈출 필요도 없어. 전엔 매번 고생하였는데 제대로 그들을 막아낼 수 있어. 막을수 있어, 싸울수 있다고.

····이 당시는 저지를 당연한 것처럼 여겼어. 치이님과 다른 요정 분들을 더불어 구한다는 명분으로 행해왔지만, 정작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이 무의식적으로 두려워 주위에만 맴도는 것에 불과했지. 어쩌면 자기합리화에 사로잡혀왔던 셈이겠지. 희생 아닌 희생을 행하며 변화에 조짐없던 기일을 보내던 어느날.



“저기요. 혹시 그쪽이 요정들에게 피해를 준다던 그 인간족···.”



만나게 된 거야. 용사님을. 처음 접촉했을 때는 그저 요정님인줄 알았어. 왜냐하면 여기는 요정님들 전용 휴향림이기에 일부러 데려오지 않는 이상, 사람이 이곳에 올리가 만무하니. 그래서 서로 마주쳤을 때는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상당히 경계했어. 그야 그럴 수밖에. 사람이 아무런 목적을 갖지않고 접근하는 일은 없기에, 찬찬히 상대의 의도를 파악해보기로 하였지. 그랬는데 정밀하게는 모르겠으나 짐작 가능한 건 나쁜 심성을 지닌 자는 아니란 것 정도? 물론 이때 마물이란 발언을 하셨을땐 자칫 신변위장한 암살자로 오인할 뻔했었지. 마물, 오래전 전설의 용사라는 위인이 처치했다는 요물을 가르키는 것이라 익히 들었어. 그런데 갑자기 떠드는 걸 보면 나보다 뭔가 더 알고는 치이님을 노린 줄만 알았지. 그래도 모르니 주시하기로 하였는데 뜻밖에, 이런 상황이 올 줄은 상상치도 못하였어.



“제, 제가 잘못 본 게 아니죠!?!? 소문이 진짜— 아니 정말 언니— 언니?!!? 치, 치입(!)”



처음에 난 살포시 입을 막았어. 그리고 조용히 놀람을 금치 못하셨지. 이건 상봉이 아니라 거의 기적에 가까웠어. 솔직히 그들과 거리를 유지한 채 빽빽한 숲속에 몸을 숨기고 얘기들을 엿듣는데 난데없이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어. 이때부터였을 테지. 용사 일행에게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우여곡절 끝에, 기적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듯 곁에 줄곧 계셨던 어린 요정님, 치이님은 보시자마자 언니라 외치셨어.

분명 ‘치레’라 하셨지. 난 자매라시는 치이님께 조용히 말씀드렸어. 혼란스러워 하시기에, 아직 안정을 더 취해야 하다며 다독였지. 설득력이 어느정도 부여됐는지 살짝 곁눈을 주시더니 받아주셨어. 얼마나 고맙던지.



- 벗으면서 다 봤는데 이제 알려줘도 되지 않나? (웃음)


- (화들짝) 아직도 여기에 계신거요? 같이 가시지 않으셨소?


- 아, 리내는 먼저 보내났어. 판초하고 이 총들, 직접 돌려준다 하고. 자, 여기.


- 그냥 놓고 가셔도 상관없다고···.


- 그럼 이제 알려주실까. 왜 그렇게까지 그 요정님을 숨기려 하시는지 말이야, 후훗.


- ···그리 몰아붙이신다면 하는 수 없군요. 그건.



“가까이 다가가면 안됐기 때문이라오.”



- —그런 이유로.


- 흐응, 그러니까 용사하고 마법사 리내에게 가까이 서면 그 요정이 사납게 돌변한다고?


- 예. 일부러 다른 요정님들께도 접근하지 않은 것도 이와 동일하지. 줄기가 입을 막아주고 있어 상대는 알 수 없겠지만, 전 느낀다오. 몹시 괴로워 하시는 것도.


- 푸흡. 뭐야, 고작 그런 거였어? (웃음)


- ····뭐가 좋으셔서 웃으시는 거요.


- 아니, 당신을 비웃을 의도는 없었지. 단지, 너무 시야가 좁다고 해야될까. 당신이, 후훗.


- 네? 그게 무슨 말이죠?


- 곧 용사를 만나고 나면 알게 될거야. 어쩌면 은혜도 입을지도 모르겠네. 그때부터 당신이 얼마나, 용사를 ‘무시’해왔는지도 깨닫게 될거야. 분명히? (으쓱)



처음에는 무슨 뜻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해석하지 못하였지만, 곧 그분을 만나고 나서야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지. 정말이지, 용사님은 대체 어떤 일을 하시다 온 분이셨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내가 미리 아스라이 모드로 몸을 숨기고, 당신이 호브나간을 가둬두면 안에서 뒤를 칠테니, 당신이 콩나무를 맡아줘. 도감대로라면 분명히!”



다그닥 다그닥



- ····용사님이 대신 처리해주시면 안되겠소. 도저히 안 될 것 같소.


- 왜? 그거 설마 요정하고 관련되서 그런 거야?


- ····아니라고는.


- 당신, 이 폐허 동굴에 들어온 게 처음이 아니었구나.


- ······그


- 됐어. 말하기 싫으면 관둬. 당신은 생각보다 훨씬 수수께끼 투성이로군.


- 죄송하게 됐소···.


- 그래도 말이지. 그렇게 되면 더욱 당신이 하지 않으면 안되겠네.



다그닥



- 어, 어째서죠.


- 그야 당신이 이 곳에도 와보고, 알고있었으면서 여지껏 숲에 겉돌고 있었다면, 원인은 거기에 있을 테니까. 아니려나?


- 그래서 굳이 제 손으로 걷어야 하는 이유가—


- 책임이야. 남겨둔 책임.


- (!!!)


- 하지만 당신에게도 그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우릴 여기로 불러들인 만큼 그에 뒷받침만 할 이유도 있다고 생각하거든. 전에 말했지. 요정을 지키는게 당신의 속죄라고.


- 그것이 이유이자, 그것이—


- 긴 말은 필요 없겠지. 그럼 가자! 예그리나, 당신이



“소중한 걸 지켜주고 아껴주는 어엿한 사람이란 것 정돈, 잘 아니까.”


“네가 오늘보다 생명을 아껴주는 어엿한 사람이 돼서”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그렇게까지, 겹쳐보였을리가, 없잖아요. 그녀하고 용사님. 서로 다르신 분이란 건 잘 알지만, 언뜻 같은 분은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지게 돼. 아무튼 감사합니다. 제게 살 길을 가르켜줘서, 그녀를 잃어버릴 지라도.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를 가르쳐줘서, 감사합니다. 속으로만 되새기고 눈길로만 그대들께 경의를 표하여 안타깝지만, 확실히 깨달았답니다. 옛날의 당신이, 아니 내 자신이 가업을 내려놓고 나왔을 때 너무 많은 걸 내려놓고 나왔더군요. 가업뿐만이 아니라, 그녀와의 추억도. 그녀가 하고자 하셨던 일 하나하나가 생생히. 특히, 매일같이 있어주셨던 목적 마저도. 처음부터 제가 좋아서 옆에 것이 아니었지. 그녀가 절 보셨을 때 위태하고 미개하다 여기시고, 그녀 앞에서 살생을 자제할 때 안심이 되셨을 거고, 그만큼 저와 많은 시간을 보내주셨을 요정님. 그런 요정님을 겉으로 속이며 몰래 자행한 못난 암살자였어.

기만. 그녀의 기대를 꺾어버리며 연맹하던 내가 저지른, 그녀를 기만한 죄. 평생 이 죄를 지고서 살았던 거야. 착각하고 살았어. 그저 살육을 피하기만 해서는 안됐던 거야. 그녀처럼, 요정님 같이 이 모질이를 이해해줬던 것처럼. 어릴적 몬스터를 취식을 위해 절식시켰다는 어처구니 없다 여긴 기만하는 생각따위 버려버리고, 존중하시는 마음가짐을 본받았더라면, 달라졌을지 모를 운명. 이제는 죄목이 무엇인지 깨달았으니, 평생을 짊어지고 그녀의 마저 못 이룬 본분을 이어받을 때. 만약 그녀였다면, 그러셨을 거야. 그렇지 않으셨다면 막으셨던 이유, 이곳에 처음왔을 때 검은 요정들이 입구를 막고있었던 이유, 그리고 나간들과 대적했던 이유. 도저히 성립이 안되겠지. 정말로 많은 걸 내려놓고 나왔어. 눈이 멀었나 보군. 먼저 알았더라면, 방아쇠를 당겼을 텐데. 그녀를 더욱 주위깊게 봤더라면, 그녀의 의지를 눈치챘을 텐데. 그런데 전 도망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의식이 끊기기 직전, 그녀는 제 등을 보시고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여기는 무사히 처치했어! 이제 그 콩나무를 어서···· (!) 예그리나···? 지금 뭐하려는 거야. 당장 그만둬! 그 총 내려놔, 예그리나—!!!”



정열의 레퀴엠 『피가레오』

노래하며 구애(求愛)하던 그 입술을, 죄인 앞으로, 장전.

순전히 그녀의 안목 만으로 사랑해왔던, 나.

떠나보내며 자신만을 위해 본가를 달아났던, 나.

여제까지 속죄하며 당당히 살아왔던, 나.

모두를 지킨다는 명목 하나로 그들과 대적해왔던, 나.

용사는 암살자임을 목격했던, 나.

그녀 앞에 홀로 서있는, 나.

그것은 거짓.



“빛이 나···? 내 몸에서 빛이, 어떻게···· (!) 인간, 아니 예그리나? 왜 에너지가 너에게로···· 빛을 내는 거지?”



낭만의 세레나데 『더 러버 송』

조용히 순애(純愛)하던 그 입술을, 은인 앞으로, 장전.

오직 그녀의 은혜로 매료돼왔던, 나.

떠나보내며 그대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던, 나.

그러나 무지한 착각 속에 헛되이 보낸 시간임을 깨닫고 절규해왔던, 나.

그 당시 트라우마로, 다가서지 못하고 그녀 곁을 맴돌기만 했던, 나.

지금껏 함께해주신 용사님을, 멋대로 단정시키고, 무시해왔던, 나.

결국 그녀, 아니 요정님들을 앞에 두는 내게, 버팀목이 되어준, 모두들.

그것이 진실.



현재, 이 모든 악행의 씨앗을 뿌리 거둘 때. 나무에는 그녀말고도 적지않은 요정님들의 오랜 고통이 스며든 흉골들을 보고도 무심히 그녀만을 바라봤던 어리석음을 단죄할 때.

요정, 치레 님이시여. 제게 그대의 힘을 빌려주십시오. 연결된 그대와의 인연이, 성스럽게 빛을 발휘할지니.

마갑(馬甲), 『류거흘』이여. 절제된 자태에 힘을 실어, 소인의 용맹함을 기꺼이 받쳐줄테니.

그대의 천명을 받들고, 그대의 존함을 조심히 아뢰옵니다.



“예그리나—!!!”


“예그리나—!”


“그대의 이름은 『페』. 찬란한 이름 아래 내리는, 최후(最後)의 탄환.”

















“쥬 느 러그레트 리앙 [애착생사(愛着生死)]”















•••



“지금까지 발견한 요정의 시신들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을 때, 심상치 않은 징조가 일어났음을 어느정도 짐작하긴 했지만···.”



현재, 요정 마을의 촌장실 안. 무사히 마을로 귀환하여, 지금 우리 일행은 요정 마을 촌장님 앞에 서서 말씀을 듣는다. 물론 도착하자마자 대충 짐작한대로 곧장 수피아 특전병들에게 연행(?)되어 갔지만, 촌장님과의 접촉, 최선을 다해 요정들의 주의를 끌어준 요정 치이와의 재회. 특히 진실 규명 절차에서 꽤나 애를 먹긴 했지만, 우리는 이를 뒷받침만 할 ‘전리품’을 촌장님께 보여주었고, 그걸 유심히 보시던 촌장님은 깜짝 놀래시더니 곧바로 우릴 석방시키고 모두가 잠든 밤, 촌장님과 보좌 관련 몇몇 요정과 함께 있게 된 것이다. 촌장님께선 말씀하셨다.



- 그러한 일들이 수년 전부터 계속 되고 있었다니, 정말이지. 저의 불찰, 아니 그동안 영웅을 알아차리지 못하여,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다시한번, 모든 요정들을 대표해서,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어떻게 보답을 해드려야 좋을지!


- 아니에요. 저희가 한 건 별로 없어요. 전부···.


- 용사, 굳이 겸손할 필요는 없지 않아? 오히려 용사가 없었으면 그도 그렇게까지 움직이지 않았을 걸? 그러니 인사는 받아주라고, 후훗. 【LV.43/무녀】


- “진정 주인— 아니 용사다운 응변이었지만, 네 고생한 것 좀 생각해라. 죽을 뻔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별별 봉변을—“ 【LV.15/용사의 수호령】


- 또또 멋대로 정하네, 바보용사! 꼭 자기가 다한 말투로. 우리도 고생 많이 했거든! 제나 말대로 상대방 성의는 받아주라고. 물론 우리가 자진해서 한 거지만, 어쨌든! 【LV.20/마법사】


- “맞아맞아. 우리도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고!”


- 아, 알았어. 숙지할게;


- 하하. 그리고 무례를 고사하고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대체 그들의 정체는 뭐였습니까? 나간족이 낌새도 이상하다 느끼긴 했지만···.


- 역시나, 요정들도 모르고 있었구나. 그렇담 현장에 있던 두 분께서 자세히 대변해줘야 겠네?


-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알 수 있었던 건 그들 대부분이 양산된 가짜였던 것과, 진짜 나간들은 무언가에 지배당해 있었던 것, 진짜 요정들은···· 죄송하게 됐습니다.


- 아닙니다.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실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을 테죠. 시신들을 보더라도 이들이 무엇을 했을지, 어느정도는.


- 저는 동굴 외곽에 있었던 터라 안쪽까지는 들어가보지는 못해서 잘은···.


- “진짜 나간들은 콩나무를 무너뜨리자마자 기절하더라고. 용사에게 나가떨어진 호브나간도 서서히 원상태로 변해가고 말이야. 그틈에 서둘러 빠져나오긴 했는데, 미안. 나도 모르겠다.”


- 원인은 모르신다는 말씀이신 거죠. 알겠습니다. 저희가 나중에 조사해서 차차 알아가도록 하죠. 그나저나 다행입니다. 이 씨앗···· 이건 분명 ‘치레’양의 것입니다. 그녀라도 살아있어서 덕분에 안심이 됐습니다. 허나 치이는 착잡한 심정 같더군요. 이번 사건을 묻으려고 일부러 오지않았다니.


- 그 요정 님도 무척이나 아쉬운 모습이었어요. 그러니 치이는 저희가 꼭 잘 말해줄게요!


- 마법사 님, 고맙습니다. 그러고보니 전부터 궁금한 거지만 인간, 아니 영웅 예그리나 님은 지금 어디계시죠? 당장이라도 몰래 꼭 한번 찾아뵙고 싶은데 말이죠.


- 아, 그게 그는····.



“이미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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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니까; 제발 좀 조심 좀 하라고!”



(이틀전 밤. 폐허 동굴에서 간신히 탈출 후, 현 요정 숲과 이어진 동굴 입구 앞)



- 어차피 그한테는 안 들린다니까. 진정해, 혜움.


- “너도 엄청 소리질렀으면서! 정말이지, 난 또 자살하는 줄 알고; 이상한 놈이라서 충분히 그러고도 남잖아, 안 그렇냐고! 업고 올 때도 어찌나 (난리법석)”


- 그래 그래; (마지막에 소리지른 건 너잖아)


- 대략 매일 용사 곁에 떠도는 유령 하나가 당신이 걱정되서 난동피우는 걸 용사가 간신히 말리는 중이니까, 그런 기묘한 시선으로 안 봐도 돼. (웃음)


- 그렇군요. 이거 황송하네요.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디계실 유령— 윽. (휘청)


- 아직 치료 안 끝났으니까, 함부로 움직이면 안돼. 【LV.28/수피아(요정)】


- “누구보고 유령이래! 수호령은 일반 유령들하고는 개념부터가 다르다고!”


- (솔직히 넌 뭐가 다른지 모르겠거든; 그러나 저러나 저 요정이 설마, 치이의 언니일 줄은. 상상도 못했어)


- 고맙습니다, 치레님. 하지만 이정도 상처따위 요정님들이 숨질때까지 받았을 고통에 비하면야 아무것도 아니지요.


- ····네 잘못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오히려 동료들을 구하지 못한 내 잘못이지. 난, 네가 곁에서 치료해줘서 고맙다고.


- 천만에요. 이제 어느정도 기운도 차린 듯 하오니, 소인은 이만 슬슬 떠나겠습니다.


- 벌써····?


- 네, 저의 무모한 짓에 한동안 이곳에 머물러 주셨으니 이이상 폐를 끼치면 군자의 도리가 아니겠지요. 이 은혜는, 영원히 잊지않겠습니다. (꾸벅)


- “그래. 또 총을 가슴에다 쏘지말고. 암만 기술이라도 그렇지. 응응.”


- (글쎄 안 들린다니까;) 조심해서 가. 그리고 요정님도.


- 정말로 같이 가시는 거예요? 치이가 많이 보고싶어 할 텐데····.


- 그렇겠지. 그래도 이대로 가면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에게 밝혀야 하잖아. 동료들이 죽은 이유도····. 그러면 모두가 평소처럼 지내지 못해. 또 너희들이 해왔던 목적에 반하는 짓이지. 나도 영원히 없던 일로 남았으면 좋겠어. 그래서 떠날 거야. 폐가 그의 곁을 지켜봤던 만큼, 예그리나와 같이 여정을 함께하기로. 은혜 갚을 겸, 치료도 마저 할 겸. 또 사적인 이유로, 으흠! 괜찮··· 지? (힐끔)


- 불편하시지 않다면, 소인은 기꺼이. (싱긋)


- 치/// 그, 그리고 이거! (덥썩)


- 이거는··· 아! 이거 요정의 씨앗 맞죠? 도감으로 봐서 알고있어요.


- 맞아. 그건 내 『수피아의 기적』이야. 너희들 다시 우리 마을로 간다고 그랬지? 그걸 촌장님께 밤에 몰래 만나서 보여줘. 그럼 이야기하는게 조금은 수월해질 거야. 꼭 요정이 잠든 밤에 찾아가줘. 촌장님이라면 단번에 알아채실 테니까.


- 촌장님께 몰래 귀띔해달라는 거죠? 알겠어요. 명심할게요!


- 고마워. 치이에게도···· (소근소근) 알겠지? 꼭 이렇게 안부 전해줘. 전부에게 들려주기엔 민망해서 말이지; 나중에 그걸로 다른 생명을 구하는데 보탬이 돼죠.


- 네. (웃음) 그에게 한 것처럼 하면 되는 거죠?


- 응. 우리 동생 치이를 잘 부탁할게.


- 시인. 그냥 충고하는 거지만 또 어디가서 노래부르지 않는게 좋아. 용사에게 들어보니까 아주 가관이러대? (웃음)


- 제, 제나;


- 네. 확실히 그런 말을 했었죠. 꼭 다음에는 순애의 노래말고, 정열적인 구애의 노래로 하겠습니다.


- (아직도 완전히 헛다리 짚고 있잖아!?) 어, 어쨌든 언젠가 또 재회하길 기약하자. 건강히 잘 있어야 돼.


- “정확히는 노래를 들은 애들의 안식을 기원하는 바이지만.”


- 예. (싱긋) 어디선가 그대들과 만나기만을 기약하도록 하겠소.



“그럼 이만. 언제나 뜻깊은 일들만이 가득하기를.”



그렇게 예그리나는 자신이 구해준 요정과 함께 저너머로 같이 사라진다. 우리는 후에 마을에 잠시 머물고 떠나기 직전, 치이에게 언니의 안부인사를 늦게나마 전해줬고, 상당히 울고불고 난리칠거라 예상했던 치이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안타깝게 살짝 어린 눈망울을 하고선 순응의 미소로 우리와 대면했다. 사실은 리내가 치이와 따로 멀리서 대화한 통에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돌아온 표정이 이를 대변해주었다. 예그리나는 그렇게 마을의 아무런 미련도 없이 떠나, 요정들에게 숨은 영웅으로 남겠지. 기쁘지만 슬프게도. 마을을 떠나자 갑자기 요정 치레가 준 씨앗을 받아든 리내가 내 앞을 지나쳐 갈 때, 그날, 예그리나가 떠나면서 들린 등 뒤로 들려오던 선율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아직도 가시지 않았던 이별을 우리에게 보낸 그 구절이 시가인지 노래인지도 모를 오묘히 펴져가던 밤하늘의 선율이 어딘지 모르게 구슬프게 들려왔지만, 반대로 그에게서 작은 의지가 엿보여서 나도 모르게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봤다. 어째서 난 그리도 느꼈던 걸까. 뭐든,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요정을 사랑한 시인, 음유시인 예그리나.



그것이 진실, 그것이 거짓.

당신이 있었고, 그녀가 있었다고 해.


그녀가 오고나서 혼자만을 바라보고 살던 당신은

은인이 떠나가니 모두에게 해를 입혔음을 깨닫고

다음날, 손을 잘라버렸고.


떠난 연인을 만나려 평생을 속죄했다던 당신은

달라진 애인을 외면하고 평생의 죄를 짊어지고선

다음날, 눈을 뽑아버렸지. 이후로.


어떠한 짖궂은 비도 내리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다리를 뜯어버리고 귀도 육체도 세상도 뜯어내버리니

입으로만 숨을 쉬고 노래하며. 무료하게, 숨을 죽여나가네.


무엇이 숨죽인 새를 울렸는가. 결국 알고야 말았네.

단념(斷念), 단절(斷絶), 단혼(斷魂), 이 어설픈 허언들을.

거짓말쟁이의 그림자는 무슨 색? 검붉게 물들여있나니.

태초보다 부끄럽던, 유언을 남기며 이 이야기는 끝이 난다.


고맙습니다. 소복한 사랑을 내려주신 그 겨울날.

알고 계셨습니까? 그릇된 사랑은 바라기만 해서는 아니됨을.

받아들이는 것. 허나 아무도 이 뜻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허나.


눈부신 그대는 오늘도 달밤에 찾아옵니다.

Je ne regrette rien. 그대를 떠나보낸 걸 후회하지 않아요.

단지 영원토록, 그대는 거기에 그대로




계셔주실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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