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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아니다····.”



하루를 떠나보내자 또다른 하루가 찾아온다. 꽁꽁 싸매고 있던 두텁던 껍질을 제게로 부는 바람이 무심히 벗겨내자 안에는 여리게 개화의 막바지일 꽃봉오리 하나가 혼잡하게 흐르고 있던 심류를 거치고 마침내 지상으로 나와 그 존재를 약간이나마 환기시켰다. 아아, 고독히 뻗은 줄기 끝에 꿀물을 머금은 나비 하나가 안정을 취하니, 온기가 전해지는 구나. 은혜를 베풀어주신 덧없는 은인이시다. 별것 없던 소인에게는 손을 내밀어주신 것만으로도 족한데,

예전엔 없었을 마음속 도원향과 또 기척따위 느껴지지 않던 한편의 신기를 눈속임으로, 곱아진 줄기를 일으켜 주시는 기적을 선사해주신 용사님께 감사할 따름인데 제 짧은 고찰에도 흐트럼 없이 단소한 제안과 지혜로운 방식으로 모든 잘못을 사하여주시어, 과히 득도하신 현자가 따로 없으시다. 난 정말 이 분 곁에 머물러도 됐던 걸까? 분에 넘치는 헌신에? 역시나 그렇기에 조아리는 게 당연할 터인데, 어차피 나란 그저 누군가에게 밉보이는 대역죄인 일터. 아아, 그때 기억 한편의 공포가 도사리는 것 같다. 마주하기 두려워. 그럼에도 이 분은 너무나도



- 상냥하시다. 이 미련한 자를 다시 봐줄 만큼 너무나도 (소근) 【LV.39/음유시인】


- 음? 지금 뭐라고 했어? 【LV.0/용사】


- 아니오. 별말은 없었습니다. 다만 이렇게 쉽게 처분할 죄였을지는 조금···.


- 뭘 더 망설이는 거야. 시간을 너무 오래 지체됐어. 당신 말대로 내 동료들이 고전하고 있다고.


- ····그러해도 소인은 당신께···.


- 하아. 또 방금 한 말에 뭔가를 착각하고 있나 본데, 이제 당신을 신용한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지. 용서해줬다는 말이 아니야.


- 아···· 예. 잘 알고 있습니다.


- 결코 변함없어. 그때 당신은 상대의 말을 귀 기울이지 않고 오해를 범해 목숨이 날라갈 뻔했어. 상대의 의지는 막론하고 자기입장만 내세우는 것까진 어떻게든 납득한다 쳐도, 방식이 잘못됐지. 말로 오해를 풀어갈수 있있는데도, 당신은 그러지 않았어. 이유도 모르는 상대에게 무작정 무력을 행사하며 자신이 내린 결론외의 건 무시할 뿐이지. 그래서 당신을 용서할 수 없어.


- 이 죗값을 치르지 않는 한 영원히 짊어져야 하겠죠. 그럼 벌을 받지 않는 한은—(!)


- 나참. (마갑 위로 올라타며) 자꾸만 죄, 죄, 죄. 신경 쓰이게. 그렇게 죄에 연연하면서 변할 생각은 없는 거야.


- 변하다. 아, 처벌을 받으려면 자세를 정정하란 소리군요. 주제비도 모르고 뻔뻔하게 낯짝을 들이밀곤····.


- 계속 답답하게 구니까 확실히 말할게. 무시하고 자기 선입견만 강요하는 그 일관된 태도, 지금도 화가 나거든.


- (!) 그렇습니까? 하지만 속죄를 하려면 쓰디쓴 처벌을 해야만.


- 그니까 왜 속죄를 처벌로만 받아들여. 더는 안 그러면 되지. 예그리나. 당신, 요정들을 지키고 싶댔지?


- 예. 이 한몸 죽고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 그럼 요정들을 지켜나가면서 속죄해 나가. 다른 상대방을 존중해주는 마음으로. 속죄는 말이지. 처벌 뿐만이 아니라, 누군가가 죄를 짓지 않게 하는 것도 있다는 걸.



“여태껏 당신이 검은 요정들을 제지시켜 온 걸 말이야. 요정들을 위해 준 그 마음으로.”



정말일까? 정말인가요, 용사님. 제가 해온 일들이 잘한 건가요. 그걸로만 되는 걸까요? 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관뒀다. 이이상 말했다가는 본분을 지키지 못하게 돼. 대신 동굴에 대한 언급을 해보았다. 허나 또 깊이 있는 옛 죄목까지 들춰지게 될테니, 말을 아낀다. 그리고 용사님을 태운 마갑(馬甲) 『류거흘』은 바깥으로 빠르게 향하는 나. 몇년전에 나보다는 더 경각심이 없었는데, 용사님과 연을 맺으니 여태까지 이 동굴을 무참히 걸었던 어제의 자신보다 발자국을 꾹꾹 새겨나가며, 오늘의 나에서 내일의 나로 발돋움해야 할 때다. 무엇이 달라질진 물음표는 흘려보내고, 오늘의 전장에 서려는 물음을 던져본다. 이렇게까지 이끌어줬던 나는, 정녕 무엇을 해야만 할까? 그러나 이미 용사님이 접근해온 것과 그가 곁에 두고 있다. 정해진 결말, 예상되는 과정. 난생처음 이런 홀가분한 처지에선. 언제쯤이었을까, 도피만 곱씹으면 나였다면 못해왔을 걸. 어디쯤에 있을까.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냈던 과거의 나에게 묻는다.



무엇 때문이었소. 육인(戮人)으로 낙인 찍히신 발단이.











제 28화. Je ne regrette rien










의문을 제시하며 가다보니 어느새 시간마저 거슬러 올라가니, 당신이 여길 보고 계시는 군요. 그래요. 아직 세상물정 모르던 철없는 어린 시절의 당신이 괜히 그립게 다가오더군요. 하하. 예. 거기부터 떠오르네요. 분명 그때였죠. 제가 살던 저택, 그 근처에 있던 인근 숲에 부모의 심부름으로 정처없이 떠돌고 있던 때를. 맞아, 그랬군요. 그때의 날씨는 싸라기 눈이 부슬부슬하게 내리고 있던 어느 동결된 겨울날. 그 코흘리개가 때낀 볼에 달아올라서는 홀로 심부름이라, 지금 보면 이상할 따름이었죠. 이상해도 어쩌겠습니까. 집안 사람들의 기대가 그렇게도 간절한데, 어려도 부응하고 싶다면 싶다면 작디작은 손발로라도 꼬물꼬물 꺼내들어야 겠죠.



- 찌르르르~


- ···.


- 찌르르르~?


- 아, 안녕 반가워. 나, 난 (에취) 예그리나라고 해. 너는?


- 찌르찌르 찌르르~!


- 그렇구나. 너 혼자구나. (휙휙) 정말 너 혼자인 거야?


- 찌르··· 찌르르···.


- 걱정마. 그럼 내가 가족들 품으로 돌려 보내줄게. 자, 이리와. 같이 가자.



새하얀 눈들로 뒤덮힌 푸르렀던 숲 한복판에, 도저히 육안으로 분간이 어려운 은백색 털과 파란 눈망울이 말똥말똥하게 뜨고 있던 작은 아기 『진눈토끼』를 지나가다 우연히 발견했지요. 그럴때 당신의 기분은 발견하기도 힘든 몬스터를 우연히 발견해 얼떨떨 하면서도 한편으로 어색하며 마지막 한편엔 내심 안심이 됐을 테죠. 추위에 떨면서도 당신은 그 작은 생명체에게 거리낌없이 다가갔습니다. 뽀드득 뽀드득. 한기에 도사린 짐승을 향해. 당신이 할 수 밖에 없었던 포옹은 그누구도 하지 못했을, 특히나 당신같은 어린애들은 상상도 못할 선의의 미소···



- 이리와, 토끼야. (에취) 날씨 많이 춥다. 헤헤.


- 찌르~ 찌르르! (다다다)


- 우왓! (팍) 갑자기 달려와서 놀랬잖아;


- 찌르르~ 찌르찌르!


- 그래, 옳지 옳— 어? 저기서 뭔가 빛났는데, 뭐지?


- 찌르르? (휙)


- 움. 별일 아닌 것 같다. 가자.


- 찌르···?


- 이제.


-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낼—












“꾸에에엑—!!!”













“—게. 보냈어. 심부름 끝났다. (딸그랑)”



를 지으며 아무렇지 않게 건내시는 ‘살육’은 따듯한 온기를 지닌 날카로운 바람결처럼 이중성을 뛴 아이의 순진무구함, 그 모든 것들이 전부 당신. 그것이 과거의 나. 어린시절의 기억. 그것이 묻어버렸던 피로 더럽혀진 당신의 역사. 그날도 가업이라는 명분으로 조용히 살고있던 생물의 절식을 눈앞에서 지켜봐야했던 아이. 직접 손을 써서 참혹한 광경을 만들어야만 했던 유년 시절. 당신은 꽤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식구도 알맞게 있고 절대 혼자라고 말하기 힘든 구성원들과 함께. 하지만 부유한 자택에 가려진 지붕 표면을 뜯어내보면 내부에 드러나는 진실, 그건 바로 ‘암살’이란 추한 단어가 뒷 말에 메꾸었지. 당신 집안은 대대로 암살을 생업으로 종사하였고, 또 거기에 나름의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움직여야만 했다. 그들의 가업이란 숙명 아래 내려진 악마의 심부름, 일명···· ‘살육에 익숙해지기’. 자식을 굴림하는 권력자인 친아비의 뜻대로. 의뢰를 받은 왕가 식구나 고위 귀족들과 같은 다른 이들의 목숨을 앗아 얻은 이익에 취해 눈이 먼 아비는 매번 자식 손에 싸늘한 칼을 쥐어준 채 다정하게 속삭였지. 기대하마, 라고. 아이의 시선으로 본 기대란 단지 인형처럼 하란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

죽는다. 저 자의 기대에 못미치면, 죽을거야. 곧바로. 타인의 생명을 빼앗아 자신의 목숨을 취한다. 돌려말하면 살육을 안하면 살해된단 공포속에서 연명하는 ‘암살병기’로 철저히 세뇌되어 갔다. 살의에 떠는 피살자에게 정작 사형이 두려웠던 암살자는 언제나 친족의 그 기대속에 서서히 운명해갈때, 세월이 흘러 난데없이 다가선 것이 큰 변착점으로 닥쳐왔죠.



그것이 슬프게도, 제 연인과의 기묘한 첫 만남이었습니다.



- 이제 너도 클만큼 컸으니 나이대 걸맞게 표적을 바꿀 때가 됐다. 자, 보이느냐. (척)


- 예, 보입니다. 아버지.


- 이것이 네게 주는 주요 과제다. 이 새장 안에 들어있는 게 무엇일 것 같지?


- 무엇인진 몰라도 무엇을 해야될진 알고 있습니다.


- 흠, 올바르게 성장했군. 허나 암살을 하려면 적어도 감행할 대상의 신상을 봐두는 것이 중요하다. 요정(妖精)이다. 얼마전, 네 혈족이 사로잡아온 인격을 갖춘 작은 샘플. 인간을 대적하기엔 아직은 이르니 머리를 가진 생명의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거둬들이는 게, 예그리나. 너의 과제다.


- ····


- 그러면 믿고 맡기고, 다음주 이맘때를 기대하마.



민간인처럼 인격을 겸비한 지적 생물체. 한마디로 여태껏 본능에 충실하기만 한 짐승들을 무자비로 저질러왔다면 이번엔 이성을 지닌 이 작은 요정이 암살하라. 단연컨데, 이때의 당신은 또다른 과거의 나. 요정을 지키고 싶던 내게보다 살의로 충만한 당신은 그저, 증명할 한낱 제물에 불과할 뿐. 당시도 암살이란 무거운 사명에 짓눌려 살았지만, 그건 인간일 때 잠시뿐. 나머지는 익숙한 당신에겐 해당사항이 없었지. 곧바로 흉기를 꺼내들어 세상모르고 자는 가증스런 요정님을 도살했겠지만, 그래도 친부가 직접 주신 과업은 허투로 다가서지 않던, 치밀함은 액취가 케케묵은 방을 나와 평소 일일 과제를 마치고 하루가 저물어 문 앞에 다가설땐 암기(暗技)를 감추고 들어섰어. 갇혀있다해도 예외는 아니기에 준비는 철저했지. 그런데 만일, 미처 예상못한데서 그 예외가 생긴다면?



- ····지금, 뭐하는 거지?


- (화들짝) 뭐, 뭐야?! 또 그 인간이···· 어, 아니네. 그런데 넌 누구?


- 내가 먼저 질문했다. 그거 대체 뭐냐—


- (꿈틀꿈틀)


- !!! (내가 지금, 뭘 본 거??)


- 대답하기 싫으면 말고. 그보다도 조용히 해줘. 지금 치료 중이니까, 조금만 더하면.


- 뭐···? (헛것을 본 게 아니라면 방금 본 게 진짜였다ㄱ)


- (들썩) 사르륵.


- 크악!? (콰당)


- 이제야 됐다! ㅇ? 왜그래? 요정이 치료하는 거 처음 봤어?


- 치, 치료라구? 방금 게···?



틈새로, 요정님과 청록 줄기로 연결된 도마뱀이, 창밖으로 나가버린 것이었다. 기상천외 했었지. 난생 처음 봤을 광경일테니. 왜냐니? 그야 당신이 놀랐으니까. 어째서 놀라야만 했냐고? 낸들 아나.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아까전 꽁지 빠지게 도망친 도마뱀 때문이겠지. 그야 그 도마뱀, 당신이 창가에다 매달아 놓은 것이니까요. 고작 창가에 어슬렁 거린다는 이유만으로 바깥에 난 덩굴을 칭칭 감아 목매달아 놓고선, 몇달을 놓아둬 수명이 진즉에 끊어줬어도 이상할게 없는데, 그때 창가에 놓아둔 새장에 갇혀있던 요정님이 아마 그 짐승을 발견하곤 즉시 스스로의 방식대로 회복을 시켜줬을 거란 건 짐작이 갔을 당신이 소스라치게 놀란 건 좀 더 세세한 쪽으로 작용했을 터. 

그것은 ‘절명했을 생물이 다시 소생해 멋대로 움직였다’. 소생은 죽은 자가 되살아남과 동시에 죽인 자의 책임도 같이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하죠. 이 이념을 무의식적으로 느꼈을 겁니다. 죄를 짊어질 부담감을, 근거없이 죽였다면 더더욱. 첫 혼란에 한 3일정도 방을 못 들어섰습니다. 어린 당신이 감당하기 버거웠죠. 죄책감이, 더군다나 면역조차 없었으니까. 그런 사이에, 겨우 방에 들어가보니 요정님이 사라지셨어. 이때 당신은 어떻게 탈주했지 보다 표적이 도주했다에만 시선이 쏠렸고 두려움에 집안 이곳저곳과 외곽까지 샅샅이 숨죽이며 뒤졌지만, 찾지 못했어. 연이은 두번째 혼란. 할수 없이, 당신은 평소처럼 심부름에 나섰어. 티내지 않기 위해, 산만함을 지우고, 찬찬히. 그래도 평소같진 않았는지 자꾸 엉뚱한데로 기어들어갔어. 어딘진 모르지만, 아무튼. 눈발이 유달리 거세서 보이지 않은 걸수도 있지만, 정말로 아무도 없었어. 그럼에도 묵묵히 심부름을 마쳤지, 지독하게.



- (무사히 심부름을 끝냈다. 꽤나 멀리 간 것 같지만 괜찮아. 눈발만 거치면 동향은 파악 가능해. 어쨌든 요정을 되찾아야)


- 인간!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당장 안 내려놔! (버럭)


- 뭐? (휙) 요정···· 요정····!


- 너 거기 딱 가만히 있어! 그리고 그 아이를 얼른—



쏴악



- 윽! (휙) 뭐야. 지금 뭐하는 거야, 인간!


- 이젠 안 놓쳐. 잠시 한눈판 사이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모르겠지만, 더는 봐주지 않아. 이자리에서 즉시 처리하지. 이이상은!


- 정신차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대충은 알겠는데 지금은 (!!) 나왔다···. 당장 피해! (파라락)


- 무슨 헛소릴 지껄여—



파캉!



- ····갑자기 치다니 무슨 (!!!) 어, 저게 뭐야?!


- 어서 도망쳐! 그 아이도 데리고! 아무튼 달아나야 해!!


- 어, 어···! (후다닥)



보았어. 요정님에 의해 옆으로 튕겨져 나갔을 때, 눈에 들어온 거대한 몬스터 한마리를. 은백색 털과 파란 눈동자, 앞으로 길게난 뾰족한 엄니와 어금니. 저 모습은 틀림없는 진눈토끼였지만 어릴 때 보았던 작은 토끼하곤 차원이 달랐지. 어릴 적부터 숲 깊숙히 들어가지 말라고 한 것과 현 상황과 동일시 할 쯤에, 물론이지만 도망칠 방법 밖에 없었다. 본능적으로 어서. 역시나 심부름은 놓치지 않았군.



“지르르르! 지르르····.” 【LV.36/진눈토끼】



- 후우···. 간신히 갔네. 그래도 모르니까, 이 동굴 안에서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나가자.


- 그전에 너는 뭘 한 (팍) 읏! 지금 뭐하는 거야!


- 응차! 너 거기 꼼짝말고 있어. 이 애가 많이 놀란 것 같으니까, 안정부터 취해야겠어.


- 뭐하는 짓이야! 그거 당장 돌려줘! 어딜 감히 표적 주제··· 어? (풀썩) 갑자기 몸에서 힘이 빠져····



번쩍. 순간 어른거려오는 눈부신 빛, 작은 목소리.



- 정신이 드니?


- 뭐, 뭐야. 나 왜 누워있···· 윽. 아파?


- 얌전히 누워있어. 갑자기 쓰러져서 치료 중이거든.


- 뭐?



그러자 환해지는 시야. 그리고 눈에 들어온 건 다름아닌 내몸과 연결된 가느다란 식물 줄기가 요정님하고 연결되어 있었지. 무슨 경위인지 부터 파악하던 중에 요정님이 말을 꺼내시기 앞서, 중요한 하나가 머릿속을 흝고 지나갔지.



- 그러니까 피하라고 했을때 피했어야지. 그래도 어린 인간족에겐 무리였을려나. 그 몬스터에게 아슬아슬하게 스친 발톱 때문에 쓰러진 것 같아. 그러니 가만히—


- 잠시만. 내가 붙잡은 몬스터··· 어딨지. 어디갔냐고.


- 아, 그 애. 치료가 먼저 다 끝나서 보냈어. 다음부턴 그러지마.



팍!



- 앗! 아직 일어나면 안된다니까!


- 누구 멋대로 내가 잡은 걸 놓아줘. 네가 뭔데 내 걸 놓아주냐고!! (버럭)


- 꽤나 급했나 보네; 그래도 안심해. 네가 뭘 몰라서 그렇지, 그 애는 머—


- 모른다니? 너 뭐야. 아까 그 몬스터도 그렇고 사라졌던 것도 그렇고, 냐가 잡은 걸 놓아준 것도, 넌 대체··· 됐다. 얌전히 죽으면 다— 응? 칼. 내 칼 어딨지? (흠칫)


- 덜컥 겁이 났나 본데, 걱정마. 다 끝났어. 널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 줄게. 그리고 말하겠는데, 몬스터는 ‘먹는게’ 아니야. 다음번엔 그런 짓하면 안돼. 알겠어?


- ···먹는 거?


- 인간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는데 인간은 죽은 짐승의 살점을 먹는대매? 하지만 가축의 살만 먹는다고 했지, 몬스터를 먹는다는건 들어본 적도 없고, 그 앤 진짜 못 먹는다고! 예컨대, 넌 혼자 고립되어서 배고픔에 시달리다 주위에 몬스터를 잡아먹으려 한 거야. 맞지?


- ···뭐?


- 솔직히 좀 그래. 죽은 시신의 살점으로 허기를 채운다는 게 나름 꺼려지긴 해도, 여타 잡아먹는 몬스터도 종종 본 적이 있으니까, 타종의 생존 방식에 뭐라 할 입장은 아니지. 다른 거뿐이니까.


- 뭐라는 거야. 누가 몬스터를 잡아먹—


- 자, 저거라도 먹어. (구석을 가리키며) 내가 밖에서 구해온 열매들인데, 겨울철이라 많이 열리지 않았지만 일단 먹어둬. 데려다 줄 때까지는, 응? 왜그리 뚫어지게 봐? 설마, 날 먹으려고. 이런, 요정도 먹는 게 아니라고; 어려서 뭘 모르네!



말문이 탁 막혔죠, 하하. 참, 웃을 타이밍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요정님께 들은 첫 훈계였죠. 당장이라도 달려들을 심보였지만 막 깨어난 탓에 정신도 온전치 않았고, 요정님의 귀여운 구절에 넋이 나간 것도 한몫 했으며, 정확히는 칼을 잃어버렸기에 이러지도 못하고 홀로 사색에 잠겨있었어. 그뿐이었지. 그렇게 시간이 흘러 눈발은 차츰 잦아드니 이윽고 자택 근처로 혼자서도 길을 잘 찾아오던 당신이라 요정님 도움없이 순탄하게 도착했어. 이렇게 사건은 일단락 됐지.



- 이제 그만 가야겠다, 안녕! 다음부턴 그러지마!


- 으응, 잘····(!) 뭐, 잠깐만!


- 응?


- 어딜가려고! 너땜에 심부름도 제대로 못하고, 순순히 널 풀어두게 냅둘 것 같아!


- 허? 네가 뭔데 날 풀어주냐, 마냐야. 너도 날 잡은 인간하고 한패였어?


- 그럼 죽어.


- 뭐?


- 내 손으로 끝나야 이 모든게 끝나. 너땜에 빈손으로 왔어. 그것도 죽이지 못하고 내빼버렸지. 어차피 네 목숨따위.


- 고작 그런 이유로? 흠, 아직 어린 애구나.


- 넌 죽는다고! 내 손에!!


- 그래. 놨두면 위험한 녀석이란 건 잘 알겠다. 어쩔수 없지. 곁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지. 비밀이긴 하지만 어차피,



“요정은 죽지 않아. 숲이 존재하는 한은.”



결과적으로, 심부름도 못한 채로 요정님만 돌아오신 꼴이었지만 처음으로 요정님과 같이 붙어 다니게 된 계기가 되었고, 처음으로 친부에게 심부름을 못다한 초벌을 엄하게 받게 되면서 그냥은 죽이지 않는단 걸 깨닫게 되었고, 처음으로 꽁꽁 얼어붙은 이성에 따스한 온풍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초반부터 받아들이지 못했어. 오히려 자신을 세뇌시키기에 이르러, 가업이다. 가업을 이어받아야 한다며 신념의 반하는 감정을 억누르려 했어. 예전부터 그래왔었지. 왜냐면 기대를 놓칠 수 없으니까, 맹목적으로 아비의 교육과 채벌은 피해가기 위해서라면 그 기대에 부응시켜야해서 그래서, 하루에 열댓번씩 요정님께 칼을 휘둘렀어. 매일매일. 그러나 요정님은 그런 당신을 매번, 피해주셨지. 오히려 조롱하셨어. 그 조롱은 어쩌면 결과적으로 의도하신 거실수도 있지. 왜냐, 요정님과 곁에 있을 동안에는 작은 생명조차 건들수 없었으니까. 매일은 아니지만 가끔 가족에게, 비하와 폭력이 빗발쳤지.



- 괜찮아, 너? 오늘도 인간들에게 당한 거야?


- ···.


- 혹시 아프면 말해. 담아두지 말고. 아니 그전에 네게 당하려나? 그래도.


- 신경 꺼. 네 몸조리나 잘해.


- 그게 걱정해주는 요정 앞에서 할 소리니! 정말! 교육이 시급하구나. 인간들은 알다가도 모를 생명체야. 같은 종족끼리 해치는 것도 이상하고. 관여할 바는 아니래도, 흐음···.


- ···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서 마지막까지도 당신은 요정님을 건들지 못했어. 중요 과제인 요정 암살의 실패 대가는 참으로 가혹했지. 이때부터가 집안 식구들의 대립이 심화 되었지. 비하는 기본이고, 폭력은 가속화 됐지. 다행인지 아닌지, 그 모든 건 수행 결과가 주로 밤에 이루어졌기에 요정님의 눈을 피해서 그림자들은 움직였어. 여긴 암살자의 소굴. 그들도, 나도. 요정님이 잠드신 틈에

심부름을 수행했어. 철저히. 후에 제대로 알게 된 거지만 요정님은 밤에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어. 그건 잠드신다는 뜻이자, 그것이 요정님들의 특성이셨단 거지. 생명이 잠든 밤시간대만 같이 잠이들고. 낮엔 목표물을 봐두고, 밤에는 실행. 대죄여도 그래야만 이 집안에 남을 수 있었을 테니. 내가 하는 건 살아남기 위한 연장 수단. 그럼에도 전혀 모르시던 요정님은.



“정말로 끈질기네. 그래봤자 그렇게 느려터진 지상전은 요정에겐 소용없다고!”


“안돼! 몬스터를 건들면 안된다구! 얘들아, 얼른 도망쳐어!”


“우히히! 걸려들었구나! 그러니 이젠 순순히 포기— 어? 왜 반응이 없지? 괜찮, 으앗! 깜짝이야; 날 속였구나!”


“차차 교육의 성과가 나오네. 뭐, 아니라구? 그렇지 않아! 오늘도 칼 안들고 나왔잖아. 잘했어! 아, 이거 칭찬이다ㅋㅋ”


“어라, 왜 빨개져? 호오~ 설마 칭찬들어서 부끄, 아야! 으으, 쳤겠다! 칭찬 취소야. 흥!”



아무리 그녀에게 흉기를 휘둘러 봐도 요리조리 피해가고, 몬스터 살생에 나서면 어떻게든 방해놓고, 간혹, 그녀가 놓은 덫에 걸려 확김에 골탕먹이려 들어도 항상 요정님은 다가서서, 웃는 낯으로 받아주셨어. 처음에는 살의로, 중반에는 의무로, 이 다음엔 괜스레 화풀이를 해도 흐트러짐 없이, 순수하게 받아주었어. 끝내도 모르셨어. 당신은 매일밤 숲에선 암살을, 집에선 온갖 고문을 당해왔단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모진 고통 속에서 살아왔어, 당신은. 누구에게 매달리지 않는다면 금방이라도 깨질듯이 헐떡였어. 그런데 그때도, 어째서 웃어주셨을까. 말했잖아, 그녀는 몰랐다고. 아니야, 그게 아니라

당신이 웃었어. 해맑게. 그때의 당신은 기뻤는지도 몰라. 흑역사 속에 묻힐 뻔한 당신께 한줄기의 빛이였던 분이 요정님, 그녀라고 말할 수 있어. 기뻤어. 기쁜 동시에 난 한가지 진실을 깨달은 거야. 그녀가 머물러주지 않았으면, 죽었어. 진눈토끼가 달려들 때 그녀가 없었다면, 죽었어. 그녀를 만나지 않았으면 영영, 죄를 짓다가 죽었을 운명. 그녀는 은인이자 구세주.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죄책감도 무뎌지고 들키지 않게 몰래 만나는 날도 잦아질수록 언젠부턴가 다르게 다가왔단 걸. 그래. 사랑에 빠진 거야. 고통받는 삶과 대비해 그녀의 존재가 두드러졌기 때문에? 아니, 그런건 상관없어. 주제넘는 것이라 해도 애당초 이유따위 상관없었지. 근데도 금방 깨질 유리 빛이였던 걸까?



- 가지마. 가지말라고. (꾸욱)


- 이거 난감하게 됐네; 그래도 말이야.



“꼭 고향에 돌아가야 하거든. 모두가 날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아슬아슬하게 인연을 계속 이어가다 찾아온 마지막 세번째 충격, 이별. 그녀는 말했었다. 지신은 이 숲의 요정이 아니었다고. 원래는 멀지않는 녹음이 우거진 숲에 살다가 어떤 한 인간에 의해 잡혀온 거였다고. 하지만 깨어나보니 숲이 겨울잠에 빠져있어 그동안 잃었던 체력을 회복하기엔 무리였다고. 그러나 현재는 봄이 찾아왔고, 무사히 자연회복된 그녀는 지금, 당신 곁을 떠나려 했다. 그 말에 당신은 가만히 듣다 이윽고 질렀다. 때를 썼고, 가면 죽여버리겠다는 망언까지 퍼부었지만 그대가 눈물을 보였을 적에, 그녀는 당신이 죽이지 못할 것을 깨닫고 잠시에 정적을 틈타 무언가를 건네주셨지.



- 어쩔수 없지. 그러면 갖고있는 건 딱히 없지만 받아. 작별 선물 대신이야. (척)


- ····이게 뭔데, 훌쩍.


- 네 왼손에 들고 있는 건 우리 수피아들이 사용하는 『신호기』야. 원래는 비상시에 쓰는 장친데, 어차피 가다가 위험에 처할 일도 없을 테고, 또 받으면 되니까. 혹시라도 곤란한 일 생기면 그 버튼을 눌러서 불러. 한번 다시 올게.


- 그럼. 지금 누르면 계속 여기 있어주는 거야? (쫑긋)


- 아니아니; 그거 일회용이야;; 정말로 네가 곤란할 때만 눌러야 돼. 알겠지!


- (시무룩)


- 그리고 네 오른손에 쥐고 있는 건, 『수피아의 기적』. 전에 본 적이 있을 거야. 너한테 한번 쓴 적이 있으니까. 이건 우리 수피아들마다 몸 안에 생성되는 작은 씨앗인데, 만약에, 음····. 네가 심하게 다친 나를 치료해주고자 할 때 반으로 쪼개서 각각 너 하나, 나 하나 먹는 거지. 그러면 각자 몸부근에서 새싹 하나가 돋아날텐데, 이때부터 상대적으로 체력치가 낮은 상대에게 체력을 나눠줄 수 있어. 즉, 네가 아픈 내게 조금씩 치료가 가능하다는 거야!


- ····이걸로?


- 응! 또 멀리 있어도 약간 나눠줄수 있고, 가까이 있을수록 특히 두 새싹을 한데 이어주면 효과는 배가 돼. 그래서 그때 네가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던 이유중 하나지, 에헴! 그때 구해준 건 고마워 해야 돼!


- 고마웠어. 정말로····.


- 어쩌다가 칭찬을 듣게 됐네, 헤에; 언젠가 말이지. 네가 보충보다 생명을 아껴주는 어엿한 인간이 돼서 다시 만났으면 좋겠어. 그 『수피아의 기적』,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나침반처럼, 위치를 알려주기도 해.

우리의 인연도 그랬으면, 헤헤. 그럼.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자. 잘있어!”



그녀는 그렇게 작은 『신호기』 하나와, 『수피아의 기적』이라는 씨앗 2개를 당신에게 건내주고는 지평선 너머로 날아가버렸어. 떨리는 그 손으로 그녀의 선물들을 움켜잡아서 따라잡지 못했어. 소중한 걸 보낸 어린아이의 첫 이별은 가혹하면서도 한편으로 후회가 막심했지. 이름도 못 물어봤는데, 그리고 또···. 그녀로 하여금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일상이, 그녀로 인해서 또다시 어둠만이 드리울 텐데. 딩신은 어째서일까. 그녀가 끝에 해준 말을 곱씹었어.

생명을 아껴주는 어엿한 사람···· 어느 때는 그녀가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었는데, 여기에 숲속 몬스터는 무척 보이지 않는다고. 그야 당연히 여지껏 그들을 해치워 왔으니까, 생명따위 소홀히 했고. 어쩌면 이 이별이 살육을 해온 내게 신이 내린 벌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지금 들었던 그건 기회일지 모르지. 그녀와 생명을 아끼는 사람이 되면 재회할 수 있다는 단 한번의 기회. 그것이 속죄이자 마지막 정식으로 고백할 수 있다면! 당신은 달라지기로 마음먹고, 스스로 용기내어 살인마의 소굴에서 자신의 발로 뛰쳐나와 순리의 속박에서 벗어나자 당신은, 오늘의 내가 됐어.



······그로부터 십 몇년 뒤, 저는 사랑을 노래하는 음유시인이자, 제 애석한 시가에 감명받은 왕의 어명을 받잡아 전령이 되어 전국 방방곡곡을 전언과 노래와 시로 사방을 떨쳤어. 처음으로 혼자 정한 일이자, 처음으로 자신이 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처음으로 그리움을··· 느끼기 시작했지. 새로운 세상을 만났어. 나의 본질을 알아주고 인정해주니 왕께 공을 인정받아 더 빨리 전달하기 위한 수단, 마갑(馬甲) 『류거흘』을 하사해주셨고, 그로인해 달려가는 말 발굽 소리는 경쾌하게 울렸는데, 그랬었는데 자유분방하게 살아왔던 탓일까. 어느 겨울날, 거처로 날아든 편지 한 통이 현실로 불러들였지. 처음 봤을 땐 일순간 등골이 오싹했지만 읽어보니 별거 아니더군.

못난 아비가 별세했다는 소식. 그래서 제사와 유품을 물려주겠다는 내용. 몇번을 망설인 끝에 걸어갔어. 당연한 얘기지만 아비의 제사 때문이 아닌, 그리움을 덜어낼 향수에 이끌려, 추억이 되었을 장소를 찾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지. 무사히 본가에 도착했고, 건네주는 눈길들에 살기가 감돌았지만 기둥이 무너진 지금,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지. 안다. 그렇기에 당당히 발을 들인 거야. 오늘 밤은 옛날 내 방에서 잠을 청하기로 한다. 자다 암살 당할 두려움보다도 그리움이 목매어 왔기에 방을 둘러봤다. 역시나 남아있어. 달빛에 그을린 창가와 끊어진 덩굴이 그대로. 어느정도 심취해 갈때 난 손길을 한 물건에 가까이 댔지. 그만큼 자신감이 생겼기에, 이날만을 기다려왔기에 부푼 마음으로, 눌렀다.

그러자 허공으로 신호음이 퍼져나가기 시작했지.





탁! 탁! 탁!



하루가 꼬박 지나고 나서야 이른 아침에 창가에선 부딪히는 서리 같은 게 들려왔어. 처음으로 아비의 유품인 총 두 자루, 『더 러버 송』과 『피가레오』를 두고 떠날 것을 암시할 때까지도 소리는 줄어들지 않았기에 고의적임을 알 수 있었지. 허나 하얗게 서린 창 바깥이 봉지 않았기에 열어보았지. 그때였어.



“제발! 거기있다면 대답 해줘—!!!”



개방하자 쏜살같이 재치고는 방으로 들어와 누군갈 애타게 외쳐대는 그··· 녀? 틀렸다. 그녀가 아니었다. 같은 요정님이셨으나, 열때부터 기대하였던 그녀와는 완전 다른 분이었지. 우선, 흥분하신 요정님을 진정시키기 위해 다가섰다. 내 모습을 적잖이 놀라신 표정이었으나 아랑곳 하지 않고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다. 가까이서 비친 초라하신 그 모습으로 겨우 바로 잡은 입술을 때실 때, 심상치 않은 징조를 느끼고만, 당시의 나를 회상하려 해.

····다그닥. 새삼 왕이 내려주신 마갑(馬甲)이 얼마나 경이로운 보갑인지 실감했지만 정작 발굽 소리는 경쾌하게 울리지 못했지. 저택을 박차고 나올 때부터 걸음은 무거웠어. 요정님께선 날 보시곤 몇마디 외치곤 대답을 듣자 오래 뜸을 들이시더니 말씀하셨어. 분명히 대답은 그녀와의 즐겁던 한 때에 관한 반문이었는데, 뒤늦게 들린 말씀이 너무나 당혹스러워 긴시간동안 정신없이 뛰어가던 나를 보았고, 요정님이 이끄는대로 도착한 곳은 어느 동굴 앞.



“네가 정말 만난 적이 있고, 지금 들고있는 『수피아의 기적』이 거짓이 아니라면

당장 먹어줘. 부탁이야! 제발 도와줘, 인간!”



뒤이어 화창한 이때가 덧없는 기회라고 재차 강조하셨어. 설명해주기 전부터 먹으라고 부탁하신 의도가 무엇인지 알았어. 매번 이 말을 품고 살았거든. 나침반. 씨앗을 먹고 나온 줄기가 멀리 떨어진 다른 섭취자를 향해 뻗는다고. 확신은 없었지만 이건 그녀의 몸 속에서 나왔던 것. 아마도···· 꿀꺽. 씨앗 하나를 통째로 삼켰다. 그러자 기적처럼 새싹이 팔 언저리에 피어나니···.


어째 불길한 검은 줄기가 동굴 안으로, 서서히 뻗어나간다.



•••



수십년 전, 오래 전부터 요정과 함께 나간이라는 몬스터와 대적하며 살아왔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이 요정 마을로 뒤엎기 시작하였다. 무리를 가득 이끌고 점령하려는 적의를 띤 채로 몇십년간 끊임없이 쳐들어 오려한다. 세월이 지날수록 난폭해지고 끝이 없는 그들. 그러던 어느날 사라졌던 자신의 옛 동료와 눈물 겨운 재회를 하니, 바로 그도 전투에 투입됐다. 돌아온 그는 훌륭한 전사였다.



다그닥 다그닥



진즉에 요정들은 무작정 전면공략은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고, 다른 방법을 모색하다가 몇차례 걸쳐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 밤에만 활동하는 야행성이라는 것을. 그래서 낮에 그들의 본거지를 공략하려 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동굴은 예상보다 갈피를 잡을수 없을 만큼 내부가 복잡했다. 도리어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있어 철회했던 찰나, 그거 뜻밖에 방안을 내세웠고, 성공하자 착수했다. 상처입힌 적에게 『수피아의 기적』을 심어 낮이되어 후퇴할 때 위치를 알아내자는 취지였고, 그런 발상에 보기좋게 먹인 것까진 성공. 그러나 이미 전쟁을 쉬쉬하는 분위기였기에 소수만 꾸려 설득 끝에 간신히 낮에 동굴에 들어서 그를 앞세워 방향을 잡아갔을 터다.

그러나 갑자기 차례차례로 동료들이 행방 불명되어 갔다. 이유는 곧 알았다. 칠흑속에 빛나던 눈빛들이 무섭게 쫓아왔고, 자신만 간신히 피해 나왔다고 한다. 이후로 동료들은 동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적들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홀로 고립된 두고온 동료들로 하여금 마을로 돌아가지도 동굴로 제대로 가지도 못하고 막히는 바람에 몇년을 노심초사 기다려야만 했다.

그때였던 거다. 신호가 엉뚱한 곳에서 들려온 게. 그 위치에서만 미세하게 들려왔다는 동료의 신호음의 출처따윈 고려하지 않은 채 곧장 날아갔는데, 동료는 온데간데 없고 인간만 덩그러니 있었다. 이게 요정님께서 들려주신 전반적 내용. 그러나 이당시 난 무엇을 느꼈는가. 과정의 안타까움? 아니다. 이 내용이 굳이 과거 회상 다음으로 나왔다는 의미와 유달리 처음 듣는 이름을 강요하던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걸음을 멈춘 그때, 생각은 현실이 되고, 참상이 된다. 깨져가던 참상의 조각들이 곧이어 쉴새없이 날아든다.



이것이 처음으로 아비의 유품을 꺼내들게 된 계기가 됐다.



철컥.



나는 이들과 싸우기 전 그들의 행보를 보았다. 정확히는 난쟁이처럼 보이는 몬스터가 아닌, 요정같지만 흉측하게 생긴 검은 형체를 가르킨다. 그들은 우릴 인식하기 전부터 계속 입구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고, 이를 보고 통로를 막아서고 있었음을 짐작했다. 곁에 계셨던 요정님과 싸워보니 알게됐다. 그들은 우리들 뿐만이 아니라 나간이라는 난쟁이 몬스터도 같이 공격하였다. 비슷해보이는 그들끼리 적대하는 꼴이 군내분열을 연상케 했다. 처음 겪는 전장과 예상을 뛰어넘는 공세때문에 지쳐만 간다. 대체 그녀는 어딨는 거지···? 애타게 찾아 헤매다가 한곳으로 이목이 집중된다. 그것은 이상하리만큼 동굴 중심으로 자리잡은 콩나무와 아까부터 적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거대한 몬스터가 그자리에 꼼짝않고 서있는 것이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이끌려갔고 거기서



믿기힘든 걸 목격하고야 말았다.



- 그럴리가. 말도···· 안돼. 【LV.25/음유시인】


- 기에에엑—!!! 【LV.48/호브나간】


- 당장 그 호브나간 한테서 떨어져! 인간—!!! (파라락)





그래, 맞다. 생각해보니 그순간은 마치, 어릴적 진눈토끼에게 구해준 시점과 겹쳐오더니 옆으로 튕겨져 나가버린 나. 그리고 이어서 들린 도망쳐, 까지. 같았는데, 쓰러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도저히. 몸을 움직이지 못하셨다. 요정님도. 몬스터에 의해서. 뭔가 잘못 돌아갔다. 요정니은 계속해서 도망가라 외쳐대지만, 같이 도망치지 못하고 몬스터의 손에 이끌려 콩나무 쪽으로 향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주위의 적들도 일제히 멈췄다. 다들 나를— 아니 내게 처음부터 관심없던 것처럼, 잠자코 시선을 어딘가로 향한다. 콩나무? (!!!)

그때였다. 바둥바둥 떠시는 하반신은 보이는데, 나머지 상반신이 콩나무 틈새로 억지로 쑤셔넣는 기괴한 광경은 지금 생각해도···.



쿠엑—!



나는 즉시 반동으로 손아귀를 향해 수차례 쏴 갈겼고, 곧이어 통증을 호소하며 구겨넣던 손을 잡아뺌과 동시에 떨어지는 요정님을 간신히 품으로 안겨들었다. 그러자 호브나간은 이윽고 달려들 태세였지만, 어째선지 총구는 그 몬스터가 아닌 콩나무를 향해 든다. 그때 또다시 이상한 광경이 펼쳐진다. 하려던 공습을 멈추는 몬스터 무리들. 순간 예상치 못한 이들의 정적이, 저 거목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상기시켜준다. 한손에는 요정님을 한손에는 『더 러버 송』을 든채 입을 때는 순간,

눈물 한줄기가 뺨을 적셨다. 누그러뜨린 입술· 하지만 억지로 입을 벌려, 말했다.



“이제서야···· 이제서야···· 그대의 이름을 알았는데, 만나기로 약속도 했으면서····.”


“정작 그 꼴이 무엇인가. 어찌 그런 두려운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야···.”



그녀였다. 콩나무의 억센 줄기에 꼼짝없이 매달려 검게 질린 괴물들과 다를바없이 눈의 독기를 올리며 생기없이 노려보는, 영락없는 그녀였다. 나의 첫사랑이자, 살아가던 이유가 거기서 괴물이 되어 노려보고만 있다. 그런데 이때 내 품 안에서 조금씩 눈을 감으려 하시던 요정님은 어느새 반이 검게 그을린 채로 마지막 힘을 짜내어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셨지.



도망쳐···· 라고. 재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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