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첫 눈이 내린다. 포근하게도 천천히 내려오는 눈들은 마치 한 폭의 그림을 체험하라는 것처럼 송이송이 피워올랐고, 나는 그걸 보며 붉은 목도리를 내리고 하이얀 입김을 내밀었다. 입김에 눈들이 녹으며 사라지는 그 순간에 누군가 나를 불렀다.


"유키~~"


"아, 하나타바..."


노란 머리, 베이지 색 코드를 입고 해맑게 자전거를 타고 오는 저 아이, 봄에 우연히 꽃집에서 만난 꽃집 가게 사장님의 딸, 여름에도 시원한 반팔에 나에게 대뜸 선인장을 내밀며 선물이라고 준 아이. 가을에도 낙엽을 주워 앨범에 넣을 거라며 떨어진 낙엽이 어디 없는지 찾아다니던 천진난만한 아이... 하나타바 나츠에가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보며 손을 흔들었고 하나타바는 내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나를 쳐다보며 헤실헤실 미소를 보였다.


"유키 머리 위에 눈 쌓였다. 귀여워."


"코 끝이 빨간 너보단 안귀엽지."


하나타바의 붉어진 코는 루돌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처럼 하얀 피부 사이에서 제일 붉게 보였고 내가 말하자마자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인 뒤 코를 문지르는 하나타바였다. 하나타바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코는 여전히 붉었지만 볼 주변이 붉어져 코와 맞춰져서 일직선으로 빨갛게 되었다.


"어때? 이젠 괜찮아?"


"아직은... 붉네."


"진짜로? 아 정말... 오늘따라 춥더라니. 슬프네. 요새 식물들도 얼기 시작해서 밖에 내놓지도 못하는데..."


"그래도 안은 따뜻하잖아. 게다가 곧 봄이 오니까 눈도 안오겠지."


내 말을 듣고 배시시 웃는 하나타바, 그 미소를 보고 따라 웃는 나. 오늘도 그렇게 시간이 지난다.

하지만, 봄이 온다면 눈이 녹듯이 나는 하나타바 앞에 나타나지 못한다. 내 이름이 유키여서 그런건 아니다.

그저, 엄마가 재혼을 해서 새아빠 될 아저씨가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가야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남은 기간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적어도 봄이 되기 전에 갈 것이라는 얘기만 들었고 그 뒤로는 어떻게 되는지 나는 모른다. 확실한건 하나타바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영원하지 못하다는 것만 확실하다. 내가 이 사실을 말하면 하나타바가 슬퍼하겠지. 그걸 말하는 나도 슬프겠지...


"유키, 만약에 봄이 온다면 내가 꽃다발 하나 선물 해줄까? 너랑 내가 처음 만났던 그 날에 내가 만들던 꽃다발 있잖아."


"그럼 좋겠네... 그때 어떤 꽃다발을 만들고 있었던 거야?"


"음... 라일락과 튤립으로 만든 꽃다발을 누가 만들어달라고 부탁해서 열심히 만들고 있었지. 그 얘기하니까 널 처음 봤을 때의 모습이 생각난다."


"응... 나도 생각나네."


그때 하나타바의 코트에서 빛과 함께 벨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아, 맞다 나 꽃 배달하다가 만난 거였는데. 얼른 가봐야겠다. 안녕~"


"어? 어어... 그래 잘가."


눈은 말없이 굳었다. 한폭의 그림이 점점 타들어간다.


.

.

.


유키가 멀리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아이의 어머니가, 우리 아버지에게 하는 말을 듣고 아버지가 내게 말한 것이었다.

울적하지만, 떠난다는 말을 스스로 말할 때를 기다리려고 한다. 이번에 배달할 꽃은 유키의 집을 지나며 가는 곳이다. 과연 만날 수 있을까? 만날 수 있다면 좋을텐데...


"다녀오겠습니다."


돌아오는 말은 역시 없겠지. 그리고 내가 들을 말도 없겠지. 나는 눈물이 났지만, 참아보며 자전거를 탔다.

눈이 내린다. 신경 쓸 필요 없다. 호흡 하나하나에 하얀 입김이 나온다. 춥다. 하지만 그 아이가 떠나고 난 봄이 더 추울 것 같아...


처음 만난 날... 내가 입고 있는 똑같은 베이지 색 코트를 입고 머리에 벚꽃을 달고 온 아이... 여름에는 더워하는 나에게 아이스크림을, 가을에는 낙엽 줍는 날 위해서 앨범을, 지금같이 차가운 한겨울에는 이별을 선물해주려고 한다. 오늘 같이 최악인 날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악은 눈 앞에 있었다. 유키가 현관 앞에 서있었다. 부르기 싫지만 불러본다. 더욱 차가워질 날을 만나기 전에 마지막이라도... 설령 이게 마지막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유키~~"


"아, 하나타바..."


붉은 목도리를 한 유키의 눈시울이 붉었다. 모른척 하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다. 그저 헤실헤실 웃음으로 감출 수 밖에 없다.

어떻게 말을 해야하는 걸까. 고개를 드니 문득 그날의 벚꽃처럼 머리 위에 눈이 쌓여 있었다.


"유키 머리 위에 눈 쌓였다. 귀여워."


"코 끝이 빨간 너보단 안귀엽지."


아... 웃음을 보니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울면 안되는데... 나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슬퍼보이는 눈이 눈 사이로 보인다. 유키라면 이것마저 한 폭의 그림이라고 하겠지.


"어때? 이젠 괜찮아?"


유키는 물끄럼히 나를 보더니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은... 붉네."


"진짜로? 아 정말... 오늘따라 춥더라니. 슬프네. 요새 식물들도 얼기 시작해서 밖에 내놓지도 못하는데..."


"그래도 안은 따뜻하잖아. 게다가 곧 봄이 오니까 눈도 안오겠지."


봄이 되면 눈이 안온다. 봄이 되면 유키도 간다. 나는 그때 뒤늦은 겨울이 찾아와 눈 속에 파묻히겠지. 몹시 추운 겨울, 어쩌면 지금보다 더욱 추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붙잡고싶지 않다. 말하지 않는 것에는 어쩌면 멀리 가는 것이 좋아서 그럴수 있으니까. 가지 말라는 말이 쉽게 나올리가 없다. 그래도...


"유키, 만약에 봄이 온다면 내가 꽃다발 하나 선물 해줄까? 너랑 내가 처음 만났던 그 날에 내가 만들던 꽃다발 있잖아."


"그럼 좋겠네... 그때 어떤 꽃다발을 만들고 있었던 거야?"


"음... 라일락과 튤립으로 만든 꽃다발을 누가 만들어달라고 부탁해서 열심히 만들고 있었지. 그 얘기하니까 널 처음 봤을 때의 모습이 생각난다."


"응... 나도 생각나네."


그날의 꽃다발은 빨간 튤립과 라일락이었다. 고백과 첫사랑... 어쩌면 그게 지금의 내 심정일지도 모른다. 은은한 라일락을 꽉 쥐고 팔을 내밀어 고개를 숙이고 받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좋아한다고 그러니까 떠나지 말아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모르겠다. 정말로 내가 그런 말을 해도 되는지... 전혀 모르겠다. 만약에 준다면 노란색 튤립과 함께 나를 잊어달라는 말을 해볼까.


그때 벨소리가 나며, 내가 어쩌다가 유키랑 만나게 되었는지 깨달았다. 


"아, 맞다 나 꽃 배달하다가 만난 거였는데. 얼른 가봐야겠다. 안녕~"


짧지만, 짧아서, 짧기에, 짧으니까... 행복했다. 이 봄이 지나기 전에 또 만날수 있길... 또 볼수 있길...

아, 눈물이 앞을 가려 흐려진다. 점점... 앞을 보지 못하겠다. 이 눈물 또한 눈 속에 묻혀 사라지길 바란다.


"하나타바!!! 앞을 봐!"


유키의 목소리... 어째서? 나는 뒤를 돌아보았고 나에게 달려와 나를 밀치는 유키를 보았다. 그 옆의 버스와 함께.


.

.

.


안녕이라는 말은 했지만, 역시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른다. 그러니까 아직 늦지 않았을 테니까.... 말하자!

나는 목도리를 붙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자전거로 지워진 그 눈길을 따라서 달렸다. 앞에 노란 머리의 하나타바가 보인다.

곧 빨간 불이야. 붙잡을 수 있어. 그러니까... 아직이야. 신호등이 빨갛게 변했다. 보행자들이 멈춰서서 대기해야하는 시점인 것이다.

자전거를 탄 하나타바도 마찬가지로 그래야했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고개를 숙여 보지 못했는지 그녀의 자전거는 더욱 앞으로 가기 시작했다. 놓쳐선 안돼. 적어도 사고가 나면... 그때 버스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나타바!!! 앞을 봐!"


하나타바가 고개를 돌렸다. 그럴 때가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엄마가 신호를 지키지 못하면 사고가 나니 반드시 지키라고 해서 지키고 살았다. 사고는 나지 않았지만, 기다림은 지루했다. 지금은 지킬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며 하나타바를 밀쳤다. 붉은 색의 장미 꽃잎이 휘날렸다. 버스의 빛으로 인해 휘날리는 그 꽃잎마저 눈처럼 아름다웠다.


눈을 뜨니 버스는 내 앞에서 가까스로 멈춰있었고 버스 기사 아저씨는 난처하면서도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내리고 있었다.


다행히 치이진 않았지만 하나타바는 넘어지면서 발목을 접질렀는지 절뚝거리며 나한테 다가오고 있었다.


"하나타바 괜찮아?"


"어째서... 어째서... 왜 온거야? 너 이사 간다는 걸 말 해주지도 않을 거였으면서..."


"뭘 말해...? 설마... 너, 누구한테 들은 거야."


"아버지한테 들었어. 아버지는 너의 어머니께서 말하시는 걸 들었고 말이야. 역시 너는 여기보다 그곳이 좋아서 그런거지...?"


"아니, 말하면 슬퍼할까 봐. 알고있었으면 말해주지. 여태 나 혼자서 고민했잖아. 게다가 난 잠깐이어도 너와 같이 있던 이곳이 좋았어. 너가 있는데 왜 이곳을 싫어하겠어."


하나타바는 내 손을 잡고 나를 일으켜 세워주려고 했다. 하지만 허리가 아파 움직이지 못했고 힘이 풀린 채로 도로 위에 누웠다.

분명 치이진 않았을 텐데... 고개를 들어보니 버스의 중간에 자전거가 보였고 그제서야 내가 한번은 치였다는 걸 알았다. 그래, 그러니까 버스 기사님도 난처한 표정을 같이 지은 거겠지.


"유키 아파?"


"응... 허리쪽이 아파. 미안해. 내가 너를 붙잡고 밀친 거 같아서 말이야."


"아니야. 내가 더 미안해. 내가 앞을 잘 보고 멈추기만 했었어도..."


".... 잘 모르겠다. 그래도 너가 크게 다치진 않아서 다행이네."


그 뒤로 나는 의식을 잃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에 누워 있었다. 옆에는 엄마와 새아빠로 보이는 아저씨가 내 두 손을 붙잡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창 밖을 보니 겨울은 다 지나고 봄이 왔나보다. 어쩌면 봄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뜻밖에도 내가 다치고 의식을 잃어서 그런지 아저씨가 내가 있는 쪽으로 이사 오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엄마는 내게 이사를 안가도 된다는 얘기를 했다. 다행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괜히 나때문에 아저씨만 고생하는 것 같아서 신경 쓰이긴 했다.


그렇게 나는 휠체어를 타고 종종 물리치료를 받으며 지내다 우연히 하나타바도 만나고 그러한 나날을 보냈다.

하나타바가 나를 오랜만에 봤을 때 끌어안고 울면서 그러길래 달래기 힘들었지만, 종종 집에 놀러 올 때마다 향이 좋은 꽃을 가져와서 집에 꽃향기가 끝나지 않은 건 좋았다.


그렇게 하나타바와 내가 처음 만난 날짜이 되자 하나타바는 내게 꽃집으로 오라고 말했다. 때마침 휠체어 타는 기간도 끝이나 절뚝거리지만 천천히 걸어 꽃집으로 찾아갔고 문을 열었다.


"어서오세요! 아! 유키~"


염색이 살짝 빠진 듯한 머리가 된 하나타바가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포근하고 따스한 포옹과 배시시 웃는 그녀의 미소에 역시 이곳을 떠나기 싫다.


"유키 어서와. 오랫동안 기다렸어."


"나도 여기는 오랜만에 와서 기분이 좋아."


"아, 사실 여기로 오라고 한 이유가 있어 나 따라와."


유키는 내 손을 잡고 창고로 향했다. 나는 절뚝거리며 그녀를 따라갔고 창고에 들어서자 한 가운데에 있는 장롱 위에 꽃다발이 하나 있었다. 빨간 튤립과, 라일락, 그리고 노란 장미가 함께 이루어져 잔잔한 색을 띠었다.


"저건..."


"헤헤... 거기 앉아있어."


하나타바는 의자에 나를 앉히고 꽃다발을 집은 뒤 내게 내밀며 말했다.


"너를 좋아해! 그러니까... 안가면 안될까...? 앞으로도 같이 있고싶단 말이야..."


"아... 생각해보니까 내가 말 안해줬구나. 사실 나 이사 안가기로 했어. 아빠가 이쪽으로 왔거든."


"정말?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난 너가 가고 나서 항상 너가 오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줄 알았어..."


눈물을 흘리며 우는 하나타바를 보며 나도 어느새 같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도 차분히 위로를 해주며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내 대답도 들어야지."


"응..."


"나도 널 좋아해. 그러니까 이 꽃다발은 내가 받을게."


"응...."


하나타바는 다시한번 나를 끌어안았다. 봄에 벚꽃이 눈 대신에 한 폭의 그림을 그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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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이름을 일본어로 시도해봤는데 괜찮나? 물론 발음만 가져와서 어색할 수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