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때 읽고 싶지 않았다. 읽음을 강조하는 당위성들은 이 세상 그 자체였고, 내 읽기를 강제하는 당위성들 또한 이곳저곳에 산재해 있었다.


어쩌면 쾌락이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내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3대 욕구에 지나치게 충실했던 지난 3시간이 떠오른다. 마치 원수를 난도질하듯, 맹렬히 시간을 죽이던 지난 3시간이.


어쩌면 지나간 시간이 아까운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내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흘러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떠나간 첫사랑을 그리듯 아무리 애절하게 불러봐도 절대.


어쩌면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내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급히 읽어야지, 불안을 해소한답시고 노트에 비겁한 참회를 적는다. 마치 어떤 프랑스인이 고백록을 적듯.


어쩌면 등쌀이 혐오스러웠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내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에게 주먹질을 선사하는 나를 뜯어말리는 것이 도대체 뭐가 나쁘단 말인가? '싸움하던 사람은 즉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고..'. 내가 시간과의 결투를 하지 않았을 때가 그립다.


어쩌면 저 핸드폰이라는 요물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내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유리방에서 유혹하는 창녀에겐 죄가 없다. 그에 이끌려 또 다른 무고인인 시간을 죽이는 내가 나쁜 사람일 뿐.


어쩌면 이 참회도 읽기로부터 나를 유리시키는 수단일지도 모른다. 이건 사실이다. 잠시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 아니, 영원히 멈춰서, 내가 이 방의 모든 읽기를 마무리 지을 때 쯤, 새벽 기차 출발하듯 느릿느릿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다. 이건 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