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숨을 깊이 쉰 후 내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을 내어쫓은 후 나와 가장 적대적인 인물로 보이는 김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벨이 몇 번 울리기가 무섭게 김준수는 대답했다. 

"오랜만이군."
"잘 지내고 있나?"

나는 적이라고 하더라도 인사는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적이 친구가 되어준다면 더 좋은 일이고. 

"용기가 대단하군. 방금 전에 너의 위치를 파악했다. 우리가 찾아가기 전에 네가 먼저 전화할 줄은 몰랐는데 말야."
"그래서?"

나는 뭣도 모른 채 전화하고 있다. 최대한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스스로 알릴 필요는 없겠지.

"우리가 너를 찾는 것은 평안을 주려는 것이지. 너의 괴로운 과거를 잊게 해주려고 했는데 네가 거부하고 달아나다니 섭섭하다. 자, 과거가 너의 밝은 미래를 망치게 해서는 안 되겠지? "
"그것은 내가 결정한다."

평안? 좋아하는군. 내 과거가 괴롭더라도 아무것도 모른 채 지내는 것보다는 이것저것을 다 알고 판단하고 싶다. 괴롭다고 회피하는 것은 내 성격이 아니다. 

"네가 동의했다면 우리가 너의 모든 기억을 지웠을 텐데. 그랬다면 넌 이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그것도 내가 결정한다."

놈이 도대체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주 중요한 단서를 얻었다. 나는 내 기억을 지우는 것에 거부했다. 나는 사고나 질병으로 기억을 잃은 것이 아니다. 내 의지가 기억 삭제에 거부했기 때문에 아마도 내 기억은 다 삭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놈들("우리"라고 했으니)은 기억 삭제의 능력을 갖고 있지만 나한테는 그 능력을 온전히 쓸 수 없는 것이 분명하고, 내가 의지를 갖고 있는 한 나의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기억도 다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이 세계에서 네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겠고, 누구도 너를 막을 수 없을 테지. 우리는 네가 원한다면 이 세계를 네 마음대로 주무르게 도와줄 수도 있었지."
"마음만도 고맙군." 

아무튼 이 놈들이 무엇을 노리는지 약간 알 것 같기도 하다. 논리상 놈들은 이 세계를 마음대로 할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들이 노리는 것은 이 세계보다 더 귀중한 것이다!  나는 순간 엄청난 흥분을 느꼈다. 뭔가 대단한 것과 내가 연관되어 있음이 느껴졌다. 나를 흥분시키는 것,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시온으로 돌아올 생각은 하지 말아라.  네가 돌아오더라도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이만 끊겠다. 통화를 할지 여부는 내가 결정한다."

나는 잡설이 길어지는 것을 싫어한다. 엄청난 정보의 뭉치가 덩쿨째 굴러들어왔는데, 이 "시온"에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즉시 휴대폰의 전원을 껐다.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 누구도 이상한 낌새를 차리지 못하도록 천천히 걸었다. 공원 앞의 공터가 마주보이는 4층 건물의 입구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계단을 이용해 옥상으로 뛰어올라갔다. 

2분쯤 지나자 공원 앞 공터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4-5명의 남성이 도로의 양쪽 방향에서 몰려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는 옥상 난간 위로 겨우 얼굴 정도만 올린 채 상황을 살폈다. 녀석들은 내 얼굴을 잘 알 것이다.  내가 폰을 끈 것은 지금 4분 정도 지났다. 옥상까지 2분만에 올라왔으니 망정이지 그 놈팽이와 몇 분만 더 통화를 했어도 영락없이 그 병원으로 원상복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검은 양복쟁이들 가운데 우두머리인 듯한 놈이 휴대폰으로 전화를 하고 있다. 나의 행방을 찾아내는 방법에 대해 논의하고 있을 것이다. 글쎄, 내가 휴대폰을 켜지 않는 한 나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지금껏 알고 있는 방법으로는 그렇다.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나의 위치를 파악하는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다는 뭔지 모를 막연한 느낌이 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나는 허전한 느낌이 들어 왼손의 약지 손가락을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로 주물렀다. 특이한 습관일까? 왼손의 중지와 검지도, 엄지도 주물렀다. 두 손을 깍지낀 채로 하늘로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찌뿌둥한 몸이 약간 풀리는 느낌이다. 

다시 난간 위로 고개를 밀어올렸다. 녀석들은 낭데뷰 지점을 정하고 흩어져 수색하기도 한 듯하다. 아마도 몇 분 후에는 한 두 녀석이 내가 서 있는 이 옥상 건물의 아래를 지나갈 것이다. 뜬금 없이 도망쳤다가 다시 김준수와 통화하는 것보다는 그의 한 졸개를 상대해서 뭔가 추가적인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  놈들이 무더기로 덤빌 때에는 내가 벅찼을 수도 있겠지만 한두 놈은, 아니 한 놈쯤은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 강한 확신이 들었다. 내가 그리 약한 놈을 아닐 것이라는 막연한 배짱과 같은 것이다. 아까 그 거구의 정신병원 간호사를 쉽게 처리한 것으로 보아 내 육체는 본능적으로 싸움에 길들여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