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보니 오래된 고급 승용차에서 정장을 입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자 내 앞에서 운전하던 사람이 말했다.


“김 부장님, 일어나셨습니까?”


창밖을 내다보니 남산타워가 보였고, 앞에 한 건물을 보니 이렇게 적힌 비석이 있었다.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나는 그것을 본 순간 아까 들었던 ‘김 부장’이라는 호칭이 문득 떠올랐다. 설마 하는 마음에 날짜를 물으니 수행원이 답했다.


“1979년 10월 1일입니다, 부장님.”


맙소사, 내가 10.26 사건 25일 전 김현규 부장에 빙의하다니. 아무래도 이번 생이든 저번 생이든 편하기는 글러 먹은 듯했다.


전생의 내 이름은 김규태, 어릴 적부터 그렇게 유복한 삶을 보내지는 못했다. 어릴 적, 우리 아버지는 쌍호자동차 현장직이었다. 2009년 쌍호자동차의 구조조정 발표 이후, 아버지는 노조 동지들과 함께 파업하다가 잡혀가셨다.


그 때 이후 나는 아버지 같은 억울한 사람이 더 나오지 않게 하려고,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가, 일찍부터 정당 생활을 했다. 물론, ‘다함께민주당’이나 ‘한누리당’ 같은 거대 정당들은 아니었고, ‘진보미래당’이라는 나름 진보정당 사이에서는 유명했지만, 중앙 정계에 들어가기엔 한참 모자란 당이었다. 그런 당을 고른 이유는, 그런 당들만이 내 아버지 같은 사람에게 관심을 주기 때문이었다.


이런 정당들의 특징이라 하면, 현장을 자주 나간다. 나도 항상 시간이 되는 한 현장으로 나가서 투쟁해왔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미래제철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에 나도 당의 일원이자, 전국노총의 일원으로서 참여했다. 원래 이런 현장이 그렇지만, 노동자들은 먹고사는 게 걸려있다 보니, 온 힘을 다해 투쟁한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게 경찰의 일이었다.


그 때도 마찬가지였다. 경찰이 물대포를 쏴대며 진압을 하자, 나는 사다리차에 올라가 경찰의 폴리스 라인을 넘으려 했다. 그러자, 경찰이 진압봉으로 머리를 후려쳤다. 내 머리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고, 의식은 점점 흐려져만 갔다. 당원 동지들은 모두 “규태야, 괜찮아?”라고 외치면서 내 곁으로 왔지만, 나는 그들의 말에 대답도 못하고 의식을 잃었다. 그렇게 나는 죽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남산 중앙정보부로 가는 차에서 김현규로 깨어났다. 만약 신이 있어서 나를 이리로 보냈다면, 다른 때도 아닌 10.26 사건 25일 전으로 보낸 것은 이유가 있겠지. 어쩌면 내게 18년의 독재를 스스로 끝내고 세상을 바꾸라는 특명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운이 좋았거나. 심경이 복잡하다. 사실 이런 일이 진짜로 가능할 거라는 것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왜 하필이면 김현규란 말인가?


김현규는 역사에서 패배자로 기록되었다. 10월 26일에 박준희 대통령과 차승철 경호실장을 쏴죽인 후 정성하 육군참모총장까지 데리고, 남산에만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는데, 그걸 육본으로 차를 틀어서 결국 체포되어 사형당하고, 나라는 전두한 보안사령관에게 넘어가는 결과를 맞이했다. 그런 역사의 패배자로 내가 부활한 이유는 무엇일까? 운명을 바꾸라고? 아니면 그대로 패배하라고? 머리가 너무 아파서 일단 집무실로 향했고, 다른 중정 요원들은 모두 내보내고 혼자서 쉬는 시간을 가졌다.


앉아서 쉬다 보니 김현규의 기억이 조금씩 들어왔다. 김현규의 기억이 모두 들어온 후 나는 뒤에 있던 금고를 열어보았다. 그러자 발터 PPK 권총 한 자루가 들어있었다. 그래, 이것으로 김현규가 박준희와 차승철을 쏴 죽였지. 발터 PPK를 손에 쥔 채로 생각했다.


‘25일 뒤에 박준희를 해치운다면, 그리고 남산으로 간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게 어쩌면 오만한 생각일 수 있으나, 나는 내가 전생에서 왜 당에 들어가고 노조에 들어갔는지를 다시금 생각하면, 김현규로 빙의했다는 건 내게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내가 김현규로 빙의해 거사를 무사히 치르고, 유신 헌법을 개헌하여 의원내각제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만든다면 내가 전생에서 살아왔던 목적은 이루는 셈이다.


권총을 다시 금고에 집어넣고 생각했다. 25일 동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일단, 26일에 있을 거사에 대비해 차승철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안된다. 보안이 샌다. 일단, 청와대로 가야 할 듯했다. 마침, 수행비서 박형준이 들어와 내게 말했다.


“부장님, 각하께서 부르십니다.”


“그래, 가자.”


청와대에 들어가자, 교과서에서나 봤던 인물들을 실제로 보았다. 한가운데 상석에 앉아있는 박준희, 그 왼쪽에 앉은 차승철, 정성하, 그리고 나를 위한 자리가 한 자리 비어있었다. 나는 대통령에게 묵례를 드리고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김영수 그 새끼를 어떻게 해야 할까?”


“각하, 그 새끼 그냥 제명해버려야 합니다. 저번 YH무역 사건 때도 그 새끼가 신민당 총재랍시고, 설치지 않았습니까.”


차승철, 역시 알려진 대로다. 박준희에게 아부하기 바빠서 말도 안 되는 강경책들만 떵떵 질러대는 그 성격, 여전하다. 나는 조용히 김현규답게 말했다.


“각하, 제가 김영수를 만나보겠습니다. 일단 제가 얘기를 해볼 테니, 제명은 나중에 결정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김 부장, 그 새끼랑 만나서 뭔 대화를 한다고 그래? 가만 보면, 김 부장 참 물러터졌어. 그러니까 사람들이 중정을 우습게 보고 그러는 거 아니야! CIA는 청와대를 도청했고, 김형돈 그 새끼는 미 청문회에서 각하 얼굴에 먹칠을 했어!”


“김 부장, 한 번 뜻대로 해봐.”


박준희가 놀랍게도 흔쾌히 허락했다. 그러자, 차승철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물러났다. 회의를 마친 뒤 상도동으로 향했다. 상도동, 김영수의 집이 있는 동네로 훗날 대한민국 정치의 성지가 될 곳 중 하나다. 상도동 가택에 직접 찾아가 초인종을 눌렀다. 그 후 김영수 총재는 나를 집안으로 데려갔다. 차를 내온 후 자리에 앉은 김영수는 내게 물었다.


“그래서, 김 부장님께서 나를 무슨 일로 찾아오셨을까요?”


“총재님, 뉴욕 타임즈에서 했던 인터뷰 때문에 여당에서는 총재님을 제명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김영수는 그게 딱히 놀랍지 않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사실 제명이 두려운 인간이었으면 그런 말조차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영수는 김대진, 김중필과 비교했을 때 한 성깔 하는 사람이었기에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다. 제명 얘기를 듣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래서요?”


“뉴욕 타임즈 기사에 난 것은 본래 말하고자 했던 바와 다르다고 해명을 해주시면, 제가 제명까지는 막아보겠습니다. 총재님도 원하는 뜻이 있으면, 어떻게든 의원직은 유지해야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이런 말을 하자 김영수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그럴 만도 하다. 유신 정권의 이인자, 박준희의 개, 중앙정보부장이 자신을 찾아와, 자신을 도와주려는 듯한 말을 하니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김영수는 단호히 말했다.


“됐습니다. 물론, 그 기사가 내 뜻이 와전된 부분이 있지만, 지금 그걸 해명하면 박준희 정권에 내가 굴복하는 게 됩니다. 제명할 거면 하라 하세요.”


역시 김영수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는 말을 남긴 그답게, 그는 차라리 목이 비틀리더라도 무릎 꿇지는 않겠다는 의지를 내게 보여줬다. 나는 그런 그에게 자그마한 힌트라도 남겨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한 마디를 남겼다.


“총재님, 앞으로 크게 세상이 바뀔 겁니다. 저는 어쩌면, 총재님의 결정이 좋은 결정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드네요.”


“갑자기요?”


“저는 이만.”


김영수는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직, 그가 이해하기엔 너무 이른 말이겠지. 하지만 25일만 기다려보라. 그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날 테니. 청와대로 돌아오자 박 대통령은 내게 대화가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다. 그러자 나는 김영수가 했던 말을 전했다.


“그 새끼는, 제명하라면 하라고 한 거네?”


“네, 각하.”


“그럼 정말로 제명해야지. 건방진 새끼!”


“저… 각하.”


박준희는 나를 쳐다보았다.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면 미리미리 이런 간언을 올려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박준희가 죽고, 내가 정계에 뛰어들었을 때 트집잡힐 일이 없다.


“야당 총재를 제명하는 건 여파가 클지도 모릅니다. 미국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고, 시민들도…”


내 말이 틀린 말이 아니긴 했다. 김영수가 제명된 이후 부산과 마산에서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으니까. 그렇지만, 아마 박준희는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이미 그는 늙고 타락한 독재자였으니까. 한반도를 가난에서 구한 영웅,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사실 그가 그전부터 타락한 독재자가 아니라고는 말을 못하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았다.


“김 부장, 김 부장은 미국 정보부장이야? 내가 그 새끼 하나 제명하는 게 뭐가 그렇게 큰일이라고. 김 부장은 김영수 만나가지고 무슨 얘기를 한 거야?”


나는 침묵을 지켰다. 솔직하게 김영수한테 세상이 뒤집어질 거라고 예고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가 봐.”


밖에서 대화를 엿듣고 있었는지 차승철이 내게 말을 걸었다.


“김 부장, 김 부장이 중정부장이 된 후, 중정이 너무 물러졌다는 얘기가 돌고 있어. 일 좀 똑바로 해.”


“차 실장님, 차 실장님이 저한테 하대할 입장은 아닐 텐데요.”


“뭐?”


“군인으로서도 내가 윗사람이고, 직책에서도 내가 윗사람입니다. 우리 기본적인 예의는 지킵시다.”


“이 새끼가…”


나는 할 말만 하고 그대로 나왔다. 아마 뒤에서 뭐라는 소리가 들린 걸로 보아 차승철이 내 욕이라도 하나 보다. 김영수 건은 해결되었고, 내게 남은 일은 김형돈일 것이다. 전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돈, 별명은 ‘날으는 돈가스’인 그는 박준희에게 팽 당한 뒤, 코리아게이트 청문회에서 대놓고 박준희의 부정과 비리를 고발한 어찌 보면 참으로 용기있는 자였다. 그리고 그런 배신자를 처리하는 더러운 일은 중정에서 맡을 수밖에 없었다.


김현규는 김형돈을 파리로 유인했다. 그 이후, 파리에서 김형돈은 실종된다. 이미 미래를 바꾸고 있는 나지만, 이번 사건만큼은 바꾸지 않으려고 한다. 김형돈 또한 썩고 부패한 건 마찬가지인데다, 잔혹하게 고문을 한 쓰레기가 맞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박준희에게 겉보기에 충성하는 것처럼 보이려면 김형돈은 제거해야만 했다. 김형돈을 어떻게 제거할지 생각하던 참에 박형준이 말했다.


“부장님, 파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 김형돈 도착했대?”


“네. 지금 파리에 도착했다 합니다.”


지금 당장에라도 김형돈을 족치라 명하고 싶지만, 김형돈도 워낙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쉽지는 않을 거다. 조금 방심을 시킨 뒤 그 틈을 노려야지.


“적당한 때에 잘 처리해.”


그리고 나는 차량의 뒷좌석에서 눈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