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쓴거긴 한데 혹시 괜찮다면 여기 한번 올려봄


오랜만에 다시 보니까 뭐가 부족했는지 이제 다시 알거 같넹


피드백은 해주면 언제든


환영임







황금가지, 짝사랑 님프.





달의 여신을 섬기는 한 신전에는 어떤 기묘한 풍습이 있다. 





신전에 있는 누구라도, 가히 비천한 노예라 할지라도, 떡갈나무에 황금처럼 빛나는 가지를 꺾으면 신전을 다스리는 사제왕을 죽일 기회를 준다는 이야기. 





만일 사제왕과 싸워 이긴다면, 그 자는 새로운 사제왕으로 추대되어 네미 숲에 있는 신전을 자신의 것으로 다스릴 수 있었다. ‘숲의 디아나’ 는 그러한 방식으로 후계를 계승하였으며, 이어졌다.





그랬기에 전통은 종종 신전에서 일하는 노예들 사이에서 떠돌았다. 저것만 따면 나를 내려다보는 이의 콧대를 꺾을 수 있다며, 혹은 신전에 있는 모든 여자를 모두 제 발밑에 둘 수 있노라며 달콤한 꿈을 꾸었다. 





걔중에는 직접 따려한 이들도 있었다. 





대부분은 비극을 면치 못했지만. 불을 쫓는 부나방처럼 그들은 하나둘 열정에 몸을 던져 사그라들어갔다. 





한 이는 황금가지를 꺾기위해 떡갈나무를 올라가다 떨어지고, 한 이는 사제왕에 칼에 찔려 천천히 죽어갔다. 우리 노예들은 참극을 계속해서 봐왔음에도, 황금가지를 잊지 못했다.





황금가지 전승은 우리 곁을 망령처럼 떠돌며, 달콤하면서도 신 포도같은 존재로 남았다. 신전에 평생을 종속된 노예에게, 유일한 구세주 였으니. 가시가 있는 꽃임을 알더라도 거부하지 못했다.





“아르고스.”





사제왕 티투스가 내 이름을 부른다.





하얗게 센 백발, 주름진 손가락. 누가본들 초췌한 노인의 모습이었지만. 그에게 쓰인 영광스런 월계수와 자연스레 꼬나쥔 하얀 단도가 ‘숲의 왕’ 임을 가리키고 있다.





아무리 그의 눈이 퀭하고, 눈가에 주름이 깊게 패였으며, 몸에 거무스름한 검버섯이 자리잡고 있다한들. 그는 신전 ‘숲의 디아나’ 를 다스리는 사제왕이었다.





“무슨일이십니까, 티투스님.”





거목에 기대어 앉은 티투스의 두 눈은 몽롱해 졸음기가 엿보였으나. 이상하게도 허멀거진 눈동자에는 총기가 깃들어 있었다. 





“어째서 가지를 꺾지 않느냐.” 





햇빛을 받아 금빛으로 비치는 가지. 티투스는 기대앉은 떡갈나무를 올려다본다. 고목 끝 가지에는 겨우살이 풀에 엮어 빛나는 황금가지가 있었다. 





“굳이 이유랄게 있습니까.”

“모두가 원하는 가지다. 심지어 나조차도 이자리에 앉기까지 그토록 기원했던 가지인데. 네 눈에는 미련조차 보이지 않는다.”





가을바람이 분다. 떡갈나무 이파리가 나부낀다.





“목숨이 아깝습니다. 그런데에 쓰기에는.”

“노예로 살던, 죽는 것과는 피차일반 아니던가. 나였다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황금가지를 꺾었을 걸세.”





“그래서, 지금은 즐거우십니까?”





물음을 들은 티투스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의 취향에 맞았던걸까. 티투스는 주름진 손으로 입가를 쓸어올리며 물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





고개를 끄덕이자, 잠이 가득해보였던 눈동자엔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엿같네. 죽고싶을만큼. 평생을 딱정벌레마냥 붙어살아야하는 운명이 달가울리 있는가?”





티투스는 일어난다. 몸은 노쇠했으나, 그를 지탱하고 있는 두 다리는 떡갈나무의 밑둥마냥 단단했다. 칼조차 흠집을 낼 뿐, 깊이 파고들수는 없을 것 처럼 보였다. 그가 기대어있는 오래된 나무처럼 묘한 생기가 뿌리를 타고 넘치는 듯 했다.





“네 생각도 그러겠지. 목 메인 왕이 될 바에야 차라리 자유로운 노예가 낫다는건가.”





***





“결심했어, 아르고스. 나 이번에야말로 도전할거야.”





니카노르는 벌떡 일어나면서 뜬금없는 말을 했다. 나는 니카노르가 실수로 친 항아리가 깨질뻔한 걸 가까스로 잡아내며 식은땀을 닦아냈다. 





하마터면 물을 뜨러가기전에 일을 그르칠 뻔 했으니. 





“후, 겨우 살았네… 그나저나, 무슨 소리야, 그거?”

“응? 그야 당연히, 황금 가지지.”





당당하게 말하는 니카노르.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노라 다짐하는듯 보였다. 





“그러면서 이번에도 도망칠거잖아. 맨날 그렇게 당해놓고서 또 하게?”





항상 말은 그럴듯했다. 말만. 처음 한두번은 그래도 혹시나하는 마음에 조마조마하며 지켜보기라도 했지. 횟수가 자그마치 몇댓번을 넘어가자, 이제는 그러려니하는 마음이다. 





“아, 아니거든! 이번에는 달라!”





니카노르가 황금가지를 꺾겠다고 말한지 벌써 여덟번째. 실상은 황금가지도 꺾으러 가지 못해, 숨어있다가 주변을 돌아다니던 처녀들에게 들켜 혼나기만 네댓번째였다. 





대체 뭐가 어느부분에서 다르다는걸까. 그건 오로지 본인만이 알 터였다. 





“뭐가 다른데.”

“글쎄, 굳이 말하자면 느낌이…?”





제 자신조차 확신하지못한 어투로 니카노르는 말한다. 





“됐고, 니카노르. 일이나 해. 저번처럼 가지 꺾겠다는 핑계로 일 땡땡이치려는 생각 말고.”

“아, 아니거든! 씨, 아르고스, 언제까지고 신전에 노예로만 살다가 죽을거야? 난, 그렇게 절대 못살아! 봐봐, 저 가지만 꺾고 늙은 사제왕만 어떻게든 하면 그 자리가 우리 자리라니까?”





“그 쉬운일 한번 해보자고 죽은 노예가 벌써 두자릿수야, 니카노르. 말처럼 일이 간단했으면, 벌써 왕이 수십번은 바뀌었겠지.”





사제왕 티투스가 아무리 늙어보인다한들, 그가 살아있다는게 증거였다. 티투스가 만일 몸으로나, 머리로나 다른 노예들에게 밀렸더라면 진작에 땅으로 모셔졌을 터였다. 





“멋대로 재단하지 마! 그런건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거든? 인간은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는 존재니까 말야!”

“그래, 그럴수야 있겠지만. 어쩌면, 어느정도는 운명이란 미리 정해져있는게 아닐까. 가끔씩 마주하는 불가역한 숙명이란 것도 있으니까.”

“잘봐. 아르고스. 이번에야말로 너가 틀렸다는 걸 알려줄테니까.”





니카노르는 머리에 이고있던 물항아리를 내려놓는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에 차츰 미래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야, 잠깐만. 니카노르.”

“말리지마, 아르고스. 나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해보고 말테니까.”





니카노르는 그 말을 남기고, 자리를 황급히 떴다. 





“아니, 너가 가버리면 물은 누가 길러… ”





결국, 오늘도 다시 가지 꺾겠다는 핑계로 도망쳐버렸구나. 아마도 저번처럼 니카노르는 황금가지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제 풀에 못이겨 다시 돌아오겠지만. 





***





숲 속에는 작은 호수가 있다. 알바 구릉에 자리잡은 그 작은 호수는 언제라도 잘 익은 곡식처럼 황금빛을 여물었기에 아름다웠다. 





네미 숲도, 이 호수의 이름인 ‘네미’ 를 따서 그리 붙여진 것이었으며, 특히 달의 여신은 이 호수를 기꺼워하여 종종 ‘디아나 여신의 거울’ 이라 부르기도 했다.





“아름답네… ”





네미 호수를 보며 넋을 읽는다. 선선한 바람이 볼을 살살 어루만지는데도, 호수는 주름 없이 잔잔했다. 





기분좋은 햇살을 받은 호수는 은은한 햇빛을 비춘다. 그 빛은 해를 머금은 이삭 마냥 과하지 안되 그것만으로 아름다운 빛이다.





“네미아.”





그리고 네미 호수에는 ‘네미아’ 라고 불리는 님프가 산다. 네미아는 내 부름 호수 밖으로 불쑥 고개를 들이내민다.





“오늘도 혼자야?”

“니카노르가 도망치는 바람에 그렇게 됐어.”

“응, 뭐. 잘됐네. 이렇게 귀여운 날 볼 수 있으니까 말야.”





네미아는 제 가슴을 퉁퉁 치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네미아는 맑은 물의 요정 에게리아의 뒷바라지를 하는 작은 요정. 네미 호수에 깃든 님프였다. 님프는 사람을 홀려 호수로 끌인다는 말처럼, 네미아 역시 아름다웠다. 





그저 물기에 젖은 갈색 머리칼을 보면 이끌리듯 눈이 갔고, 반들거리는 목덜미를 보면 피그말리온이 만든 석고상처럼 인간과 작품 사이의 경계를 오가듯 아름다웠다. 





“뭐래, 바보가.”





넋 놓고 보고있으면 차마 호수로 빠질 것 같았기에, 슬쩍 시선을 돌리는 것으로 어떻게든 무마했다. 그러지않았더라면 되려 허튼 말이 나왔을 터였다.





“우씨. 내 미색에도 안넘어오다니… 너같은 놈, 복수할테다!”





내 반응이 섭했던 모양인지 네미아는 화를 냈다. 화를 내는 건 좋지만, 네미아는 화를 낼 상대를 잘못 택했다. 





내가 네미아를 위해 얼마나 나 자신을 헌신했던가. 그걸 헤아려보자면, 네미아는 내게 화를 내서는 안됐다. 물개가 인간한테 무슨 말버릇인지 단단히 알려주마.





“그래, 그래. 마음대로 하셔. 그럼 무서우니까, 오늘의 이야기는 없는걸로?”

“으, 그건 아니고… 아, 아무튼. 비겁해, 아르고스.”





쪼잔하다고 생각이 들지만. 쫀심이 밥 먹여주던가? 현명한 인간은, 찬밥이든 더운밥이든 우위를 점하기위해 가리지 않는법이다.





“그래, 나 비겁하다, 왜. 그래서 얘기 듣기 싫어?”





이 근방의 숲은 디아나의 성역, 네미 호수는 순례자가 아닌 사람의 발길은 닿지 않았다. 모두가 디아나 여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걸 무서워해, 네미 호수는 되려 볼 일이 있지 않는한 찾지 않는 탓이었다. 그랬기에 심심한 네미아는, 항상 내게 이야기를 보채곤 했다. 





“그건 아냐! 내가 잘못했어, 아르고스!”





그때마다 나는 그리스에서 들었던 여러가지 이야기를 풀어주며, 네미아의 심심함을 달래주곤 했으니. 네미아 입장에서는 나를 잃는다면 유일한 낙이 사라지는 셈이다.





“뭐, 그래. 사과했으니까, 나도 어느정도는 인정을 베풀도록 하마.”





잠시 정도는 여유를 가져도 괜찮겠지. 





나는 머리에 이고있던 항아리를 옆에 내려놓고 다소곳이 앉았다. 사르르 가을꽃 냄새가 상쾌하게 코를 찔렀다. 차가운 이슬이 가슴팍을 간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얘기 듣고 싶은데?” 





네미아는 찬찬히 다가와 내가 앉아있는 뭍가에 머릴 기대었다. 은은하면서도 청초한 수련꽃 향기가 풍겼다.





네미아는 무슨 이야기를 들을지 진지하게 턱을 괴며 고민하다가 한가지를 떠올린다.





“아르고스! 이번에는 인간과 님프의 연애 이야기가 듣고 싶어!” 

“님프의 연애 이야기? 글쎄, 님프와 인간의 연애 이야기가 있었던가… 그런거 말고 다른건 없어?”





네미아는 원하는 이야기를 못들어서 그런지 얼굴을 반쯤 물에 잠근 채 볼을 부풀렸다. 보글보글 기포가 올라오는게, 아무래도 화난걸 보여주고 싶은가 본데. 그 모습이 딱히 화났다고 느껴지기는 커녕,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바보.”

“바보라니. 없는걸 어떡해.”

“그래도, 나 들었는데. 에코와 나르키소스의 이야기. 그런 얘기가 아예 없는것도 아니잖아.”





그러고보니, 굳이 생각해보면 그런 얘기가 있긴했다. 그것도 사랑 이야기라 봐야한다면, 네미아가 원하는 그런 달달한 얘기가 아닐 뿐이지.





“아, 그런 얘기가 있긴하네. 기억났어. 그런데 알고있으면서, 왜 들려달라 하는거야?”





네미아는 다시 얼굴을 드러내며, 말했다. 





“언니들한테 자세히는 못 들었는걸. 뭔지 궁금해. 그러니까 해줘, 아르고스.”





에코와 나르키소스 이야기. 안될 것도 없지만, 왠지 미래가 그려지는 느낌이었다. 네미아가 슬프다고 질질 짜는 미래가. 





그냥 해주지말까, 고민하다가. 해줄까하다가 내빼는건 그것대로 네미아가 삐질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알았어, 못들어도 다시는 안해줄거니까 잘들어.”

“응!”





네미아는 팔을 대고 뭍에 기대어 귀를 쫑긋 세웠다.





***





아테나에서 테베로 이어지는 험한 산맥.





그리스의 키타이론 산에는 님프가 여럿 살고있었다. 걔중에 에코는 키타이론 산에 수많은 산맥 중 하나를 다스리는 님프, 오레아데스였다. 





에코는 목소리가 고와 사람을 홀릴듯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고운 제 목소리 탓인지, 에코는 누구와 이야기 하길 좋아했다.





수다쟁이인 에코가 대화에 끼어들면 무슨 이야기든 누구 하나가 지칠때까지 이어졌고, 어떤 주제든 산으로 가니. 모두가 에코의 고운 목소리는 좋아했지만, 아무리 시간이 남는 님프라 하더라도 에코와 이야기를 나누는 건 곧 죽어도 싫어했다.





어느날, 키타이론 산맥에 여신 헤라가 내려온다. 여느때처럼 요정들과 바람을 피는 제우스를 찾아 바가지 긁기 위해 내려온 것이었는데. 때마침, 키타이론 산을 둘러보던 헤라는, 사랑을 나누는 제우스와 친구를 위해 망을 보고 있던 에코를 만났다. 





헤라가 에코에게 묻길.





“이 근방에서 제우스 신을 본 적이 있느냐?”, 라 하자.

“헤라님, 제가 주변에서 제우스 님을 못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북쪽으로 갔다가 동쪽으로 가신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서쪽으로 갔다가 남쪽으로 간 것 같기도 하네요.”, 라며 에코는 아리송한 말들로 답했다.





아리송한 말들로 헤라 여신의 정신을 빼놓은 탓에. 헤라는 제우스와 요정들을 놓치고 말았다. 이에 격분한 헤라는 에코에게 저주를 내리는데.





“너는 쓸모없는 말들만 하며, 아주 신을 농락하구나. 고운 목소리를 타고도 시덥잖은 얘기만 하니. 너에게는 두 입술도 아깝구나. 앞으로 네 입은 다른 사람의 말 끝을 따라할 것이며, 그 이외의 말은 어떻게든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에코에게 말 끝만을 따라할 수 있는 저주를 걸었다.





이듬해, 나르키소스가 열여섯이 되었다. 나르키소스는 한창기의 풋풋한 소년 같으면서도 늠름한 성인 같은 미청년의 모습으로 성장했는데. 





오비디우스가 이야기하기로, 나르키소스는 아름다운 외모로 여성을 여럿 홀렸음에도, 사냥에만 빠져있어 여자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더랬다.





그가 어느날, 키타이론 산으로 사슴 사냥을 하러 왔다. 키타이론 산에 사는 에코는 나르키소스를 보며 한 눈에 반하게 되는데. 에코는 자신이 먼저 말할 수 없으메, 남의 얘기를 따라하는 헤라의 저주 탓에 그를 멀찍이서 지켜보기만 할 뿐 말을 건네지도 못했다.





애달픈 에코. 나르키소스를 곁에서 지켜보던 에코는, 사냥 동료들이 나르키소스를 찾는 소리를 그저 조그맣게나마 따라할 수 밖에 없었는데. 





나르키소스가 ‘여기서 우리 만나자’ 하는 말에 에코도 겨우 ‘우리 만나자’ 라고 입을 떼어 나르키소스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기쁜 마음도 잠시, 나르키소스는 ‘만날 바에 차라리 죽는게 낫지.’ 하며 질색했고. 에코는 부끄러움에 못이겨 동굴로 숨어버렸다.





***





“에코가 동굴에 들어갔을때,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가 그녀를 찾아왔어. 자신의 마음을 거절한 나르키소스에게 복수하고 싶냐고 물었지. 에코는 고개를 저었어. 전혀 나르키소스에게 복수할 마음 따윈 없었거든.”





슬쩍 눈을 뜨자, 벌써부터 눈물이 글썽한 네미아의 눈동자가 들어온다. 이것때문에 이야기 안하려 했던건데.



 

“그저, 사랑하는 이 마음이 그대로 영원히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네메시스에게 말했지. 그 마음에 탄복한 네메시스는 유일하게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었고, 에코의 육신은 사그라들어도 에코의 목소리가 남아 매번 동굴에 말이 들려올 때마다 말을 따라한다고 해.” 

“흑… ”





네미아는 훌쩍,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냈다. 님프라 함은 원래 눈물이 많은건가. 아니면, 같은 님프라 동질감을 느끼는걸까. 네미아는 어느샌가 에코가 된 마냥 울고 있었다.





“그래서, 메아리를 그리스에서는 에코라고 부르는거야. ”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네미아의 눈은 너무 울어서인지 퉁퉁 불어버렸다. 흘러내리는 눈물 탓에 붉게 달아오른 눈시울을 부여잡고 끅끅 울음을 참으려 하는 네미아. 그런 노력은 다시 물거품이 되어, 펑펑 울음이 터진다. 





“너무 슬프잖아, 아르고스… ”

“그렇게 슬픈 얘긴가?”





비극적인 짝사랑 이야기긴 한데, 그래도 그렇지. 눈물까지 질질 짤 필요는 없잖냐. 





“바보 아르고스… 왜 이런 얘기를 해준거야… 흑… 너 때문에, 이제 더이상 동굴에도 들어갈 수 없을 거 같잖아… 어떡할거야, 책임져… ”

“아니, 너가 먼저 해달라며.”





나는 해달라길래 해줬을 뿐인데. 내 잘못인가…? 





“아무튼, 아르고스가 잘못한거야… 흐아앙… ”





어쩐지 님프를 울린 죄인이 된 것 마냥 비굴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바랬던건 이런게 아니었는데. 여자 마음이란 참 갈대같아서, 좀체 속을 짐작키 어려웠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뚝 그쳐, 네미아. 뭐든 해줄테니까, 일단 그쳐봐.”





네미아를 울린 이상, 네미 호수에서 물을 뜨는 것도 힘든 노릇이니. 네미아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쓸어 닦아주었다. 





“흑… ”





손가락이 닿자, 네미아는 거짓말처럼 울음을 그쳤다. 속물적인 녀석. 





“진짜 뭐든 해줄거야…? 저번처럼, 들어준다면서 안 들어줄거지…?”

“들어준다니까, 들어줘. 진짜 스틱스 강에 맹세코, 딱 한가지만 들어줄게.”





울먹이는 그 표정이, 들어주지 않으면 언제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아서. 나는 스틱스 강에 맹세하며, 네미아의 부탁을 한가지 들어주겠다고 말했다.





“스틱스… 강…?”

“그리스인들은 절대 무르지 않겠다는 중요한 약속을 할 때, 스틱스 강에 맹세하거든. ”





“정말…?”

“속고만 살았어? 진짜라니까. 글쎄.”





하는 수 없이 나는 아직 보지 못한 그 강에 기대어, 네미아와의 부탁을 무슨 일이 있더라도 들어주겠다며 약속했다. 기대감에 부풀어 활짝 미소짓는 그 얼굴을 보노라면, 쉬이 무르겠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럼, 아르고스에게 무슨 소원을 빌까… ”

“미리 말해두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들만 들어줄거야. 이상한 거 빌면 죽어도 안 들어줄테니까. 그런 줄 알아. ”

“그정돈 나도 알거든? 그러니까, 응… 정했어.”





진지하게 고민하는 네미아. 네미아는 물장구를 치며 맑은 하늘을 바라보다, 문득 빌고싶은 소원이 하나 생각났는지. 내 눈을 또렷이 바라본다.





“소원이 뭔데…?”





네미아의 입에서 무슨 괴상망측한 소원이 나올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진짜 무슨 바보같은 소원이라도 비는 거 아냐? 순수한 꽃밭이나 다름없는 네미아의 머릿속을 생각하자면 확답할 수도 없었다.





“나. “





이미 내뱉어버린 말은 주워담을 수 없는 법이라지만. 





“아르고스가 사는 곳에 가보고 싶어.”





조금 정도는 후회했다.





***





무더위 속 불을 밝히는 연제가 끝나고 나면, 신전 옆에 있는 작은 과수원에 있는 덩굴에는 포도송이가 하나 둘 맺히기 시작한다. 과수원의 햇포도는 하나같이 헬리오스의 빛을 받아, 어느 낱알 할 것 없이 달고 시원했다.





포도송이를 하나 움켜쥐고, 뜯어 나무로 엮은 소쿠리에 하나 둘 담다보면. 이슬 맺힌 송이가 탐스러워 한알씩 몰래 떼어먹기도 했다. 





신전 옆 과수원의 포도는 상큼한 신 맛은 없었더랬지만, 입 안을 감미롭게 달래줄만큼 감칠맛있는 단맛이었으니. 포도를 따던 노예들이 포도를 종종 탐하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니카노르, 제대로 따고 있는거 맞지?”





걔 중 니카노르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연하지, 아르고스. 포도를 먹는다니, 무슨 열댓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내가 그런짓을 하겠어?”

“그, 입가에 보라색으로 다 묻어있거든…? 니카노르?”





“아… 진짜?”





니카노르는 옷소매로 입을 슥슥 닫는다. 





니카노르가 들고있는 소쿠리에는, 누가보더라도 적은 양의 포도가 담겨있었다. 세어봐야 열댓개나 될까. 니카노르가 딴 것 중 반절 정도는 이미 니카노르의 뱃속에 들어갔을거다.





“얼마나 먹은거야.”

“아, 안 먹었다니까?”





니카노르는 통하지도 않을 변명을 하며, 열심히 포도를 따는 척 했다. 





“그러고보니까, 아르고스.”

“응?”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포도를 따던 와중, 니카노르가 나를 불렀다. 가까스로 한 소쿠리를 채운 니카노르는 과수원 한 켠에 모아두고, 다음 소쿠리를 가져왔다.





“표정이 꿍해보이는데 무슨 일 있어?”

“꿍해보인다니. 그런가…?”





얼굴을 매만져보지만, 포도에 맺힌 차가운 이슬만 낯짝으로 느껴질 뿐이다. 그렇게 표정이 이상해보인걸까. 하기야, 입술을 좀처럼 올려보아도 어색한 웃음만 지어질 뿐이니. 니카노르 말대로 표정이 꿍해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누가봐도 고민하는 표정이야.”





니카노르가 거들자, 그래보이는것 같기도 했다.





“고민이라… ”





분명 저번에 들어주겠다고한 네미아의 부탁 때문이겠지. 제딴에는 별 신경쓰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실은 무엇보다 걱정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다할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으니까… 





“혹시말야, 니카노르.”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아.





니카노르의 입에서 네미아를 몰래 신전 안으로 드나들 수 있게 하는 정답같은 게 나오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기껏 해봐야, 땅굴을 판다거나 같은 해결책 정도지 않을까.





“어떻게하면 신전 안팎을 몰래 드나들 수 있을까.”

“신전 안팎?”





니카노르한테서 괜찮은 답은 나왔던 적이 손에 꼽았으니까. 그럴싸한 답이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니카노르는 찰나의 고민도 필요없다는듯 답을 내놓았다.





“그냥 밤에 몰래 갔다가 오면 되잖아?”





역시나. 니카노르 입에서 답이 나올 턱이 없지. 





“역시 누가 신전에 하루 머물다 가는건 힘들겠지?”





네미아를 들여오는건 둘째치고, 어떻게 재우고 어떻게 지내게 할지도 문제였으니. 산넘어 산이었다. 나 혼자만으론 감당이 되지 않는다고 해야할까.





“근데 아르고스. 굳이, 몰래 드나들어야 하는거야…?”





니카노르는 포도알을 먹던 손을 멈추고, 진지하게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굳이라니. 그야, 대놓고 갈 수는… ”

“난 잘 모르겠지만. 순례자들은 신전을 마음대로 들락날락 거리잖아. 그러니까, 잠깐 나갔다가 오는거라면… 순례자인 척만 해도 되는거 아냐…?”





그런가? 어찌보면 니카노르의 말대로일지도 모른다. 순례자라고만 한다면 네미아도 드나들 수 있었으니까. 여성 순례자가 흔치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없지도 않으니.





“어때 아르고스. 답이 됐냐!”

“어? 어… ”





얼떨떨함에 얼굴을 쓸었다. 



 

“맞는말이야… 너말대로야.”





그리 골머리를 앓았던 답이 니카노르가 생각해낼만큼 간단하게 해결되리라는 걸 알고나자 맥이 빠졌지만. 어쨌거나 잘된 일이잖아. 





말마따나 네미아를 순례자 행세를 하게만 한다면 만사가 해결되는 문제였다.





***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네미아. 안에서는 절대 아는척 해선 안돼.”





네미아를 신전 안으로 데려가기 전에 신신당부를 해둔다. 네미아 입에서 언제 날벼락이 떨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미리 선을 그어놓아야 했다.





“으응… 근데. 굳이 그렇게 해야만 돼? 숨길것도 없잖아… ”

“처음 신전에 들른 순례자가 신전에만 있던 노예랑 아는 사이란게 이상하지 않을리 없지. 순례자에 대해 자세한 걸 묻는건 어불성설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의심을 사게되면 너는 물론이고 나까지도 신전에 있기 힘들어져.”





괜스레 불필요한 관심을 샀다간 발붙이기도 힘들어질테니까. 네미아의 정체가 밝혀지면, 네미아가 위험해질수도 있는 노릇일테고. 사리는 편이 좋았다. 





“알았어, 그럼… ”





네미아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같이 있질 못한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한 표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후회 안하겠어…?”

“응…? 뭐가?”

“나에 대해 무슨 생각을 갖고있던건지는 모르겠는데. 신전에 가면 네 환상이 깨질 수도 있어. 나, 그렇게 굉장한 사람이 아니니까. 오히려, 밑바닥이야. 신전 안에서는.”





가만 듣고있던 네미아는 웃으면서 고개를 젓는다.





“무슨 소리야. 내가 생각하는 아르고스는 항상 변하지 않는데.”





내 걱정은 기우라는듯 말하는 네미아. 사람좋은 미소를 짓는걸 보아하니 괜한 잡생각에 빠진게 아니었을까. 항상 어린애로만 비쳐졌던 네미아도, 가끔씩은 어른으로 보이기도 해서 이상야릇했다.



 

“그렇게라도 말해줘서 고맙네.”





네미 호수에서 조금 걷고나자, 산턱 너머로 디아나의 성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번 더 말을 맞춰보고는 신전 쪽을 향해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푸른 초목이 우거진 성소는 언뜻 보기에 그저 숲에 파묻힌 폐허같아 보이기도 했으나. 생기가 흐르고 있었다. 





성소에 붙어 자라고있는 덩쿨들은 저마다 질긴 생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나무에 붙어사는 겨우살이는 겉껍질이 단단해 끊어지지 않았다. 





성소의 이름이 ‘숲의 디아나’ 로 불리는 것도 영겁동안 이어진 변함없는 활기에서 기인된 것이리라.





“좋은 향기가 나. 네미 호수에 비할만큼.”

“향기?”

“응, 아르고스. 저기서 풍겨오는 것 같아.”





네미아는 성소 인근에 자란 드높은 떡갈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떡갈나무?”





신전이 가까워지자, 네미아는 목림에서 풍겨오는 새그러운 향을 맡았다. 어쩌면 네미아는 누구보다 민감하게 디아나의 발자취를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네미 호수가, 디아나 여신의 거울이라면 성소는 숲에서의 디아나를 상징했으니까. 





“냄새로 그런것도 알 수 있는거야…?”

“응? 뭔가 중요한거야?”





구태여 말하지 않더라도 단박에 알 수 있는 촉이란, 신기한 거였다.





“저 나무. 옛날부터 비르비우스가 사랑했던 나무로 알려져있어. 비르비우스는 신전의 첫 왕이자, 디아나 여신의 총애를 받는 남자였으니까. 관련이 없는것도 아니지.”





네미아와 이야기를 하며 걷다보니, 어느샌가 신전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호흡을 가다듬고, 우리는 신전의 안으로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다왔어. 이제 일러준대로. 알지?”





네미아는 고개를 끄덕인다. 









신전의 안으로 들어서자. 웅장한 떡갈나무가 우릴 반긴다. 떡갈나무에 기대어 누워있던 티투스는 무거운 눈꺼풀을 슬며시 떠 살폈다. 





“아르고스. 옆은 누구냐.”





우리는 신전에 들어오기전 입을 맞춘대로 말한다. 티투스의 눈은 마딱찮은듯 우리를 보고있었으나. 신전에 있어 순례자를 거부할 타당한 이유는 없었기에, 티투스는 눈을 감으며 네미아가 머무르는 걸 허락을 했다.





“여성 순례자가 온 게 언제인지도 가물가물하다. 순례자들이 쓰는 숙소를 안내하기에도 문제겠지. 아르고스, 순례자를 베스타의 처녀들에게 데려가라.”

“알겠습니다.”





고개를 조아렸다. 





티투스는 여성 순례자에 대해 미심쩍은 얼굴이었지만, 이내 나무에 기대어 쪽잠에 들어갔다. 이정도면 됐겠지.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자, 네미아.”





네미아의 손을 잡아 끌었다. 





“아르고스, 방금 그 사람 누구였어…?”

“신전을 다스리는 사제왕. 여기서 가장 높은 사람이야.”





네미아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구나. 뭔가 꿰뚫어보는듯한 눈빛이었어… 뭔가, 다 들킨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숨이 막히는 느낌이였어. 아르고스는 항상 저런 사람이랑 얘기하는거야…?”

“살아온만큼 길게 봐왔지.”





아무리 길게 봐왔다한들, 티투스에게서 전해지는 압박감을 감당하기 어려운건 매한가지지만 말이다. 네미아는 사람을 봐온 경험이 거의 전무했던 탓인지, 후들거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부여잡고 있었다. 





“굉장해, 아르고스… 저런 사람이랑 마주보고 이야기할 수 있다니… ”





이상한데서 경외감을 갖는거 아냐…?





할말은 많았지만, 어느샌가 성소 앞에 다다라 네미아와 나누던 소담은 그쳤다. 





원형으로 둘러싼 계단 모양의 단구 중심에는 성소가 자리잡고 있다. 성소에는 베스타 여신의 영원히 꺼지지않는 불이 타오르고 있었으며. 그 불은 신전에 있는 여사제들에 의해 다뤄지고 있었다.  





“거기, 누구십니까.”





인기척이 들렸는지, 성소 안에서 여사제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성소 안에서 또각또각 대리석 바닥에 울려 나는 발소리가 들린다. 다소 강압적인 목소리에 우리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또 니카노르 입니까?”





한숨을 내쉬며 성소에서 나오는 한 사제. 





“앗… ”





우리를 살핀 여사제는 예상치 못했다는듯 얼굴을 붉혔다.





***





“실례했습니다. 도통 저희 성소에는 사람이 오는 일이 적다보니. 순례자분께는 무례를 범했습니다…”

“괘, 괜찮아요… 그게, 갑자기 온 제 탓도 있고… ”





네미아는 도저히 그 충격을 잊을 수 없는 모양인지, 여전히 어깨는 움츠려든 모습이었으며. 소리를 지른 사제는 네미아의 긴장을 풀어주기위해 어떻게든 발품을 팔고 있었다.





“손님, 그게 아니라… 어, 어떡해요, 사제님… ”

“어떡하긴 어떡합니까. 다 뿌린대로 거두는거지요. 그리고 그 몫은 스스로가 감당하는 것입니다.”





화로를 지키던 여섯 사제 중 연장자가 앞서 말했다. 서른살 남짓 되어보이는 그녀는 다그치며 타오르는 불에 장작을 넣었다. 





“하, 하지만… ”





젊은 사제는 반박해보려 하지만.





“응당 신을 섬기는 사제로서 지켜야할 덕목입니다, 아니아 사제.”





이내 고개를 숙이고 우리에게 사과했다.





“그, 결례를 범했습니다.”





눈물까지 흘리는 아니아 사제를 보고 우리는 무어라 해야할지 말문이 턱 막혔다. 그 광경을 보고있는 네미아의 얼굴은 시시각각 사색이 되어가고있으며, 나또한 엄한 가르침에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아르고스, 옆은 누구시고. 무슨 일로 오신겁니까.”





그 누구도 입도 벙긋 못할 그 상황에서, 처음으로 입을 뗀 건 선임 사제였다.





“아, 그게… 오늘 온 순례자신데. 오늘 하루 머무를 곳이 필요하다 하셔서… ”

“그렇습니까? 하기야, 티투스님 명이시겠군요. 알겠습니다. 저희가 머무르는 곳이 있으니, 그곳에 자리를 마련해두도록 하겠습니다. 소개해드릴테니, 따라오시겠습니까.”





선임 사제가 그렇게 말하자. 네미아는 지옥으로 끌려가는듯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흘깃 본다. 난들 어떡하리. 





슬며시 네미아의 등을 떠밀자, 네미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그렇게도 무서운건가. 사제의 손에 붙잡혀 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네미아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나왔다.









네미아를 보내고, 신전의 초목을 정리하고 있자. 





“아, 아르고스 살려줘!”





이내, 도망치듯 네미아가 튀어나왔다. 





“컥… ”





네미아는 관성을 못이겨 그대로 툭 전력으로 가슴팍에 머리를 부딪혔다. 명치에 정통으로 맞아서인지, 찔끔하고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숨도 쉬어지지 않아서 이러다가 진짜 죽는게 아닌가 싶었다.





“아프잖아, 네미아. 갑자기 뭔데…?”





숨을 가다듬고 일어서자, 네미아는 내 품에 그대로 매미마냥 찰싹 붙어있었다. 





“아르고스… 무서워, 살려줘. 숨막혀 죽을뻔 했어.”

“숨 막혀 죽을뻔한건 나거든…? 알았으니까, 일단 진정하고 떨어져봐.”





명치를 살살 매만지며 네미아를 떼어놓자.





“농담아니야! 진짜 무섭다구… 아니아 사제님이 다섯명한테 조리돌림 당하고, 막…  ”





네미아는 이리저리 몸부림치며 성소의 안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사제들이 머무르는 곳은 금남(禁男)의 구역이니 들어가본적은 없지만, 네미아의 몸짓을 보아하면 구태여 보지않아도 이해가 됐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진정해봐.”





등을 툭툭 두드리자, 훌쩍이던 네미아의 어깨가 그제서야 가라앉았다. 드디어 진정한걸까. 네미아를 다스리고 한숨 돌릴 즈음.





“그아아악!”





괴상한 굉음을 내는 니카노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못했어요! 잘못했다니까요!”  

“그만 좀! 오시라고! 했잖아요! 니카노르! 당신때문에! 진짜!”





뒤에서 들려오는 아니아 사제의 호령.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고성에 움찔 몸이 멈췄다. 수풀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밖을 살펴보자.





“살려줘! 아르고스! 베스타의 처녀님이 날 죽이려 한다고!”





니카노르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니카노르와 아니아 사제의 쫓고쫓기는 추격전. 아니아 사제는 성화를 다루던 부지깽이를 살벌하게 휘휘 휘두르며 니카노르를 죽일듯 좇고 있었다. 





“바, 바보야! 여기로 오지마! 죽을거면 너만 죽으라고!”





우연찮게 눈이 마주친 니카노르는 그대로 매섭게 내게 달려드는 폼새였으니. 





“무, 무슨일인데…? 아르고스?”





슬쩍 고개를 내미려던 네미아의 얼굴을 다시 수풀 속으로 쑤욱 집어넣고는.





“네미아! 뛰어!”

“가, 갑자기?”

“잔말말고!”





니카노르를 따돌리기 위해 목 높이까지 자란 초목 사이를 뛰기 시작했다.

나와 네미아를 따라오는 니카노르. 그 뒤를 쫓는 아니아 사제. 





갑자기 무슨 날벼락인지.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니카노르에게는 더욱이 네미아와 아는 사이임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더욱이 필사적으로 달렸다.





“아르고스, 멈춰!”

“따라오지 말랬잖아!”





숨이 가빠졌다. 





대체 얼마나 따라올 셈인지. 니카노르는 여전히 우리 뒤를 쫓고 있었다. 속도가 줄어들 쯤 됐는데도 녀석은 지치지도 않는지, 매서운 속도로 달리고 있다.





“아, 아르고스 너무 빨라…!”





설상가상으로 네미아가 뒤쳐지기 시작하자.





“안되겠다, 업혀.”

“우왓, 잠깐만… 아, 아르고스…”





네미아를 업어서라도 가는 수 밖에 없었다. 





“너, 무거운데… ”





아무리 님프라 해도 무게에는 예외가 없었는지. 무슨 장작더미 옮기듯 무거웠다.





“무, 무슨 소리야!”





네미아는 무슨 못들을 말이라도 했다는 듯, 등을 툭툭 쳐댄다. 그렇다한들 발을 멈출 수는 없었으니, 젖먹던 힘까지 짜내 다리에 박차를 가한다. 입 안에서 쇳내가 나기 시작한다. 머리는 물이 차오른듯 띵하다.





아무래도 니카노르, 체력만큼은 당해낼 사람이 없다. 니카노르가 지쳐서 포기하게 하기엔, 네미아까지 업은 상태론 니카노르의 체력을 감당할 수 없고.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할 터.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후후 내뱉으며, 주위를 둘러본다.





“아, 아르고스! 저기, 저쪽에 숨으면…!”





네미아가 손으로 가리킨 곳을 바라본다. 네미아가 가리킨 건 두렁 아래에 있는 작은 과수원. 아직 포도를 마저 다 따지 않은 탓에, 덩굴이 주렁진 포도나무밭 이었다. 





저기라면 누구도 찾지 못할 테니까. 그대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밭두렁으로 뛰어들어갔다.





“아아악! 아르고스, 어딨어! 나 좀 살려달라니까! 아니아 사제님, 말로 풀어요!”

“말로 풀긴 뭘 풀어요! 당신이 그런 말할 자격이나 있긴 해요?”





매서운 매타작 소리가 들린다. 허공을 가르는 부지깽이 소리만 들려도 이제는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스쳐도 뼈 하나는 부러질 것만 같았으나. 니카노르에게는 미안하지만. 부디 살아는 남길 바라는 바였다. 





“가, 간거야…?”

“쉿.”





점차, 니카노르와 아니아 사제의 발걸음이 멀어진다. 두렁 옆에 붙어있듯 누운 우리 둘은, 완전히 인기척이 사라지고 나서야 제대로 숨통을 틀 수 있었다. 





“이제 갔나…?”





살며시 고개를 든다. 멀찍이 뛰고 있는 니카노르와 아니아 사제가 보인다. 그제서야 완전히 따돌렸다고 실감했다.





“가, 간거 맞지…?”

“갔어.”

“아, 아르고스. 그럼… 이거 놔줘… ”





니카노르에게 도망치면서, 두렁에 굴러떨어진 탓에 어느샌가 내 팔은 네미아를 포개어 감싸고 있었다. 그런 압박감 탓에 숨쉬기가 어려웠던 건지, 네미아의 볼은 발그레 홍조를 띄었다. 힘껏 안고있었던 팔을 풀자. 





“바보… ”





네미아는 옷에 묻은 흙먼지를 탈탈 털어내며 일어났다. 





“뭐가?”, 라고 물었지만. 네미아는 그저 얼굴을 붉히고는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포도송이 나무 아래에 네미아는 멀뚱히 서있다. 





“슬슬 가자, 네미아. 이제 그 사람들은 모두 멀리 갔으니까.”





그 둘도 이제는 멀찌감치 사라져 돌아올 기미조차 없었다. 뭐, 니카노르가 계속 쫓기고 있거나, 아니면 두드려맞거나 둘 중 하나일테니. 돌아온다 하더라도 한참 뒤일 게 뻔했다.





“아, 아르고스. 잠깐만… ”





가려던 차에 네미아가 불러세웠다. 뒤를 돌아보자.





“조, 조금만 쉬었다가자. 조금만 더… ”





네미아는 옷자락을 쥐었다폈다. 당분간은 돌아오지도 않을테니, 상관은 없지만. 이상하게도 네미아의 볼은 계속 불켜진 채였다. 





“왜, 왜 그래, 아르고스…? 뭐 묻었어…?”





네미아가 수줍은 표정을 지은 것처럼 보였던 건. 내 착각이었을까. 





네미아의 옆모습이, 당황하는 표정조차. 어쩐지 한가을 음유시인들이 그토록 연주하던 포도의 달콤함을 이해할듯. 살이 파르르 떨린다. 좀처럼 두근거림은 지워지지 않는다.





이제는 무덤덤한 줄 알았는데. 가슴 한켠이 시큰했다. 힐끗 네미아를 볼 때마다 좀체 잊히지 않는다. 이건 무슨 감정일까. 포도나무 아래에 서있는 네미아를 보자면 말문이 막혀 말을 이어나가지 못할 것만 같았다. 





***





부끄러워.





볼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아무말도 할 수 없어. 두근대서, 가슴이 미칠도록 두근대서. 입을 떼기 힘들었다. 





호수에만 있을때는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두근거림에, 머리까지 전해와 펑 터져버릴 것 같아.





“바보… ”





느껴본적 없을만큼, 심장이 뛰어서. 혹시 들린게 아닐까. 가슴을 조아렸다. 들렸을까 생각하면, 도무지 어딘가에 머리를 콕 박고 숨고 싶을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한다는 거, 알아차렸을까. 알아차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모르면 좋을텐데. 그런 생각이 머릴 맴돌았다.





으… 





도저히 얼굴을 볼 수 없어… 심장박동이 빨리 뛰는 것 같아. 이러다가 진짜, 아르고스한테도 들릴지도 몰라… 고개를 푹 숙였다.





“뭐가?”





아르고스가 묻는다.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만큼 넉넉찮은 상황이 아닌걸. 아르고스가 날 꼭 붙들어 앉았을때부터 맞잡은 곳이 여름 햇살마냥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아… 





시간이 갈수록 식는게 아니라, 머리까지 올라와. 부리나케 식히느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래서 언니들이 사랑에 빠진 사람을 바보라고 하는걸까. 꿀먹은 벙어리가 된 나는 그 말에 조금정도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슬슬 가자, 네미아. 이제 그 사람들은 모두 멀리 갔으니까.”





아르고스가 말한다. 





“아, 아르고스. 잠깐만… ”





나, 나 무슨 말을 한거야…? 머리가 따라가지 않는다. 방금전까진 떨어지지도 않던 입이 왜 이럴때만 성급한거야. 아르고스가 보고있어.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눈을 꾹 감고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힘겹게 꺼냈다. 





“조, 조금만 쉬었다가자. 조금만 더… ”





나의 목소리. 





목소리가 울려. 아르고스에게 닿는다. 사랑해, 라고 전하고 싶었는데. 좀처럼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저, 여기서 더이상 헤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여기에 있자고. 말한다.





말이 터져나오고나니. 아르고스의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무슨 반응일지 보기에는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감행할 수 없었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뜨거운 한숨이 목까지 턱턱 올라왔다. 





정말, 어디론가 숨고 싶어져. 어딘가에 땅굴이라도 없는걸까… 





옷자락을 와락 쥔다. 아무렇지 않은듯 있으려해봐도. 누가보더라도 뻣뻣한 동작, 부자연스러운 표정. 내가 봐도 이런데, 남이 봐도 아무렇지 않게 보이진 않겠지…?





“왜, 왜 그래, 아르고스…? 뭐 묻었어…?”





그으으으… 





모두 다, 아르고스 때문이야. 아무튼 모든게 다… 





아르고스가 다가온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천천히 가까워진다. 그럴수록 심장은 파르르 떨린다. 쿵쿵 맥박이 무겁게 뛴다. 이건 내 소리일까, 아니면… 



모르겠어. 





눈을 질끈 감는다. 후후, 심호흡을 아무리 해봐도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툭.





눈을 뜨자. 옆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툭, 하고. 고개를 돌려보자. 





“아, 아르고스…?”





아르고스는 포도나무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달콤한 향이 코를 간질인다. 포도 향기일까. 난생 처음 맡아보는 풍부한 향기에 홀리는듯 하면서도, 살떨려 꿀꺽 침만 삼킨다. 





아르고스와의 거리는 한뼘 조차 되지 않는데. 그 거리가 절대 닿지 않을 것만같이 멀어보였다.





“잠깐 쉬자메. 안 앉을거야?”

“그으, 나, 난 괜찮아…!”





“뭔가, 오늘따라 이상해보이는데. 괜찮은거 맞지? 평소에는 눈도 잘 마주치면서, 오늘은 눈도 못마주치고.”

“그, 그게… ”





긴장되서 도저히 눈을 마주칠 수 없다고 말할수는 없잖아… 바보 아르고스… 이런 사람인데도 어째서 난 두근거리게 되는거야… 





이젠 더이상 모르겠어. 으으, 아르고스의 시선은 견디기 힘들어서, 두 눈은 둘 곳을 잃고 이곳저곳을 맴돈다.





뭐라도 생각해야돼. 뭐라도 변명을 찾아야돼.  





“그, 그러니까, 그게… 도, 도무지 신경쓰여서… ”





벌벌 떨리는 손마디로 가리킨다.





“옷?”





나도 이제 모르겠어. 아무거나 걸려라는 식으로, 눈을 질끈감고 아무거나 되는대로 가리켰다.





“찢어졌네. 아까 뛰다가 가지에 걸린 모양인데…? 이게 아까부터 계속 신경쓰였던거야?”

“마, 맞아… 꿰메줄려고… ”



이러려던게 아니었는데… 





***





어쩌다 이렇게 된걸까.





“움직이지마, 아르고스. 바늘 꼽기 힘들어지잖아… ”

“그러냐…?”





왠지 집중하는 네미아. 





방금전까지는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으면서, 떨었던 모습은 어디갔는냥 반짇고리에서 신중하게 실을 고르고 있었다. 





“네미아, 반짇고리는 항상 들고다니는 거야?”

“으응? 바, 반짇고리?”





네미아는 움찔 몸을 떨었다. 갑자기 물어본 것도 아니고, 무례한 질문도 아닐텐데. 다시금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물어보지 말 걸 그랬나?”

“아냐… 그게 아니라. 반짇고리 말이지…?”





네미아는 반짇고리를 손에 들어 가리키며 물었다. 네미아가 들고있는 반짇고리. 고급스런 나무곽에는 실과 바늘, 붉은 자수가 수놓아진 검은 쪽가위가 있었다. 





누가보더라도 고급품. 달리 만지기도 미안해지는 것들 뿐이다.





“이거는 내가 태어났을때, 받은 선물이야. 파르카이 여신님 중 모르타 님이 오셔서 주고 가셨어. 언젠가 쓸 일이 있을거라고.”





그래서 고급품이었을까. 네미아는 반짇고리를 가슴 속으로 깊이 안는다. 신에게서 받은 선물이라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보물 같은 것이리라. 그렇다면 아낄만도 할텐데. 





다시금 반짇고리를 열어 실을 깃는 네미아를 보자면, 어린아이에게서 유리구슬을 빼앗은 느낌이라 그리 편치는 않았다. 그래도 쓰라고 있는거니까.





운명을 잣는 여신이 준 것이니. 이런 때를 비롯해 요긴하게 쓰라고 있는거겠지. 더는 복잡한 생각을 지우기로 했다.





“지금부터 움직이지 마. 알겠지?”





눈을 부릅뜨며 바늘을 쥔 손을 움직인다. 찢어진 부분을 바늘 끝으로 쿡 눌러 천천히 틈새를 좁혀나간다. 매듭과 매듭 사이는 촘촘하고 일정한 간격으로 나아간다. 어디하나 꼬이는데 없이 물 흐르듯 꿰맨다.





“잘하네… ”

“아폴로 신전에 맡겨졌을때, 많이 배웠거든. 봐봐, 어때? 잘 꿰맸지?”





매듭까지 흠잡을 데 없다. 네미아는 그 말에 힘입어 평소의 네미아처럼 등을 꼿꼿이피며 제가 손질한 옷자락을 자랑했다. 눈을 뜨고 잘 보지 않으면, 꿰맸는지조차 모를 정도여서 이번만큼은 한 수 접고 인정하기로 했다.





“어. 내가 본 것 중에서 제일 잘 꿰맸어.”

“흠흠, 내가 이정도란 말씀. 어때? 괜찮지! 이번엔… 아르고스, 옷도 심심해보이는데 자수도 해줄까?”

“잠깐만, 자수는 보이잖아…”

“안보이는데면 괜찮아! 아르고스는, 특별히 제대로 한땀한땀 만들어줄테니까.”





그런 얄랑한 칭찬에 네미아는 불이 붙었는지. 이번에는 자수를 보여준다며 설레발을 치는 바람에, 그날 내 옷자락에는 알록달록한 꽃과 나무, 그리고 우리가 만났던 네미 호수가 수놓아졌다.






다음화 


황금가지, 짝사랑 님프 -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