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르고스! 아르고스!”

“깜짝이야. 또, 뭔데? 니카노르.”





하마터면 밟고있던 포도에 미끄러져 넘어질 뻔 했다. 안그래도 다음 연제에 쓰일 포도인데. 자칫 넘어져 포도를 버리게 됐으면, 감당 못했을거다. 





넘어지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수명을 십년 감수한 것 같아 가슴을 쓸어내렸다.





“큰일이야! 큰일!”





누구때문에, 누가 더 큰일날 뻔 했는데. 그래도 뭐. 니카노르가 진작에 알아들었다면, 이상한 황금가지에 꽃힐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니카노르의 뇌의 한계이리라.





“방금, 델포이를 들리고 온 순례자가 왔는데… ”





니카노르는 벅차오른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리 급할 것 없다는 요량으로 진정하라고 니카노르에게 말했지만, 니카노르는 이미 제 흥분에 차 숨을 완전히 고르기도 전에 입을 열기 시작했다.





“곧 숲의 왕이 바뀔거래…!”

“그러냐? 그래서.”





“이씨, 넌 무슨 관심도 없냐… 후. 아무튼, 피티아 여사제가 전하길, 올해 가을이 지나가기 전에 황금가지가 꺾인다고 했어. 그러니까, 지금이 기회라고. 아르고스, 운명을 바꿀 시기는 지금 밖에 없어.”

“몇번이고 말했지. 난 관심없다니까.”





다시 발을 걷고, 포도를 밟기 시작한다. 물겅물겅한 포도 알갱이가 발바닥에 지날때마다, 차가우면서도 통통 구르는 묘한 감각을 느낀다.





“그리고, 운명은 안 바뀌어.”

“너는 낭만도 없냐…?” 

“낭만도 없다. 왜? 낭만이 밥 먹여주냐?”





니카노르는 재미없다는 투로 혀를 끌어찼다. 그래도 사람이 낭만만 가지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지극히 당연한 소리였다. 





“그래서, 그거 하나 말하려고 온거야?”

“응.”





니카노르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일은 내팽겨쳐놓고 농땡이를 부리는 녀석을 대체 뭐라 해야할까. 겨우 신탁이 왔다는 얘기 하나에 팔려서, 여기까지 달려왔다는 게. 어찌보면 니카노르다웠다.





“말을 말자… 그래, 언젠가 포기할거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지… ”

“후후, 노력은 인간을 배신하지 않는다… 이만큼 노력했으면 한번쯤 내게도 결정적인 기회가 떨어지는게 수지타산이 맞지 않겠어?”

“수지타산이고 자시고. 애초에 불가능한 거잖아.”





“올해 가을이 지나기전, 황금가지가 꺾인다. 가지를 꺾는 이는 두명이오. 한 명은 디아나 곁에 있을테며, 한 명은 케레스의 손에 거둬질테니. 거울에 비친 이가 그리 되리다…”





니카노르는 목을 가다듬고 거창한 목소리로 예언을 읊었다. 구태여 신탁을 읊는 것도 아폴로 신전에서 하듯 웅장하게 해야하는걸까. 어이가 없다 못해 날아가는 듯 했다.





“너, 맛들렸구나. 차라리 사제왕 보다는 피티아 여사제가 더 어울릴 거 같은데.”

“참나, 뭔소리냐. 나는 누구보다 사제왕이 어울리는 몸인데!”

“그래, 뭐. 그렇겠지.”





니카노르는 가슴을 퉁치며 말한다.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사제왕이 되겠다고 포부를 밝히는듯, 자못 당당한 풍채로 등을 꼿꼿이 폈다. 





제법 풍기는 분위기론, 막 즉위한 왕과 같은 느낌이었긴 했지만. 이전까지 봐온 니카노르의 모습 탓인지, 전혀 왕이 될 재목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무튼, 아르고스. 신탁대로라면 두 명이 황금가지를 꺾으면 왕이 된다는거잖아. 그렇다면 우리도 힘을 합친다면 가능성 있는거 아니냐?”

“신탁대로라면 맞는 말이긴 한데… ”





니카노르는 눈을 반짝인다. 니카노르 말대로라면 이번 사제왕은 두 명이 된다는 거겠지만… 영 신탁이란게 미심쩍기 그지없어서 어딘지 모르게 탐탁치 않았다. 





애시당초 사제왕이 두 명이 된 사례는 한번도 들어본 적도 없으니까. 하다못해 이 나라나 주변국에서도, 심지어 여느 신전에서조차도 다스리는 왕이 두 명이란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까, 나 이번달이 끝나가는 밤에 가지를 꺾을거야. 아르고스, 너도 같이 하자. 만약 너가 도와주기만 한다면, 사제왕이 되어서 거하게 한자리를 양보할테니까.”

“그건 꿈깨. 난 죽어도 안 할거니까.”

“그럼그럼, 당연히 그래… 아니, 어째서…?”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신탁이 뭐라한들, 신탁의 주인공이 우리란 법은 없지 않은가. 





“어째서라니. 그야 예전부터 말했잖아. 나는 그런 자리 필요없다고. 그리고 신탁도. 도저히 믿기지 않아. 믿을 수 있는 구석이 전혀 없단 말이지.”

“도대체 뭐가!”





예언을 전해준다는 아폴로 신전의 피티아는 시처럼 아리송한 예언으로 유명할텐데. 델포이 신탁을 아무런 해석 없이 그대로 믿는다면 눈을 뜨고도 알지못해 코를 베이는 격일터다.





“원래 신탁은 수수께끼야, 니카노르.”





물론 니카노르는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듯 하지만.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니카노르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다. 도대체 그것이 무슨 말인양 묻는 듯 말이다. 하는 수 없어, 나는 덧붙여 말했다.





“그러니까, 너가 들은 델포이 신탁이 비유적인 표현일수도 있다는 거야. 가지를 꺾는 이가 두 명이라는 말은 넘어간다쳐도, 나머지 부분은 어느 하나도 설명되는게 없으니까 말야. ”

“아… 너 똑똑하구나, 아르고스.”

“보통 신탁이라고하면 먼저 해석부터 하려고들 하지 않아…?”

“그런가?”





머리를 긁적이는 니카노르. 진짜 몰랐던걸까. 여러모로 이 편이 니카노르 답다고는 생각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신탁을 곧이곧대로 믿는 놈이 있을줄은. 혹시 이 녀석 일부러 멍청한 척 하는건가…? 





“흐음… 아르고스, 도저히 생각이 안나서 그러는데. 그럼 이 신탁을 어떻게 해석하라는거야?”

“어떻게라니… 글쎄다… ”





예언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니까. 어떤식으로 해석을 하든 사람이 마음 먹기에 달렸다. 그러니 해석해봤자, 힘만 뺄 뿐이겠지만. 





구태여 해석해보라고야 한다면야…  





“나보고 해보라면, 아무래도.” 





황금가지는 하나뿐이니 둘이서 꺾을 수 없다. 더군다나, 꺾는다한들 필시 둘 중 하나는 왕위를 포기해야한다. 아무래도 모순이었다. 그렇다면, 신탁에서 나오는 두 명은 실은 한 사람이 아닐까? 두가지 면모를 가진 동일인물이라면.





그런 가정 하라면, 거울에 비친 이가 그리 되리라는 구절도 설명이 될 터였다. 





“오, 뭔가 그럴듯해… 그래서…?”

“그래서라니. 한 단면은 달의 여신인 디아나와 관련되어 있겠고, 다른 낱면은 곡물의 여신인 케레스와 관련된거겠지. 그 이상은 나도 몰라.”





니카노르는 고민에 빠져 턱을 괴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내 자의적인 생각이니까, 내 해석이 정답은 아닐텐데. 





또 곧이곧대로 믿는게 아닌가 싶다. 괜히 자기멋대로 확신에 빠져 공만 치지 않으면 좋을텐데.  





니카노르는 잠시간 짧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뭔가 감이 잡힐 것 같아… 고맙다 아르고스.”





니카노르는 턱을 받치던 손을 풀고 일어섰다. 괜찮은걸까, 니카노르. 





괜히 휘둘려서 무모한 일을 벌여놓고는 수습하지도 못하는게 아닐까 싶었다. 니카노르는 이상한 객기에 하루가 멀다하고 목숨을 버리는 놈이니까. 좀처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





으깨둔 포도들은 모두 모아 항아리에 붓고 서늘한 동굴로 옮긴다. 





포도주를 만드는 과정은 간단하다. 





으깨고 항아리에 담은 뒤, 매번 뒤섞어주고, 후에는 껍질을 비롯한 부유물을 걸러 술단지에 옮기면 남는 일은. 다음 해 무더운 연제 전까지, 포도주를 선선한 동굴에서 숙성하는 것 뿐이다. 





포도주를 담그는 게 생각보다 쉽다고는 해도,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하루 이틀만 술 뒤섞어주는걸 잊으면 기껏 만든 포도주를 그르치기 일수였고. 그 탓에 포도주를 만들고 거르기 전 두 달 까지는 모두가 신경이 곤두세워져 있었다.





그러니 지금이 중요한 시기였다. 재빠르게 몇 통이나 되는 포도주 항아리를 옮기지 않으면 금세라도 곰팡이가 펴 먹지못하게끔 되는 탓이었다.





“아르고스!”





쿵, 하고 네미아가 부닺힌다. 옮기고 있던 술항아리가 도르르르 굴러 떨어질뻔한 걸 가까스로 붙잡는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네… 한순간 넘치도록 흐르던 식은땀을 훑어냈다.





“니카노르 다음은 너냐… ”





이젠 나도 모르겠다. 어째 어느 하나 곱게 끝나는 일이 없는지, 참으로 박하다고 느꼈다. 네미아는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게 엉겨붙어 왔다.





“심심해! 아르고스, 심심해!”





꽥꽥 소리를 지르는 통에 귀가 먹먹했다.





“그래, 그러냐…?”

“치, 또 시원찮은 반응.”

“아니, 그럼 어쩌자고…”





네미아의 마음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다시 술항아리를 잡고 옮길 즈음 네미아가 먼저 물어왔다.





“일하고 있는거야?”

“맞아. 너한테는 기대 이하일 수는 있겠는데. 이게 내 운명이라서.”

“운명… ”





네미아는 입을 다신다. 차분하고 조용히 운명이란 단어를 굴린다. 파툼(fatum) 이라 불리는 사람의 운명은, 파타라 불리는 세 명의 여신이 지어낸다. 인간마저도, 신마저도 어찌할 수 없는 도리를, 운명이라 하였다.





“그, 갑자기 생각나서 묻는건데. 모르타 님은 어떤 분이셔…?”

“모르타 여신님?”





어제 한 얘기 때문인지, 네미아는 모르타 여신님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모르타, 그녀에 대해 모르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 여신에 대해 알게된다면 모르타 여신이 준 선물이란 무엇인지 지레짐작하게 될 터였다.





“모르타 여신님은… ”





운명을 관장한다고 일컫어지는 세 자매, 파르카이는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다고 전해졌다. 신조차 그들에게 운명을 바꿔달라 할 수 없었으며, 위인 헤라클레스 역시도 운명을 주름잡는 세 여신에게는 다른 사람의 목숨과 맞바꾸는 것이 고작이었다.





노나는 운명의 붉은 실을 잣고, 데키마는 갓 태어난 아기의 손에 실을 쥐어주며, 모르타는 가위로 그 운명의 끈을 자른다. 그 어떤 인간이라 할지라도,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죽음을 피하고자 했던 인간 아킬레스도, 스틱스강에 몸을 담궜지만 제 팔자를 고치진 못했다.





“정말이야…?”





하도 이야기가 고픈 것 같아 그런 얘기를 해주자. 네미아는 재밌어하면서도, 석연치 않은 얼굴로 들었다. 하기야 썩 달갑지는 않을터였다. 





누군들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수는 없다는 말을 듣노라면 좋아할 사람은 없다. 더군다나 네미아에게 반짇고리를 선물해준 이가 모르타 여신님이라 생각하면, 그리 좋은 기분만은 아닐 터였다.





“자, 그럼 됐지? 이제 방해하지마.”

“치사해.”





대체 뭐가 치사하단건지. 이정도면 쉬는 시간까지 할애해서 놀아준건데. 





“어느 부분이 마음에 안든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일해야돼. 지금까지도 일을 안하면 진짜 큰일나거든?”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더이상 포도주 항아리를 옮겨놓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곰팡이가 펴버린다. 





이맘때의  포도주는 조그만 온도 변화에도 취약한 터라 빠르게 서늘한 동굴 안으로 들여놓지 않는다면 통째로 버리게 될 수 있었다.  





“그치만 마지막 날인데.”

“아… ”





“아르고스는 놀아주지도 않고, 계속 나혼자만 있었는걸… ”





네미아는 울먹이는 얼굴을 내심 쓸어내리려고는 하나, 가슴에 걸린 울분이 영 가시지 않는지 눈가는 촉촉히 젖어있었다. 





괜스레 못할 말을 한 것 같아 마음이 약해지는데.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서도, 한편으론 미안해졌다.





“알았다, 알았어. 마지막 날이기도 하니까. 정말 딱 한시간만 너가 원하는대로 해줄게.”





졌다 졌어. 오늘이 네미아가 돌아가야하는 마지막 날인데. 차마 아무런 추억 없이 가는것도 마음이 썩 편치 않았다. 





“진짜? 진짜지…?”

“응.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아, 아르고스. 나, 그럼 가보고 싶은데가 있어.”





네미아는 그대로 내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보고 싶다는게 있다는 구실로, 네미아가 데려간 곳은 신전 너머에 있는 작은 평야. 





별다른 기대를 걸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무심히 네미아를 따라갈 뿐이었지만.





“이런데가 있었어…? ”





어느샌가 탄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어제 찾았어. 그때는 해가 질 무렵이라서 별로 예쁘진 않았지만… 아르고스랑 같이 와서 보면 예쁠것 같다고 생각했거든. 어때?”





드넓은 평원을 가득 메우고 있는 해바라기들. 태양을 쫓아 고개를 돌리는 해바라기를 보노라면, 따뜻한 햇살 냄새가 물씬 풍겨오는듯 했다. 





지금껏 하늘을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은 드물었지만. 해바라기를 따라 하늘을 은하수마냥 타고 지나는 구름을 보고있으면 나마저 해바라기가 된 것처럼 느긋한 기분에 녹아들었다.





드넓은 대양에 넘실 몸을 맡긴 것처럼 따습고 보드라운 느낌.





“아름답네.”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이제껏 가져왔던 근심이나 걱정 같은 건 하찮은 걸로 비견될만큼. 어째서 이카루스가 하늘을 바라봤는지를 깨달은 날이었다. 





“평생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네.”

“그치? ”





어디하나 평소에 보던 하늘과 다를게 없었지만. 다음에도 네미아와 같이 보고픈 하늘이리라. 





***





성소 근처에만 가도 네미아를 다그치는 호통소리가 가득할 것 같았다. 성화를 지키는 여사제들은 모두 무표정하면서도 한없이 엄한 모습을 보여주곤 했으니까 말이다. 





그런 태도는 무릇 네미아에게 까지 닿아, 잠시나마 네미아를 맡고있던 여사제님들이 나를 다그치지 않을까 생각했다.





복잡한 마음을 안고, 성소 앞에까지 다가가자.





“네미아는 실을 잘 뜨는군요.”

“에헤헤, 그런가요…?”





내 근심같은건 괜한 걱정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성소에는 여사제들과 함께 웃는 네미아의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도통 웃지않는 사람들인줄 알았는데. 여사제들도 꼭 엄격한 사람은 아니구나, 안도하며 슬쩍 성소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성화를 두르며, 도란도란 앉아있는 여사제와 네미아. 기다란 붉은 실을 늘어뜨려 헤진 부분을 꿰매고, 가위를 휘둘러 실을 거뒀다. 남은 붉은실은 꾸려 감아 실타래로 만들어놓는다.





“엇, 아르고스!”





여사제와 웃고있던 네미아는 내 얼굴을 보더니, 화색을 띄우며 달려왔다. 





“보고싶었어!”

“잠깐, 순례자님…?”





여기서 이러면, 원래 아는 사이라는 걸 들켜버릴텐데. 불안한 마음에 슥 주위를 둘러보자, 예상외로 여사제는 온화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아르고스. 저희는 둘 사이를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이미 저희도 다 알고있으니, 신전에 있는 동안은 편한대로 있어도 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제님…?”





“네미아에 대해선 아무런 언질도 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아르고스가 나쁜 마음을 먹고 데려온 것도 아닐테니 말이죠. 그나저나, 아르고스. 용케도 님프를 길잃은 순례자라 속이고 잘도 데려오셨더군요. 담이 참 크십니다.”





다 들킨걸까. 그러나, 베스타의 처녀들은 그저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성화에 땔감을 넣고 있을 뿐 더는 다그치지 않았다.





“이번은 어쩔 수 없었으니 이해하겠지만, 다음에는 거짓말 하지 마시길.”

“아, 알겠습니다. 사제님… ”





거짓말을 들켰다고 생각했을땐 저 성화에 지져 죽는게 아닐까 했었는데. 그런일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깊은 안도를 내쉬며, 네미아를 바라봤다. 





네미아의 눈은 마치 자신은 잘못한게 하나도 없다는 듯 영롱하기 그지없어서. 참, 뭐라 말하기도 힘들었다.





길잃은 순례자인 척하고 아는체 하지 말라고 그리 신신당부했는데도. 네미아는 입이 싸구나. 다음부터 네미아에게 비밀은 커녕 하나도 말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헤어질 날은 다가온다. 뜻하든 뜻하지 않든 이별은 항상 곁에 있다. 무릇 전해내려온 옛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그러한 이별을 달갑게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눈물이 이별을 어찌할 수 없다면, 차라리 좋게 끝내자는 의미로 말이다.





“야야, 울지마.”





그런 말을 했을 뿐인데, 단박에 울음을 터트리는 네미아는 도저히 내 손으로 감당이 되지 않았다. 영원히 신전에 발을 들이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다음 삭까지 겨우 2주 남짓 보지못할 뿐인데. 





“그치만… 너무 좋았는걸.”





힘겹게 눈물을 닦아내는 네미아. 그토록 어르고 달랬는데, 눈물많은 네미아는 그칠 줄 몰랐다. 





하루라는 짧은 시간동안 그새 정이 든걸까. 하기야 오전 내내 잠만 잤다는 네미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성소를 지키는 여사제하고도 둘러앉아 여러 이야기를 나눈 것만 같았다. 





하룻밤 정이지만, 네미아에게 있어선 소중한 불씨나 다름없으리라.





“좋은 사람들이 많이있긴 했지. 나라도 아쉬웠을거야.”

“응… ”





네미아는 그윽히 여사제들이 있는 곳을 바라본다. 가야한다고는 생각하지만, 쉬이 발걸음을 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눈동자에는 미련이 차 올라 있었다. 





“조금, 그리워 질 것 같아… ”





네미아의 어깨는 축 쳐졌다. 





“자주는 아니겠지만, 네미아. 너만 원하면 다음에도 데려다 줄게.”





쳐져있는 모습이 보기 안쓰러워서 건넨 한마디에. 아까까지 온갖 슬픔을 머금은 수국같던 네미아의 얼굴은 거짓말같이 밝아져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약속할게.”





정말 알기쉬운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





이제 막 밤 쯤 되었을까. 





밖은 초승달이 올라왔다. 저녁밥을 먹고 막 눈을 감았을진데. 졸음이 몰려왔다. 피로가 겹겹이 쌓인탓인지, 눈꺼풀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잠에 들 찰나, 니카노르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아르고스.”

“무슨 일인데.”





니카노르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저 귀만을 기울인 채 나는 침대에 누워, 니카노르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만약에 말야.”





니카노르는 말한다. 만약이라는 가정에서 시작되는 그 말은, 몽롱한 정신으로 차마 알아듣기는 힘들었지만. 얼핏 귓가를 흘러들어오는 니카노르의 말은 넘겨 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내가 먼저 황금 가지를 꺾는다면, 그것도 예언대로 되는걸까…?”





아마, 전에 말했던 예언에 대한 이야기이리라. 떡갈나무에 걸린 황금 가지는 단 하나, 니카노르는 그 가지를 자신이 꺾는다면 어떻게 될지를 묻고 있었다. 





“니카노르, 하지마.”





잠이 깼다. 그 말을 듣고도 마음 놓고 잘 수 있다는 게 어불성설이었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의식은 다시 또렷이 위로 부유한다. 





“어째서…?”

“그야… ”





이유랄게 있을까. 사지로 걸어간다는데.





“위험하잖아.”

“위험한건 나도 알고있어. 하지만, 가능하지 않을까? 황금가지만 꺾는다면, 결국 예언이 어떻게되든 상관없게 되는거잖아.”

“그렇지만… ”





니카노르의 말대로, 황금가지를 꺾는다면 이번해 안에 더는 꺾을 이는 없었다. 그러니 꺾기만 한다면, 예언의 대상은 자연스레 니카노르가 될 터였다. 



하지만, 그건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 다른건 고려조차 하지 않은 엉터리 계획 같았다.





“나 결심했어.”





니카노르는 말한다. 애시당초 무슨 말을 하든 듣지 않을 것 같았다. 





“바보같은 짓이야, 니카노르.”





니카노르가 말하는 계획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인지는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저 예언이라는 확신만을 가지고, 불길에 뛰어든 부나방이 된 꼴이었다. 





니카노르의 계획에는 그저 그뿐, 어떻게 꺾을것인지 꺾은 뒤에는 어떨지 조차 계획되지 않는 백지나 다름없었다.





“너가 말려도 할거야. 이번이 내가 생각하기에 마지막 기회니까.”

견고한 뿌리를 보는듯 했다. 결심은 바닥에 뿌리내려 도저히 꿈쩍하지 않았다. 

“진짜, 갈거냐…?”





아무리 말려봐야 생각을 바꾸진 않으리라. 무슨 말을 하든 듣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야 내가 막아봤자 힘만 뺄 뿐일테다.





“응.”





니카노르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인다. 태평한 눈동자를 봐서야 속이 답답해라 터질 지경이었다. 대체 어째서 항상 내 말은 들은채 만채, 사지로 뛰어들려는걸까. 





“더는 안 말려.”

“알고있어.”





눈을 바라본다. 니카노르의 눈은 한 치 거짓없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





속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을리 없다.





니카노르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졸릴리가 있을까. 





니카노르가 숙소를 떠나고나서, 나는 그저 두 눈을 깜빡거리며 침대에 누워있다가 뒤따라 나섰다. 의미없는 짓거리인 건 아는데도. 내가 니카노르를 따라간다해서 녀석의 마음이 돌아설리도 없고, 결과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니까. 오히려 니카노르의 비참한 죽음을 면전에서 볼 뿐이었다. 





그렇다고 넋놓고 잠만 자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차피 좋지 않은 결말을 봐봤자 머리가 더 복잡해질게 뻔할텐데도. 스스로도 모순적인걸 알면서도, 니카노르의 뒤를 밟았다. 





니카노르는 떡갈나무 앞에 멈춰섰다. 은은하게 내리쬐는 달빛에 겨우살이로 뒤덮힌 황금가지만이 홀연히 빛난다.





저번처럼 부디 가지를 꺾는 시늉만 하기를. 평소의 니카노르처럼 두려움에 혀를 내두르며, 늘 그랬듯 태연한척 하기를 빌었다. 





니카노르는 그런 기대를 바람 맞히는듯 떡갈나무의 두꺼운 껍질을 짚고 한발자국씩 오르기 시작했다. 





한번은 발을 헛디뎠다. 한번은 껍질이 떨어졌다. 어떤 때는 떡갈나무에 기대어 곤히 자고있는 티투스의 눈가에 가루가 흩날리기도 했다. 





니카노르가 한걸음씩 나아가, 마침내 황금가지를 코앞에 둘때에는 차라리 티투스가 자는 사이 단숨에 끝나길 빌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발짝. 니카노르는 빛나는 가지에 손을 뻗는다. 





가까운듯 하면서 먼 그 가지는 좀처럼 힘껏 뻗음에도 닿지 않는다. 고지가 눈 앞에 있어도 신의 변덕인지, 좀처럼 고지는 꺾이지 않는다. 그럴수록 조바심에 지나친 욕심을 부린다. 





위태롭게 얇은 가지에 발을 걸친 채 이파리에 조금씩 몸무게를 지탱해가며 황금가지가 달린 정상을 향해 나아간다.





갖은 노력은 끝내 가지를 부러뜨린다. 





니카노르는 하룻밤 새에 짧은 단 꿈을 꾸었다. 그러나 백일몽이 무색하게도, 황금가지는 떨어져 티투스의 이마팍에 떨어졌다. 





티투스는 눈쌀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제 이마팍에 떨어진 황금가지를 주워들고는 나무 위를 우러러 쳐다본다. 찰나동안 뒷골이 오싹했다. 





“누구냐.”





티투스는 묻는다. 백내장이 낀 눈을 한바퀴 돌린다. 희멀건 눈으로 어두운 밤, 오로지 달빛에 의존해 침범자를 찾는다.





제자신의 목이 베이기 전에 범인의 목을 베기 위해 눈에 불을 켠 채 주변을 살핀다. 이파리가 니카노르를 절묘히 감춰주길 바랬다만. 헛된 꿈이었는지, 다시금 부스럭하고 겉껍질이 떨어진다. 





“거기더냐?”





티투스는 천천히 움직인다. 손 안에 든 생쥐를 괴롭히는 고양이처럼, 숨통을 트는듯 하면서도 천천히 죄어온다. 티투스가 단도를 꼬나쥐고 나무를 한바퀴 도는 동안, 귀뚜라미 소리만이 귀를 간질인다.





쿵, 티투스는 발로 나무를 박찬다. 나뭇가지는 크게 술렁인다. 니카노르가 붙잡고 있던 가지가 우지끈 소리를 낸다. 





티투스도 그 소리를 듣고 발길질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쿵쿵, 아닌 밤에 우득 우드득 우레같은 소리가 들린다.





“이래도 내려오지 않을테냐?”





두터운 고목은 휘청인다. 나뭇가지에서 들리오는 불길한 파찰음은 점점 거세진다. 니카노르를 지탱하고 있던 나뭇가지는 이내 우지끈 가라앉는다.





니카노르는 퉁, 바닥에 내팽겨쳐진다. 티투스는 하얀 단도를 매만지며, 한걸음 한걸음 니카노르에게로 다가간다. 월광에 칼등이 비친다. 





이대로 가만 있을거야?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조금만 있으면, 니카노르는 원하던대로 바라던 죽음을 맞이할 터였다. 그깟 가지가 무엇이길래, 저토록 목숨까지 마다하지 않는건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니카노르가 죽는건 두고볼 수 없어. 이대로 니카노르가 죽는다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니카노르가 자초한 일이지만, 겨우 가지 탓에 니카노르가 죽는 건 원치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돌을 주웠다. 





한눈 팔린 티투스의 뒤로 다가간다.





티투스가 단검을 들어올릴때. 힘껏 돌을 내리찍었다. 





그 한방에 거신은 무릎을 꿇는다. 





초승달이 내리쬐는 밤. 





노장은 숨을 다하고, 디아나 여신의 반려는 바뀐다. 또다른 사제왕이 신성한 책무를 내려받으며, 오래 묶인 황금가지의 숙원은 풀린다.





“아르고스…?”





니카노르를 바라본다. 





“끝났어. 모두.”





숨을 가다듬는다. 





티투스를 죽였다는게 도저히 믿기지는 않지만, 손에 묻은 피가 그를 증명한다. 니카노르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아르고스, 너가… 죽인거야…?”





고개를 끄덕인다. 거를 것 없는 사실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너가… 숲의 왕 인거야…?”





니카노르는 다시 묻는다. 





그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 누가 가지를 꺾었고 누가 전왕을 죽였네, 왈가왈부한들 무의미한 논쟁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둑한 밤, 증인은 우리 둘 뿐이었다. 구태여 논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





돌을 내팽겨 던졌다. 티투스의 선혈이 묻은 돌은 먼발치 나아가 니카노르의 발치에 떨어졌다. 그제서야 예언을 이해한다. 





‘가지를 꺾는 이는 두명이오. 한 명은 디아나 곁에 있을테며, 한 명은 케레스의 손에 거둬질테니. 거울에 비친 이가 그리 되리다.’





니카노르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아차린다. 





예언이 이내 니카노르를 가리킴을 알았다. 그리하여 니카노르는 디아나의 곁에 있을것이며. 예언은 이제, 길을 잃은 내가 어디로 가야할지를 가리킨다. 





“너에게 맡길게.”





티투스를 거목에 기대어 눕힌다. 부릅뜬 눈을 손으로 쓸어내려 가려주고, 혀 뒤에 동전을 한 닢 놓는다. 그러고나서야, 홀가분하게 돌아설 수 있었다.





***





야심한 달밤이다. 





어제까지 봐온 달콤한 기억은 머리를 사르르 녹이듯 머리를 어지럽힌다. 마음은 쉴새없이 요동치느라 좀처럼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어릴적 들었던 작은 노래라도 부르면, 파르르 떨리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진정될까? 옛 기억을 더듬어가며 짧은 노랫가락을 흥얼거린다.





보고싶어, 아르고스. 





헤어진지 하루도 채 안됐는데. 왜 오래전 추억처럼 느껴지는걸까. 다시금 마음속에서 두고두고 꺼내어 보고싶은 기분이야. 





생각할수록, 좀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꺼내달라고 아우성치듯 쿵쿵 몸 안 이곳저곳을 들이박는 기분이었다.





“외로워.”





밤이 깊을수록, 사무치게 외로워졌다. 어제 사제님들과 함께 밤을 보내고 오늘은 아르고스와 붙어있다시피 했는데도. 하룻밤 사이에 꾼 꿈마냥 믿겨지지 않았다. 눈을 붙여보려해도 짙궃게 이때만큼은 도저히 잠이 오지 않는다. 





“아르고스… ”





다시 어제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아르고스한테 그토록 손도장까지 받아온 약속일텐데. 어쩐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이번 약속도 아르고스한테 맹세까지 들었어야하는건데. 그랬어야, 불안한 마음이 어디론가 가셔 버렸을텐데. 그러지 않은게 아쉬웠다.





신전 쪽을 바라본다. 





울창하게 자란 나무들이 빽빽히 모여 숲을 이룬다.  





멀찌감치 불빛이 보인다. 조그마한 등잔불이 밤하늘 아래에 일렁인다. 흘깃 비치는 불빛 새로 낯익은 인영이 보인다. 익숙한 발걸음, 눈에 익은 움직임. 



설마, 하던 마음이 점차 확신으로 바뀐다.





“아르고스?”





믿기지 않아… 정말 아르고스야…?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심장이 거칠게 뛴다. 좀처럼 진정되지않는 가슴을 부여잡고, 아르고스를 바라본다. 얼굴을 가린 어둠이 달빛에 걷히고, 아르고스의 모습이 비춰진다. 진짜, 아르고스야. 





“아르고스!”





달빛 아래서 신성한 숲을 배회하고있는 디아나 여신님이 안다면 화낼지 모르지만. 그것보다는 먼저 마법같이 나타난 아르고스를 만난게 기뻤다. 

뭍가를 짚고 올라서 아르고스를 마중한다. 





“네미아.”

“아, 아르고스…?”





이상해. 아르고스의 손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어. 





“어떻게 된거야… 손에서 떨어지는건… ”

“피야… ”

“다, 다친거야…?”





아르고스는 고개를 내젓는다. 





“네미아.”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아르고스는 입을 뗀다. 





아르고스는 무슨 소릴하는걸까. 나는 무슨 표정을 짓고있는걸까.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아, 머리가 어지러워. 어떻게 된거야…? 아르고스에게 묻고싶었지만. 아르고스는 마치 마지막 부탁을 하려는 사람같은 얼굴로 서있어서 괴로워졌다. 





“내 실을 끊어줘.”





입이 건조했다. 입술이 서로 달라붙어 잘 떼지지도 않았다. 말하기 힘든건지, 말하기 싫은건지도 가늠이 가지 않는다. 온통 갈라진 목으로 그저 아르고스에게 묻는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내젓는다. 아마, 스스로를 볼 수 있다면 웃겨 쓰러넘어질만큼 이상한 표정일거야. 도저히 살갑게 물어보려해도 입고리는 올라가지 않는다.





“모르타의 가위로, 내 실을 잘라.”

“하지만 아르고스… 모르타는… ”





모르타는 운명의 실을 거두는 여신. 아르고스가 그렇게 말했다. 모르타 여신님이 반짇고리를 넘겨주실때, 언젠가 쓸 일이 있을터라고, 그러니 간직해두라 하셨다. 





이제 모르타 여신님이 준 반짇고리를 보고, 더는 웃을 수 없었다. 어째서, 모르타 여신님은 이런 가위를 내게 맡기신 걸까. 





“거, 거짓말이지…? 아르고스, 장난 좀 치지마… 나, 그런거 장난으로라도 받아줄 자신 없으니까… ”





“운명이야.” 

“안돼. 아르고스. 난 절대… ”





아르고스의 얼굴은 웃고있는걸까, 울고있는걸까. 나도 혹시 우는걸까. 아니면 어설프게 웃고있는걸까.





“할 수 없어… ”





아르고스는 내게 다가온다. 어느샌가 한뼘도 안되는 거리로 다가왔다. 그제서야, 아르고스의 얼굴이 자세히보인다. 





옷에는 피가 튀어있다. 눈에는 쓰디쓴 눈물이 맺혀있다. 그러나,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차라리 너한테 끝을 맡기고 싶어, 네미아.”

“어째서, 나야… ”





화가 났다. 





모두가 싫어졌다. 이런 어설픈 운명을 맡긴 모르타 여신님도, 내게 죽느니만 못한 선택을 강요하는 아르고스도. 운명의 실을 어쩌지도 못해 망설이는 나도 원망스러웠다. 





어째서, 나야만 한거야…? 이유를 묻지만, 그 누구도 답해주지 않는다.





“어째서 나냐고…!”

“네미아… ”

“왜 죽지 못해 안달인건데… 차라리 죽을거라면 말도 하지 말고 혼자 죽지 어째서 나한테 죽여달라고 하는건데… ”





눈시울이 뜨거웠다.





“어떻게 나한테 그런말을 할 수 있는거야…? 너가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지,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면서도. 어째서 태연하게 말하는거야…?”

“하지만… ”





눈물이 흐른다. 가슴이 뜨거운 꼬챙이에 찔린듯 아팠다. 





왜 이렇게 되어야만 하는걸까.





“어째서 날 생각해주지 않는거야. 어째서 날 봐주지 않는거냐고… 너는 죽기만 하면 된다는거야…? 죽고나면 나 같은건 알 바 없다는 거야…? 이기적이야… ”





고양이가 엉켜놓은 실타래마냥 단단히 매듭묶여 풀리지 않는 문제처럼. 그 문제가 눈 앞에 있는 것만으로 분하고, 속이 타올라서 다그칠 수 없었다. 



어째서 운명은 실타래가 되어야만 했던걸까. 모르타 여신님이 이 자리에 있다면 묻고싶었다.





“네미아 잘 들어봐… ”

“듣기 싫어… ”





남을 거라면 차라리 나쁜 사람으로 남아버려. 그래야만 마음이라도 편할 수 있는거잖아…





“신전으로 돌아가봤자, 어차피 죽는 일 뿐이야.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다지 곱게 죽을 수 없어.”

“싫어… ”





대체 어떡하란거야… 왜 마음 약해지게 하는거야… 귀를 틀어막아도 아르고스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돈다. 





“차라리 죽을거라면, 너한테 죽고싶어, 네미아… ”

“어째서야… 어째서 날 놔두지 못해 안달인건데!”



“널, 사랑하니까야. 네미아.”

“너한테 사랑이란건, 그런거야…? 남따위는 돌아보지않고 자기만 편하면 되는?”



“그게 아니라… ”

“변명따위 듣기 싫다니까!”





날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나보고는 이해하라고 하는건데… 





“나가 죽어버려… 아르고스… 너같은 거 얼굴도 보기 싫으니까…”

죽을거라면, 내 앞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려… 너같은 건 잊어버릴거니까…





***





받아들이지 못할 말이란 건 알고있어. 





“네미아.”





다만 운명대로 살고 싶진 않을뿐이야.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죽어서 케레스의 손에 거둬질 운명이라면. 차라리 네미아에게 죽고 싶을 뿐이었다.





“마지막 소원이야.”





네미아는 반쯤 우는 얼굴로, 눈시울을 닦아내며 말한다. 목은 눈물에 잠겨 알아듣기 힘들만큼 발음이 뭉개졌다. 아름답게 빛나던 황금색 눈망울은 붉게 시었다. 언제까지나, 울보 네미아의 모습이었다. 





“정 죽고싶다면, 네 소원대로 해줄게.”

“응.”





네미아는 가위를 꺼내든다. 태연한 척을 하면서도 손에 든 가위는 벌벌 떨린다. 한창을 울던 네미아의 얼굴은, 사람을 홀릴 미색이라기엔 한참 망가져있었다. 





가슴이 저려오지만. 역설적이게도 네미아를 상처입혀야만 더는 상처입지 않을 수 있었다.





모르타의 가위가 다가온다. 



툭.



네미아는 보이지 않는 실을 거둬, 가위질했다.  





“흑… ”





머금고 있던 둑이 터진다. 기껏 스스로 참아왔다 생각했던 울분이 끝끝내 흘러나온다. 네미아는 주저앉아, 손등으로 자기도 모르는 새에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아냈다.





“흐아아앙… ”





네미아도 스스로가 어째서 눈물을 흘리는지 알지 못한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나, 왜 이래야 하는거야…?”





되묻는다. 왜 이랬어야만 하는 거냐고. 어째서 운명은 시련을 내릴 뿐이나며 묻는다. 노나가 나눈 실타래를 탓하고, 실을 자른 제자신을 욕받이하며 후회한다한들. 



그렇다고, 운명의 실을 다시 붙일 수 있는건 아니었다. 흩뿌려진 물을 되담을 수 없듯, 되돌릴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네미아.”

“아르고스… ”

“울지마. 네 탓 아니니까.”





네미아는 고개를 젓는다. 





“어째서 고집부린거야, 아르고스… ”

“숲의 왕이 되기 싫어서야. 되었다면 평생을 떡갈나무만 지킬 운명이고, 되지않는다면 케레스의 손에 거둬질 운명일테니까.”





티투스처럼 목줄 메인 염소마냥 사는건 죽느니만 못했다. 그렇다고 죽을 각오가 되어있는것도 아니었다. 죽을 운명을 타고났다는게, 두렵고 무서웠다. 다만 지금에 와서는, 체념했을 뿐이다.





“그래서 차라리, 네 옆에서 죽고싶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어차피 죽을거라면, 네미아의 곁이 좋았다. 죽을 운명이라면, 스스로 죽는 방법이라도 선택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기적이라고는 생각하지만, 





“그런거. 차라리 없었으면 좋았을텐데.”

“응.”





네미아는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가 덜덜 떨리고 있다. 어찌해야할지 방황하는 네미아의 눈동자를 보노라하면 나마저 가슴 한켠이 찌르르 떠는 느낌이었다. 





“가지말아줘… 아르고스.”

“떠나지 않아.”

“거짓말… ”





새빨간 거짓말일게 틀림없지만. 왠지 거짓말같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죽는다는게 실감이 나지 않을만큼 먼 얘기 같아서 그런걸까.





“차라리… 차라리, 어디론가 떠나버리자… 같이.”

“너, 네미 호수는 어쩌려고. 어느순간 갑자기 사라져버리면, 디아나 여신님이 화낼 걸?”

“그런거… 내버려둬도 상관없어… 그러니까, 응?”





네미아는 내 몸을 꼭 껴앉는다. 두 손으로 깍지를 껴 단단히 붙잡고는 놓아주지 않으려는듯 품에 안긴다. 달라붙어오는 네미아에 평소같이 쓴 말은 할 수 없어, 그저 달빛에 빛나는 갈색 머리칼을 손빗으로 쓸어내린다.





“같이 죽을거야… 그러니까, 먼저 죽지마… ”





덧없는 투정이었다.





“살 사람은 살아야지, 바보야. 나는 그냥… ”





죽는걸까? 모르겠다. 하지만 죽을 목숨이라면, 네미아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저 구색맞추기인 말에 지나지 않겠지만. 가기전에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면. 





“잊지 말아줘. 네미아.”





결코 지켜지지 않을 약속이었다. 그런걸 알면서도, 듣고싶었다. 그래야만 언제 죽을지 모른다 하더라도, 편히 눈감을 수 있지 않을까하고. 막연히 생각할 뿐이었다.





네미아의 입이 열린다.





“응… ”





***





수많은 일이 있었다. 





느낌만큼은 한달 채 지나지 않은 것 같았는데, 어느샌가 계절은 가을에 접어들고 있었다. 많은 책무와 많은 잡무에 치여 떡갈나무에 새 가지가 돋아났는지도 확인할 새 없을 정도였으니. 





어쩌면 아르고스가 사제왕이 되기를 그토록 싫어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나마 생긴 겨를에, 떡갈나무에 기대었다. 





티투스가 항상 있었던 그 자리. 황금가지가 꺾인 날에도 누워 잠을 청하던 그 자리였다. 땅은 보드라운 풀로 덮여 푹신했고, 뿌리 또한 팔을 늘어뜨려 졸지에 생각에도 없던 수마가 몰려온다.





작은 기억. 기억의 파편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아르고스와의 만남, 우울했던 날, 즐거웠던 날. 샐 수 없는 추억 사이에서 아르고스가 빠진 적을 손으로 꼽으려해도 손가락이 채 펴지지도 못했다. 





조는 사이, 나를 이루던 과거를 마주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지금을 자각하게 된다. 말할 필요도 없이. 대게는 허전함이었다. 





“준…셨습니까… 르 사제님…?”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의식이 점점 위로 부유한다. 나무에 기댄 잠깐 사이에 그새 곯아떨어진 걸까. 이래서야, 아슬아슬한 작두 위 같은 ‘숲의 왕’ 자리를 얼마나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 





“…는 되셨습니까, 니카노르 사제님? ”

“응, 아. 아니아?”





아니아 사제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왠일인지 아니아 사제의 얼굴은 무표정 사이에서 살벌한 기색을 품고 있었다.



 

“무, 무슨 일 있어, 아니아?”

“서임식 준비는 됐냐고 물은겁니다, 니카노르 사제 님.”



“아아, 됐지. 그럼, 됐고말고.”

“제가 보기엔 전혀 그런 거 같지 않은데. 뭐, 니카노르 사제님이 그러시다면 그런거겠죠. 그나저나, 관은 어디다 팔아먹고 오셨습니까.”



“관?”





그런 게 있었던가…? 뚱한 표정으로, 아니아 사제의 눈을 보자. 아니아 사제의 눈은 시시각각 험악해지고 있었다.  





“어디로 간 거 같으십니까.”

“아니아, 말해두는데 오해야. 전혀 잊지 않았다고. 알고 있다니까? 그러니까, 그… ”





“가령 예를 들어, 신전 탁자 같은데 위에 올려두셨습니까?”

“마, 맞아. 신전에 있어.”





아니아 사제는 한숨을 쉰다. 





“그래요, 그렇겠지요. 이게 거기에 있었겠죠.”





아니아 사제는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을 풀었다. 아니아의 손에는 티투스가 늘 쓰고있던 황금 관이 들려있었다. 





“무슨 비둘기도 아니고, 몇번이나 해준 말을 까먹으시면 어떡합니까. 관은 항상 들고 다녀야된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평소에는 어차피 지니고만 있는거니까… 굳이 간수만 잘하면 상관없지 않을까하고… ”



“오늘부터는 쓰고 다니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다해서 두고 다니시면, 누가 훔쳐갈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식으로 말입니다. 대체 이게 얼마나 중요한 물건이신지 까먹은 겁니까?”





아니아 사제는 금관을 거들먹거리며 설교를 이어나갔다. 사제 수업을 받은지 일 년이 훌쩍 지났지만, 아직도 아니아 사제의 설교엔 익숙해지지 않아. 어느샌가 어린애마냥 귀를 꾹 틀어막고 듣는둥 마는둥했다.





“당신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게 없군요.”

“그치. 사람은 고쳐 쓰는게 아니니까.”





아니아 사제가 건네주는 관을 받아들고 일어선다.





“이제 가셔야 합니다. 누가 여기서 태평하게 낮잠이나 주무시는 바람에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아니아 사제를 따라 네미 숲을 지난다. 





울창한 나무 여럿을 지나다보면, 아르고스와 같이 물을 뜨던 네미 호수가 보인다. 네미 호수는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허리춤까지 오는 갈대풀도, 황금색으로 빛나는 나무도, 잔잔하게 흐르는 호수도.





“달라진 게 없네.”





마치 호수를 자주 들리던 그런 사람따윈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는듯, 다른게 하나 없었다.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가라앉는 내 표정을 보고 아니아 사제가 지적했으니, 어떻게든 해야되겠다고는 생각해도. 좀처럼 가슴을 짓누르는듯한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곧 서임식입니다, 니카노르 사제님. 디아나의 거울 앞에서도 그런 꿍한 표정을 지으실 겁니까?”

“그건 아니긴 한데.”





마음을 다잡는다. 아르고스가 했던 마지막 말을 떠올린다. ‘너에게 맡길게’ 라는 한마디. 그런 한마디를 감정 하나에 무르치기에는 너무나 먼 길을 걸어왔다. 





“준비되셨습니까?”

“응.”





일련의 예식이 진행된다. 베스타의 성소에서 가져온, 꺼지지 않는 불을 횃불에 붙여 든다. 





영원히 타오르는 베스타의 성화 아래, 서약을 한다. 비르비우스에서부터 시작된 숲의 왕의 관례를 따르겠노라 맹세한다. 





마지막으로 작년에 아르고스가 담궜던 포도주를 황금잔에 따른다. 넥타르 같은 검붉은 색깔을 마주하며, 이제는 숲의 디아나를 다스리는 사제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제껏 쥐어왔던 금관이 머리에 씌워진다. 





더는 티투스와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없으리라고 황금가지를 본딴 금관이 말한다. 어깨가 무거워진다. 반대로 마음은 홀가분해진다.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하기에, 되려 체념한 걸지도 모른다.





“이제부터는 정말로 ‘숲의 왕’ 이십니다.”

“알아, 나도.”





스스로를 꿰뚫어버릴만큼 투명한 호수물을 보며 생각한다.





“역시, 아르고스가 왕이 되었다면 나보다는 나았겠지?”

“그거야 그럴지 모르겠다고는 생각하지만… ”





아니아 사제는 고개를 내젓는다. 





“그래도 아르고스가 니카노르님께 한 마지막 말은. 분명 니카노르 님을 믿었기 때문에 한 말일겁니다.”

“어렵네, 참.”





어려운 말만 하던 녀석이라 그런지, 마지막까지 평생을 안고갈 숙제를 남긴것 같다. 아마, 숲의 왕으로서 모든 일을 끝내기 전까지는 풀 수 없는 과제가 아닐까. 





아르고스는 어디로 갔을까. 





만약 있다면 묻고 싶다. 내게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라, 스핑크스가 냈다하던 수수께끼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러고보니 그 이야기도 아르고스가 했었던가.





“가자.”





이제는 네미 호수를 등지고 돌아서자.





목가적인 노래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판이 부는 팬플룻처럼 청아하면서도 경건했지만. 가슴을 쿡 찌르는 아련함이 배어 있었다. 들어본 적 없는 노래면서도, 귀를 간질이는 아름답고 여린 곡조에 귀를 기울인다.





노래가 들려오는 작은 수풀로 다리가 이끌린다. 한걸음씩 다시금 네미 호수로 돌아온다. 잔잔한 노래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바위에 앉아 조용히 노래를 부르는 소녀가 보인다. 눈을 마주친 소녀는 말을 내걸기도 전 네미 숲으로 도망친다.





인영이 수풀 새로 사라진다. 환영인걸까. 아니면 이곳에 산다는 님프인걸까. 곱게 땋아내린 머리카락이 스쳐지나간다. 익숙한 옆모습에 다급히 소녀를 따라 수풀을 걷자.





그곳에는 투박하게 만들어진 무덤 위에 햇살을 듬뿍받은 해바라기가 올려져 있었다.





***





“네미아, 그건 무슨 노래야?”





짧은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던 네미아는 아르고스를 올려다본다. 그 탓에 머리칼을 쓰다듬던 손이 잠시 멈춘다. 





“응? 이거? ”





네미아는 네미 호수에 물장구를 치며 곰곰히 생각한다.





“자장가 아닐까…? 어릴적이라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잠이 오지 않을때마다 들었던거 같아. 그런데 아르고스, 그건 왜…?”

“왠지 낯익은 곡이다 싶어서.”





다시금 손으로 머리카락을 빗는다. 네 가닥으로 나누고, 한가닥은 밑으로 두가닥은 위로 엮는다.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네미아의 머리칼은 차츰차츰 아름답게 매듭지어진다. 





“어때, 어떻게 하는지 알겠어?”

“아…? ” 





네미아는 당황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미, 미안, 아르고스… 또 까먹었어.”

“그래, 뭐. 이래야 네미아지… ”

“에헤헤, 미안… 아르고스의 손이 너무 따뜻해서 그만. 빠져버린 것 같아.”





정말 어쩔 수 없는 녀석이다. 어쩜 하나같이 한결같을까. 님프는 종려나무의 열 배를 산다고 했었나. 그래서 네미아도 한결같이 태평한걸지 모른다. 





“알았어. 이번이 마지막이다? 진짜 잘 들어야해?”

“응. 이번엔 절대 안 까먹을게. 스틱스 강에 맹세코!”



“그런 약속 쉽게 하는거아냐. 그리고 또 까먹을 거 아냐.”

“아, 아니거든? 이번에는 진짜 안 잊을거야.”





한숨을 쉬고 다시금 네미아의 머리를 푼다. 머리칼에서는 햇살 냄새가 나서, 따스하고 보드라워서 몇번이고 매만지고 싶은 그런 기분이 든다. 





머리가 엉키지 않도록 아래서부터 천천히 손빗질을 하며 타고 올라간다.





“그러냐.”

“뭐야, 아르고스… 그 시덥잖은 반응은.”





네미아의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그, 아르고스. 궁금한게 있는데… ”





머리칼을 만지고 있자. 네미아는 조용히 물어왔다.





“왜 머리 묶는법을 가르쳐주려는거야…?”





네미아의 머리카락을 갈래 지고 있을 즈음. 나는 간단히 입을 열어 답했다. 





“내가 없어져도, 머리를 묶었으면 좋겠어.”





머리를 묶어내리는게 예쁘니까. 네미아의 머리칼을 매번 이렇게 땋아줄 사람은 한평생이 지나도 없을텐데. 이렇게라도 가르쳐주지 않으면, 네미아는 분명 머리를 땋기는 커녕 손질조차 하지 않을게 뻔했다. 





그러니 기왕 가르쳐주는김에 배워두면 좋을텐데. 그래, 그랬으면 좋겠는데. 지금까지 몇번이고 되풀이한 걸 보면, 기왕 가르쳐주고나서도 반년이면 까먹지 않을까가 걱정이다. 





“그러니까 가르칠 때 배워. 묶으면 예쁜데, 나 없다고 가만히 썩히는 건 아깝잖아. 그랬다간 정말 무덤에 들어갔다가도 나올 거 같으니까.” 





그 답에 잠시동안 네미아는 말이 없더니. 머리 위로 뜨거운 김이 확 솟는듯 했다.





“아, 아르고스… 나 잊지 않을게… ”

“뭐 말야. 머리 묶는 법? 그래, 이번에는 잊지마. 다시 가르쳐주기도 번거로우니까.”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 네미아.”

“응… ”





네미 호수에는 님프가 산다. 

가장 행복하면서 외로운 님프가.











봐줘서 고맙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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