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총을 처음 잡아본 기억은 이미 희미해져버린 저편에 있었다. 그리 부유하지는 않았으나 부족하지도 않은 융커(프로이센의 전통적 귀족층)의 자식이었던 소년은 그의 할아버지를 따라 종종 사냥에 나가곤 했다. 어머니는 어린아이가 너무 빨리 병장기의 쇠 냄새나 짐승의 피 냄새를 배우지 않기를 바랬으나 체력과 귀족으로서의 품위를 강조하던 할아버지는 며느리의 걱정을 애써 무시하곤 했다. 소년도 그것이 나쁘지는 않았다. 피를 보는 것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으나 고리타분한 예법이나 각국 명문 가문의 계보, 역사 따위를 머리 속에 욱여넣는 것 보다는 나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세상을 등지신 이후 아버지와 종종 사냥에 나갔을 정도로 소년은 화약과 혈흔에 익숙해져가기 시작했다. 그런 줄 알았다. 

소년의 조국은 곧 제국이 되었다. 적국의 수도에서 그의 주군이 제국을 선포하였을 때, 소년도 그 자리에 있었다. 미친 듯 환호하며 자신들의 검과 피켈하우베 따위를 치켜들던 그 자리에 소년도 있었다. 보이지도 않을정도로 저 멀리에 서 있는 사람이 손짓 하나, 말 한 마디 할때마다 사람들은 침을 튀겨가며 소리를 질렀다. 어릴 때 어머니가 들려주던 사람들을 홀리는 사악한 마녀 이야기를 소년은 떠올렸다. 사람을 보고 처음으로 소름이 돋은 때도 이때였다. 처음에는 환희로, 나중에는 섬찟한 느낌으로. 어린 소년은 그때의 그 감정을 정의할 말을 찾지 못했다.

* * *

갉작 

갉작

신경을 건드는 소리에 그가 찡그리며 눈을 떴다. 그리 달라진 것은 없었다. 쉼없이 쏟아지는 화약가루에 덮여 그 색을 잃어버린 검은 흙. 포탄을 끝임없이 토해내는 포연으로 인해 시간조차 가늠하기 힘들어진 하늘. 눈을 감아도, 떠도 어둠은 그의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잠시간 멍하니 있던 그는 몸을 일으켜 계속해서 그의 잠을 방해하던 원인을 던져버렸다. 참호 속에서 인간의 시체를 먹고 피를 마시며 팔뚝만한 크기로 커진 쥐새끼였다. 코앞이 거의 사라진 군화를 보며 한숨을 쉰 그는 몸을 일으켜 전방을 바라보았다. 

생명의 흔적이라고는 볼 수 없게 넓게 펼쳐진 검은 평야. 맑은 물이 흐르고 소와 양이 평화로이 풀을 뜯던, 목가적며 평화롭던 시골 마을은 물 대신 피가 흐르고 인간의 맛을 본 들개와 까마귀들만이 나돌아다니는 지옥만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지옥도 한 가운데, 3겹의 철조망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는 벽돌 건물이 있었다. 하이얀 천들이 봄바람에 흩날리는 고운 나빌레라. 쉼없이 움직이는 흰 가운의 여인들 또한 나빌레라. 참혹한 전장과는 한없이 유리된 장소가 그곳에 있었다. 쌍안경에서 눈을 뗀 그는 옆에 있던 부관에게 물었다. 

"오늘 중대 인원 중 저기에 간 인원이 얼마나 되는가?"

"총원 124명 중 21명입니다."

"저쪽은?"

"정확한 것은 파악이 되지 않았으나.. 한개 소대 정도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좋아. 포격 전까지 얼마나 남았는가?"

"30분 안에 방열 끝나고 즉시 발포할 수 있습니다."

"20분 주겠네. 발포 전에 좌표 다시 한 번 제대로 확인하도록 하게. 이번에도 지근탄이 떨어지면 전부 다 모가지야."

"명심하겠습니다!"

그가 말하는 지근탄의 탄착지점은 물론 아군 진지는 아니었다.  아무튼 독특한 사람들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포탄과 총알이 쉴새없이 날아다니는 전장 한가운데에 중립 병원을 세울 생각을 하다니. 아니, 대단한 사람들인가. 양국군 모두 저곳은 일종의 중립지대로, 포격이나 총격을 엄히 금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잘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근처에서 매복하다가 치료를 받으러 오는 적 병력을 저격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으니까. 병원 안에 있는 인원이 저쪽에서 보낸 스파이일 것이라고 의심하는 사람들 또한 있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나 한 달이 되자, 전장의 모두가 알게되었다. 저곳은 결코 해가 되는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그 이후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자발적으로 병원 주변에 벽돌을 쌓고, 철조망을 두르고 약품을 가져다 두었다. 그렇게 전장의 성소가 탄생했다. 주위는 포연에 가리어 무채색으로 잠식되어 갔으나 그곳만은 반짝이는 색이 있었다. 주위는 온통 화약 냄새에 드문드문 피 냄새가 났으나 그곳만은 사람의 활기가 났다. 그는 저쪽이 병원의 간호사들을 무어라 칭하는지는 알지 못하였으나, 그의 중대원들은 간호사 모두를 빙엔의 성녀 힐데가르트라 불렀다. 

* * *

콰앙

그가 탁자를 거세게 치며 외쳤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의 앞에서 화려한 옷을 입고 있던 남자가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각하, 제 설명이 부족했습니까? 아니면..."

본노한 그를 달래듯 각하라고 불린 남자가 말했다.

"아뇨, 제대로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방금 내리신 명령은 무엇입니까!"

남자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방금 대위가 자신의 입으로 말했지 않습니까. 지금은 아군이 저곳에 없다고. 그러면 그냥 폭격으로 날리면 그게 이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내린 폭격 명령입니다. 제 명령에 이상이라도 있습니까?"

여기서 더 하시면, 저는 대위의 충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라고 그가 덧붙였다. 아무말도 하지 못하는 그를 보며 남자가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폭격이 이루어지는 즉시 총검돌격하세요. 마침 적 지휘부의 일부가 저 병원 안에 있다더군요. 지금이 적 전선에 균열을 낼 적기입니다.  반론은 받지 않습니다. 그 외에 하고싶은 말은 있습니까?"

죽어서 지옥으로 보내주시오. 

대위는 끝내 그 말을 삼키고 있었다.

* * *

뿌우우우우우우

나팔이 울렸다. 뒤를 힐끗 본 대위는 그 찰나에 참으로 많은 얼굴들을 보았다. 공포에 질린 얼굴, 자신감에 가득 찬 얼굴,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얼굴까지. 그러나 그 가지각색의 얼굴에는 유일한 공통점이 있었다. 삶을 붙잡고 싶다는 열망이 알알이 쓰여있었다. 대위는 그들이 가진 상념의 무게를 애써 무시하며 소리를 질렀다. 

"총원 착검! 게르만 민족의 적법하신 통치자, 카이저 빌헬름 2세와 독일 제국을 위하여!"

소리는 질렀으나 그 자신조차 왜 그것을 외쳤는지는 알지 못했다. 사기진작은 커녕 회의만이 들었다. 왜 나는 타인을 위해 내던져져야 하는가? 그 짧은 시간동안 남자는 어린시절을 떠올렸다. 그가 처음으로 인간에게 섬찟함을 느낀 그 날을. 이제는 비로소 알겠다. 제국이 탄생한 그 날. 그가 느낀 감정은 다름아닌 공포였다. 민족, 황제, 제국.... 그러한 단어에 가슴이 뛰던 어린 아이는 이제 없다. 다만 영원히 철과 피에는 익숙해지지 못할 나약한 인간만이 있을 뿐.

콰앙

가장 앞에 서서 허공에 권총을 쏘며 병사들을 격려하는 그의 앞에 폭발하는 건물이 보였다. 폭발 후에 남자를 덮친 먼지 속에는 참으로 많은 것들이 있었다. 그들이 쌓아올린 벽돌 조각과 저들이 깔아둔 철조망의 쇳조각. 드문드문 먼지가 묻은 하얀 천 조각. 그리고 이제는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살조각까지. 남자는 생각했다. 

성녀의 기거를 짓뭉겐 내가 적그리스도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뿌우우우우우우

더딘 발걸음을 재촉하듯 나팔이 또 울렸다. 남자는 다시 생각했다.

오, 하나뿐인 나의 주여. 부디 저를 용서치 마소서.

그리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