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섬은 대매천열도와 대매천해산(뿌리부터 측정하면 26km, 지각으로부터 평균 21Km 높이, 바다위에 나와있는 최대 높이는 장산이라 불리는 6300미터정도)을 구성하는 섬들중 가장크고 또한 본체에 해당한다.


매천섬엔 선사시대 이래로 여러소수민족들이 도래해 살고있었다. 머나먼 동쪽 대륙에서 청동기를 들여온 자들도 있었고 머나먼 서쪽바다 건너에서 철기를 들고온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곧 떠나거나 먼저온자들과 섞여들었다. 


하지만 스스로를 월령인이라 자처하는 동방대륙에서 온 자들은 이번에 달랐다. 

공통력 기원전 2년 이들은 최초로 월령국왕의 명에 따라 이 섬의 서남부를 월령국의 영토로 

합병한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이를 고대 3군이라 한다.


하지만 고대 3군은 본국의 정세가 좋지 못하게 되었고 이런저런 악재로 결국 공통력 기원후

376년 폐지되고 군사와 관료들이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상당수의 주민들이 본국으로 

이들을 따라 돌아갔으나 몇몇은 남게 되었는데 그들은 다시 월령국인들이 돌아왔을땐

보이지 않았으므로 원주민들에게 흡수되었거나 모두 살해되었다고 추정했다.


월령인들은 사정이 나아지자 다시 돌아와 3개의 군을 세웠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들은 숫자가 적었고 그렇게 사납지는 않았다. 그때가 기원후 864년이었다.


하지만 점차 월령인들은 숫자가 증가하였고 3개군은 3개 주로 발전되었다. 

3개주 주민들은 개척과 영토확장과정에서 원주민들과 사사건건 충돌했다.

때로는 월령인들이 원주민 여자와 아이들을 모두 죽였고 원주민들은 월령인들 마을을 통째로불태웠다.

피로 피를 씻는세월이었지만 곧 월영인들은 본토로부터 화약무기를 수입했고

남서부지방의 대세는 이미 월령인으로 기울어버렸다.


어찌되었든 간에 3개주는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제각기 다른길을 걷게 되었다.

교주(현재의 교주도)는 주목(주의 장관)을 현지인들이 선거로 뽑게되었다.

은주(현재의 은천시 주변에 주목부관아가 있었다)는 주목이 왕처럼 군림하며 세습하게 되었다.

서해주(오늘날 서해남부지방)는 어떻게든 중앙조정과의 연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결국 1369년여름 교주는 일방적으로 서해주의 합병을 선언한뒤 침공하여 서해주를 멋대로 통폐합하고는 스스로를 주자사(주목보다 한단계 위의 주장관, 큰주에 임명하며 주목과 달리 군사권이 있었다)라 칭했고 중앙조정에 이를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세습주목이 다스리던 은주목 또한 자사직을 모처럼 본국에 달라고 통보했고 중앙조정에서 승인한다. 이로서 두 주의 장관은 동급이 되어 상하관계를 논할수 없게되었다. 하지만 중앙조정은 머나먼 매천섬사정에 신경쓸 겨를이없었다.


1388년 결국 대세를 따라가지 못하고 은주는 교주의 침공을 받아 한달간의 공성끝에 더이상의 피해를 보고싶어하지 않은 은주 주민들의 압박에 은주자사가 월영왕으로부터 받은 도장을 교주자사에게 바치며 멸망했다. 


이후  1426년 결국 중앙조정도 오래가지못해 멸망하고 신왕조로 교체되는 시기가 되는데 이틈을 타 교주가 독립을 선언했다. 스스로를 교원국이라 칭하였다. 교원국 왕은 표면적으로는 월영국의 신하를 자처하는 제스춰를 보였으나 월영국과 독립된 국가이므로 어떠한 간섭도 배제한다는 선을 그었다.


물론 월영국 신왕조 중앙조정은 이를 두고보지 않으려고 했다. 이에 신왕조는 외척이자 왕족이기도한  견수양을 평정사로 보냈다. 견수양은 명문 견씨가문의 출신의 신왕조 성립에 크게 이바지한 장군으로 사실상 월영국이 보내는 히든카드나 마찬가지인 인물이었다. 이해가 1466년의 봄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운이 없었고 도중에 태풍을 만나 대부분의 전선과 병기, 병력이 상실된다. 이에 어쩔수없이 곧바로 교원을 치지 않기로 하고 옆으로 가고자했으나 계속되는 악재와 혼란, 교원국의 추격과 방해, 교원국이 사주했거나 자발적인 원주민들의 공격을 피해 겨우 섬을 돌아 동해안에 도달했다. 이들이 처음으로 상륙한곳이 오늘날 갈포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1472년이었다.


갈포는 해안으로 포구로 삼기에는 적당했지만 갯벌만 드넓고 땅에 소금기가 있어 척박했고 물도 부족했다. 그래서 이들은 내륙으로 이동했고 과연 산지가 둘러싸고 오늘날 송암강이라 불리는 강이 자연해자가 되는 천혜의 요새적인 대평원이 드러났다. 이들은 이곳을 매천이라 이름짓고 하늘에 재사를 지냈다. 이해가 1474년이 되는 해이다.


사실 위에 편의상 매천섬이라 했지만 실은 매천이란 이름은 이 때 처음 생겼다. 교원국측은 교원섬 월령국측은 동쪽바다에 있는 큰 섬이라해서 동한섬이라 불렀던 섬이었다. 


한편 교원의 방해때문에 본국에 연락도 지원도 어렵게 되자 견수양은 장기전을 예상하고 둔전을 실시하고 원주민들을 모집해 인구를 불리기로 하였다. 스스로를 동한평정사겸 매천부목겸 동서절도사겸 승록광목대부 겸 보국대학사라 칭했다. 이해가 1477년이다. 견수양은 본디 문관출신으로 장원급제자였고 승록광목대부와 보국대학사는 본래 가지고있던 칭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