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당신을 기억한다 - 1


퇴근시간이 다가왔다. 일을 마친 직원들은 자리를 정리하고 하나, 둘 회사를 빠져나온다.
그러나 그들이 오늘 향할 장소는 집이 아니었다. 모름지기 한 주를 끝내는 불금이라면 술 한잔하며 스트레스를 풀어야하는 법.
홍보팀도 김창훈 대리 주도하에 실무자끼리 브루어리 '더 테이블'에서 모임을 가지기로 하던 참이었다.

"그럼, 팀장님께 법인카드 받아오겠습니다."

김창훈 대리는 참석자 파악이 얼추 끝나자 팀장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몇 발자국 걸었을까, 김창훈 대리는 잊고 있던 게 떠오른 듯 고개를 홱 돌려 사무실을 되돌아본다.

"선배, 뭐 있으세요?"

나갈 채비를 하던 윤성은 대리도 강창훈 대리의 행동에 당황해하며 그를 따라 뒤돌아본다.
그 둘이 시선이 향한 곳엔 성준이 오전과 같은 모습으로 키보드와 마우스를 두드리고 있었다. 

"성준씨, 안 가세요?"

박정균 사원이 성준에게 넌지시 물었다.
성준은 마우스 옆에 놓인 에너지 음료 '레드 불'을 한 입 들이키며 대답한다.

"전 이거 끝내고 바로 합류 할게요. 이모가 월요일 아침에는 시안 공개해야 된다 했거든요."

그 말을 들은 강창훈 대리가 질린다는 표정을 짓는다.

"우리 사장님도 참 너무하시다. 직원도 아니고 조카를, 다른 날도 아니고 불금에 저렇게 굴리냐."

그리고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하며 발걸음을 마저 재촉한다.

"난 야근 시키는 이모 없어서 다행이네."

성준은 피식 웃으며 능청스런 말투로 대답했다.

"조카니까 이렇게 편히 굴리는거죠."


...


어느 덧, 시계는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스마트폰에선 "까톡." 메시지 알람음이 울렸다.
많은 대화방 중, 알람음의 출처는 홍보팀 잡담용 단톡방이었다. 성준은 단톡방에 들어와 카카오톡 내용을 확인하였다.
홍보팀의 회식 인증사진 서너장과 윤성은 대리의 재촉이 담겨있었다.

"성준씨 언제 끝나요 ㅜㅜ." - 윤성은 대리

성준은 지금 끝났다며 답장을 남겼다.

"지금 끝나서 나가려구요 ㅎㅎ"
"그래용? 빨리와용 ㅋㅋㅋ." - 윤성은 대리
"빨ㄹㅣ아라. 나 치했어." - 창훈이 형
"넹~ 지금 달려갑니다!"

성준은 카카오톡이 끝나자 시안 파일을 저장하고 짐을 챙겨 서둘러 사무실을 나왔다.
이 시간까지 야근하는 사람은 없었던 걸까, 성준이 엘리베이터까지 이어진 복도를 걷는 동안 불켜진 사무실은 한 곳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

엘리베이터가 있는 복도 끝에 다다랐을 즈음, 재무팀 사무실 안 쪽에서 비친 미세한 빛 하나가 성준의 눈에 들어왔다.
누구일까? 모두 갔는데 혼자 가지 않고 남아있는 사람.
성준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발걸음을 돌려 재무팀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홀로 불켜져있는 책상 앞으로 다가간다.
그곳에는 오늘 아침 자기소개를 했던 준철이 홀로 남아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퇴근 안하고 뭐하세요?"

성준은 서류 정리에 집중하느라 자신이 옆에 있는지도 모르는 준철에게 말을 건다.
준철은 인기척에 흠칫 놀라며 옆을 돌아봤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업무 좀 확인하고 있었어요. 이제 퇴근 해야죠."

준철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그런데 음···."

준철은 성준에게 무언가 말할 것이 있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문제점이 있는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성준은 무엇이 문제인지 대략 눈치채고 자신을 준철에게 소개했다.

"전 그냥 이름 불러주세요. 그게 불편하시면 그냥 이 매니저라 불러주셔도 되요."
"아, 네."

준철이 질문을 이어갔다.

"성준씨도 이제 퇴근하시는거에요?"
"네. 일 다 끝냈으니 집에 가야죠."

둘 사이엔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준철의 눈치를 보던 성준이었다.

"같이 가실래요?"

준철은 지그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저야 고맙죠. 혼자 가기엔 심심했는데."


....


창가에 비치던 사무실 마지막 불이 꺼진다. 성준과 준철은 은은한 무드등이 비치는 복도로 나와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그러고보니 나이도 자세히 모르네요. 성준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준철이 엘리베이터를 잡으면서 성준에게 말한다. 그러자 성준은 장난이 치고 싶어졌는지 준철을 보며 역으로 되묻는다.

"김준철 사원님이 보기엔 제가 몇 살로 보이세요?"
"어···."

성준의 되물음에 준철은 적잖이 당황해하였다. 

"저보다 입사선배시니 나이는 좀 있으실텐데, 되게 동안이세요. 얼굴로만 보시면 많아야 스물 셋으로 보여요."
"제가 진짜 스물 셋으로 보여요?"
"네. 되게 젊어보이세요."

준철의 대답에 성준은 쿡쿡 웃는다. 그 사이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둘은 엘리베이터에 나란히 탑승한다. 이윽고 엘리베이터 카운터 숫자가 바뀌기 시작하자 성준이 입을 열었다.

"저 96년생이에요. 스물 셋 맞아요."
"아···."
"준철씨는 95년생이시죠?"
"어, 네.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준철은 자신의 나이를 바로 맞히는 성준을 신기하게 바라본다.

"그건 비밀이요. 나중에 알려줄게요."

그 사이, 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착했다. 곧 문이 열린다는 안내음이 흘러나왔다.
성준은 문이 열리자마자 내리며 뒤따라 나오는 준철에게 집 위치를 물었다.

"집 어디세요? 제 차로 데려다 드릴게요."
"그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되는데."
"제가 심심해서 그래요."
"그러면 혹시 회사에서 제공해주는 숙소 아세요?"

성준은 주차장 맨끝에 주차되어있는 랜드로버 레인지로버 벨라의 잠금키를 열면서 말한다.

"혜화동에 있는 거 말씀하시는 거죠?"
"네. 거기 맞아요."
"잘됐네요. 저희 집도 거기 근처인데."

성준은 준철이 차 문을 닫고 안전벨트를 매자 시동을 건다. 
이윽고 둘을 태운 랜드로버 레인지로버 벨라는 건물 주차장에서 나와 종로를 따라 혜화역으로 출발한다.

"저한테 말 놓으셔도 돼요."
"네?"

멍하니 창 밖 풍경만 보던 준철은 성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이다.

"저보다 형이시잖아요. 그리고 어차피 둘 다 계약직인데요."
"그래도···."
"회사 사람들도 뭐라고 안 해요. 그리고 저도 입사한 지 얼마 안됐어요."

준철은 한동안 우물쭈물 하다가 짧지만, 어색한 목소리로 "으응." 대답한다.

"김준철 사원님은 고향이 어디에요?"
"난 광주가 고향이야."
"경기도 광주요?"
"아니, 전라도 광주."
"아 진짜요? 사투리 안쓰셔서 경기도 광주인 줄 알았어요.

성준은 신호가 떨어지자 핸들을 돌리며 말을 이어간다.

"근데 전라도 분들이 사투리 잘 안쓰시긴 해요. 경상도는 딱 티가 나고."
"그래? 나 사투리 하는데."
"별로 티 안나요."

이번에는 준철이 성준에게 고향을 물어본다.

"성준이는 고향이 어디야?"
"전 어디일 것 같아요?"
"서울 사람일 것 같아."
"서울에서 태어나긴했는데, 산지는 얼마 안됐어요."
"그러면 그 전에는 어디서 살았어?"
"일산이요. 되게 살기 좋아요."

그들이 이야기 하느라 시간 가는 것도 모르는 사이, 자동차는 목표지인 혜화동 숙소 앞에 도착하였다.
성준은 차를 숙소 앞에 잠깐 멈춰둔다. 준철은 안전벨트를 푼 뒤 차에서 내리며 성준에게 고맙다 인사한다.

"오늘 태워다줘서 고맙다. 내일 보자."
"뭘요. 내일 뵈요."
"그래."

준철이 차문을 닫고 혜화동 숙소로 들어간다. 성준은 준철이 숙소 안으로 사라지자 차를 몰고 회식 장소로 서둘러 차를 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