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1년 교원공략에 실패한 태조는 발등에 불이떨어졌다. 본디 호족연합 세력이 가까운 매천국 정세에서 국왕의 중앙군이 격파당했다는 것은 호족들중 누구하나가 들고 일어나도 당장 막을 관군이 없다는 것이었고 국민들의 인기와 신망또한 땅에 떨어진것을 의미하며 중앙정부의 통제력과 위신또한 땅바닥에 널부러진것이다. 


물론 태조는 이걸 잘 추스를정도의 정치력은 가지고 있었지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호족들 대부분에게서 사병과 세금을 이전쟁에 징발했으므로 호족들또한  당장 난을 일으킬 여력은 없었던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북쪽에서 이런저런 핑계로 징세와 징병을 거부하며 벼르고 있었던 이가 북방의 대호족 북해태사교위 영소였다. 


그리고 마침 중앙군이 교원과의 전쟁에서 파멸했고 이 패배의 여파로 일어난것이 영소의 난이다. 그해가 1503년이었다.


이때 맹활약한 장군이 조철환이다. 본디 천출로 잡졸로 시작해 태조의 눈에 들어 장군까지 출세한인물로

일자무식했으나 황제의 권유로 문자와 병법을 독학으로익히고 교원과의 전쟁에서 뛰어난 전공을 세우면서도 동시에 자신휘하부대는 거진 다 보존해서 돌아온 입지전적의 인물이었다.


영소가 남진을 개시하면서 북방에서 22여개성을 함락하면서 오늘날 해양도와 갈주도사이에 위치한 관문인 위예관마저 함락, 관문을 지키던 좌장군 정갈을 주살시키며 빠른속도로 수도권으로 진군하자 조정에서는 피난을 가야한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태조는 거부했고 


조철환에게 지난전쟁에서 살아남은 병력중 3만에 추가로 징병한 병력 2만을 더해 5만명을 주어 역적을 토벌하라명하였다.


조철환은 병력을 이끌고 매천국 최후의 요새다운 요새인 안국성에 당도했다. 하지만 그는 당장가서 한일은 아무것도 하지않고 정세를 가만히 살펴보고있는것이었다.


적은 거병할때 이미 10만이었고 이후 함락한 성에서 흡수한병력과 중앙조정에 불만을 품은 호족, 일반인등등까지 합세하여 병력이 이미 15만명에 달하여 병력차만 3배였다. 이에 부하장수가 절망적인 전력차를 보고하자 조철환은


"무서워할것없다. 저들은 숫자만 많은 어중이 떠중이들일 뿐이다. 한낱 무뢰배, 야만족이 교원과의 전쟁에서 빛나는 전과를 올리고 돌아온 우리를 이길수 있겠느냐?"며 큰소리를 쳤지만 가족들에게 보낸 서신에는 그 자신도 엄청 고민한것으로 보인다.


'...그대(아내)에게 미안한 말이지만...난 아무래도 이전투에서 전사하는게(패배해서 살아갈바엔) 속은 편할거 같소..!' 라고 적고있었다.


그러면서도 조철환은 완벽한 계책을 세워야만 이 전쟁에서 승리할수 있다고 부하들에게 연설하였다.


"잘들어라! 아군이든 적군이든 언제나처럼 문제는 보급이다. 비록 적들이 점령지에서 약탈과 징병으로 충당하며 파죽지세로 남하해왔다고는 하나 적들의 본거지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다. 즉 근본적인 보급선이 엄청나게 늘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또한 적들은 머리수만 많지 이런저런 이유로 합류한 여러 어중이떠중이들의 연합에 불과하며 그덕에 유기적인 제병합동이 전혀 안되고 있는것이다. 즉 머리따로 몸따로 손발이 따로노는 중이다."


이어서


"그리고 적병력은 갈주도를 한방에 석권해 수도를 포위, 압박하여 보위를 찬탈한다는 대담하긴 하나 도박수에 가까운 성급한 계획을 세웠을 거다. 전병력을 모조리 빼와서 끌고왔을 뿐만아니라 매천은 땅이 넓고 물산이 풍부하여 몇년은 버틸만하지만 갈주는 땅이 좁고 소금기가 심한 땅에 갯벌이기 때문이다."


라고 분석하면서 부하들은 우리는 이를 최대한 이용해 적을 공략해야 할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해가 바뀌어 1504년 영소는 스스로를 영왕이라 칭하고 이미 매천의 천명은 견씨를 떠났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소도 바보 천치는 아니었으므로 조철환을 극도로 경계하는 중이었다.


"조가는 어디에 있느냐?"


라고 영소가 물으니 그의 책사가 이렇게 말했다.


"이미 안국성에 조가가 당도하였을 것이옵니다. 허나 조가 어디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사옵니다."


"왜인가?"

라고 영소가 묻자

이에 책사는 다음과같이 답헀다.


"안국성은 매천대평원에서 상대적으로 고지대에 위치하며 감제에 유리하며 송암강 지류가 본류와 만나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천혜의 요새이옵니다. 분명 조철환은 필시 지형적 이점을 이용해 배수진을 치고 송암강을 통해 보급을 꾸준히 받으며 장기전을 실행할 것이옵니다."


"그러하다. 우리또한 교원에서 패주한 견씨꼴이 날것이다. 그러하다면 우리가 조가를 성밖으로 끌어내야하지 않곘는가?"


"그러하옵니다."


이에 영소가 명하였다.


"우리는 갈포를 친다. 갈포가 우리손에 떨어지면 사실상 매천으로 가는 길에 걸리적거리는건 아무것도 없음이라! 조철환이 안나오고는 못배길것이다!" 


그리하여 영소는 대담하게 해상을 통해 상륙작전을 개시했다. 이해가 1504년 초여름이었다. 매천국의 수군은 강력한 편이었지만 국가재정이 피폐해지면서 제대로된 보급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손쉽게 영소군이 승리할수 있었던것이다. 결국 수군절도사 왕균은 약간의 수군병력만 건져서 병선을 모두 자침시키고 겨우 탈출했다.


이 급보를 들은 조철환은 급히 갈주와 수도를 지키라는 조정의 급보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전군 북해로 진군한다!"


이소식에 조정은 대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조철환의 계책을 간파한 태조는 왕균과 그휘하 병사들을 갈포수비군에 합류시킨다. 이후 견씨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각지에서 의병과 근왕군을 일으켜 갈포공방전에 동원되었다.


매천관군의 방어전은 처절했는데 결국 수비군 병력의 3분의 1이 소모된었음에도 갈포는 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영소는 매천을 코앞에두고 이게 무슨일이냐며 짜증을 부렸다. 이에 책사는 잠시 쉬는게 어떻겠냐고 건의헀고 영소도 동의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급보가 들어왔다.


목숨걸고 탈출한 전령의 보고에따르면 조철환군이 아군의 보급로를 따라 진격하며 마주치는 후속보급및 보충부대를 모조리 격파하며 본진인 북해로 강행진군중이란 것이었다.


"무어라! 이건 조철환이 갈포로 오는게 아니라 오히려 북해로 가고 있다고! 이런 미치광이 같은놈이 있나! 여봐라 당장 우리는 북해로 말머릴 돌려야만하느니라!"


그러자 책사가 말렸다


"아니되옵니다 폐하! 그 명령은 거두어주시옵소서! 매천이 코앞이옵고 비록 우리군사도 기진하나 적군또한 한계에 다달았사옵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치면 갈포가 함락되고 매천성으로 가는 길은 아무걸리적 거리는게 없을 것이옵니다!"


"하지만..하지만..어쩔수가 없구나! 조철환 네 이놈! 짐이 그놈을 끌어내려 했지만 결국 짐이 그놈에게 끌려나가는 셈이야! 허나 그놈이 가진 병력은 관군의 거의전부! 하지만 우리는 아직 그놈의 병력보다 두배는 넘는 병력이 있지 않느냐?"


"허나..."


"오히려 이대로가다간 본진이 유린당하고 우린 보급조차 끊겨 말라죽는일만 남게 되느니라! 빠른속도로 조철환을 요격하고 다시 돌아와 매천성을 친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양소군은 말머리를 본진인 북해로 돌리며 포위를 풀게된다. 이에 조철환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비록 나의 수또한 나라의 명운을 건 도박수기인 하다. 허나 무릇 역적들은 하루하루가 죽을정도로 불안한 법, 그렇기 때문에 자기 본거지를 잃는것을 목숨을 잃는것만큼 싫어하여 나를 필시 요격하러 올라올것이다."


조철환은 다음과같이 기록했다

'적들이 나를 끌어내려고 할테지만 나는 오히려 적들을 끌어내리라...' 이해가 1504년 가을이었고 매천대평원은 다행히도 풍년이었다. 그나마 이걸 걷어들일만한 장정들이 없어서 썩혀버려야 했고 징세는 군비증가로 늘어나서 백성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일단 매천국은 급한불을 끈셈이었다.


조철환은 부관에게 물었다.

"병법에서 논하는 최고의 승리는 무엇인가?"


이에 부관은 싸우지않고도 이기는것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조철환이 말했다.

"그렇다 하지만 지금 시국에선 그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다음으로 좋은 승리는 무엇인가?"

라고 묻자 그것은 아군의 피핼 최소화하면서 승리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조철환이 말했다.

"나는 지금 그것을 하려고 한다. 그리고 병서에서 논하듯. 아군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대승을 거두기위해서는 적들을 내가 원하는 시간, 조건에 맞추어 준비된 회전장소로 끌어내야만 한다."


한편 양소군이 전병력을 빼내어 북상하자 드디어 농성하던 매천군이 기어나와 양소군이 점령했던 성들을 소수병력만으로 다시 탈환하기 시작헀다. 사실상 양소군은 앞뒤로 매천관군이 양면전선을 강요하여 이제 배수진을 쳐야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렇게 아주대전이 시작되었다. 오늘날 아성 남동쪽에 위치한지점이다. 이때 양소는 치명적인 판단착오를 저지른다.


"그까짓 오합지졸들로 짐을 포위하려 하다니....여봐라 날랜병사들을 모아 후방에서 얼쩡거리는 매천군 잡졸들을 분쇄하라!"


그리하여 영소군은 병력을 두갈래로 나뉘게 되었는데 이미 매천군은 근왕군과 의병, 각지에서 추가로 징집한 신병으로 상당한 병력을 갖추어 성을 굳게 지키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보급선이나 본진을 조철환이 교란하는 틈에 알아서 꼬꾸라지기까지 장기전으로 가려고 하는게 눈에 뻔히 보였다. 


그래서 영소는 조바심이 난것이었다. 


그리고 조철환은 이때를 노렸다.


"적의병력이 크게 나뉘었고 곧 재편성을 하는중이다! 이때야말로 최적의 기회다. 돌격하라!"

그러자 부관이 물었다.

"그말씀은..?"

"그렇다. 현재상황은 아군 5만대 적군 5만 5만대 2만이다. 차례차례 각계격파로 상대한다!"


이때 지형은 고지대를 조철환의 매천관군이 점하고 있었고 경사를 따라 엄청난 속도로 매천군이 치고 들어오면서 부대분리후 재편성중인 영소군을 종횡으로 돌파하면서 찢어버린뒤 대혼란에 빠진 영소군을 포위, 각개섬멸한다.


거기다가 하늘도 영소군편이 아니었는데 일진광풍이 불어닥쳐 영소군쪽으로 바람이 불고 이에 매천군이 고지대에서 모래와 석회를 영소군진영에 퍼부으며 시야를 막았으며 화공까지 퍼부어버렸다. 


이에 본대가 대위기에 빠지자 후방을 지키기위해 파견했던 병력들이 도로 거두게 되는데 당연히 후방에서 성에 틀어박혀 농성중이던 매천관군이 이를 고이 보내줄리가 없었고 곧바로 추격하여 섬멸전에 들어갔다. 


영소는 주력병력이 모조리 분쇄되어 양익을 잃어버렸다. 이제 남은 병력은 혼란에 빠지고 기진맥진한 3만정도였으나 관군의 전력은 병력보충으로 6만으로 이제 오히려 2배차가 되었고 경험과 기세가 오를때로 오른시점이었지만 영소는 모든 점령한 성들을 잃어버렸고 아직 북해가 조철환의 손에 떨어진건 아니지만 본진과 자신의 현위치사이를 가로막고 있어 어떠한 보급도 연락도 불가능했다.


이에 영소는 훗날을 도모하며 산속으로 갑옷과 용포를 벗어 믿을만한 부하들과 절로 달아났는데

미리 조철환에게 명령을 받은 절의 수도승들이 이들이 자는틈에 죽였다. 1504년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의 일이었고 그날 밖에는 첮눈이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태조는 1505년 봄에 드디어 역적 영소의 목을 받아들고 조아라했지만 개선장군인 조철환을 푸대접하고 오히려 함대를 날려먹은 왕균을 1등공신으로 조철환을 2등평난공신으로 봉했다. 


그나마 신하들이 간언하여 왕균이 후작위를 조철환이 공작위를 받았다. 아무래도 조철환의 군사적재능과 군부와 백성들의 신망에 두려움을 느껴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조철환은 결국 1512년 왕의 질투와 의심을 받다 어명을받들어 자결했고 조철환을 견제하기 위해 힘을싫어주던 왕균또한 3사간관들을 시켜 탄핵당하게 하여 관직에서 내쫓고 2년후 유배지에서 처형했으니 이해가 1514년으로 태조는 평난공신세력을 모조리 숙청했다.